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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성철 스님 열반송에 관한 어느 스님의 ‘해설’을 보며 본문
[단상] 성철 스님 열반송에 관한 어느 스님의 ‘해설’을 보며
일전 ‘성철 스님 열반송 해석에 관한 해프닝’이라는 [단상]을 썼던 바가 있습니다.
그 글에서 스님을 비롯한 불교인들의 ‘주관적 해석’에 반대하며 오히려 ‘문자적 해석이 지성인다운 태도’임을 적시(摘示) 했었습니다.
이후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문자적 해석을 무자비할 정도로 폄훼’하는 불교옹호 글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무비(無比) 스님’이라는 분의 ‘해설’(아래 별지의 ‘자료 2’ 참조)이 압권이었는데 일면 전문가다운 설득력을 지닌 것처럼 읽혀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는 독단적인 글입니다.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고수하려는 심정이야 십분 이해됩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영해기법(靈解技法 : 영험한 해석 방법)’으로 성철 스님의 열반송 등을 옹호하고 싶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한계가 있습니다.
스님의 주장(해설)에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불교적 사상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설명이 얼마나 진지한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스님의 해설에서 용납될 수 없는 오류는 ‘문자와 언어에 관한 왜곡된 오해’입니다.
어찌하든 불교교리를 옹호해야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문자와 언어가 지니는 사회적 合意’ 자체를 근원적으로 부정(否定)하고 있습니다.
언어학자는 아니더라도 「문자와 언어가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 약속’」이라는 공적이고 기본적인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일부 문자와 언어가 2가지 이상의 ‘중의적 의미’를 지닐 수 있고, 또 “‘아’하고 ‘어’하고 다르다.”는 격언처럼 해석상의 융통성을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자 및 언어의 의미와 해석에 ‘충분한 여지(餘地)’를 인정할지라도 거기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문자나 언어로 표현된 글과 말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한계 범위 내에서 해석되고 수용’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문자적 언어적으로 명백한 의미의 글과 말’을, 엉뚱한 아니 전혀 반대의 의미라고 강변한다면, 문자와 언어생활의 약속을 파기하는 행위이며, 지성인이 절대로 피해야 할 양심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심오한 종교적 교리에 대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문자와 언어의 합의(合意=인간 사이에 약속된 법칙=의사소통) 범위 이내의 의미’로 한정시키는 것이 정당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 유의하면서 무비 스님의 비논리적 오류를 상식적 논리로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세상의 여러 고등종교 가운데 경전(經典)의 숫자에서 으뜸인 것은 아마도 불교일 것입니다. 불교는 기독교의 성경, 이슬람교의 코란, 유교의 사서삼경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경전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평생 동안 오직 경전만 읽어도 한 번씩도 못 읽는다.”고 한탄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정도로 많다는 의미입니다.
대충만 살펴봐도 경장 168경과 수많은 숫자의 율장과 논장들은 헤아리기조차 버거울 정도입니다.
결집(結集)으로 분류하면 제1결집 500, 제2결집 700, 제3결집 1000, 제4결집 500 등 무려 2,700종에 이릅니다.
또 한국의 대장경만해도 8만 개의 널판지에 무려 52,382,96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며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의 경우는 총 24부로 편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연기설, 삼법인, 사성체, 팔정도, 삼천대천세계, 점오와 돈오, 겁, 중도 사상 등 교리만도 무지하게 많습니다.
이 많은 경전과 교리들이 ‘몽땅 문자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불교 용어 중에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것이 있는데 ‘불교는 문자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는 뜻으로서 핵심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또 염화미소(拈花微笑)라는 것도 있는데 ‘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전하는 일’이라는 의미로서 ‘불립문자’와 유사한 뜻입니다.
그런데 ‘불립문자’나 ‘염화미소’ 등이 아주 그럴듯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 「헤아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많은 불교경전의 존재와 정면 대치(對峙)」된다는 점에서 엄청난 모순을 떠안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불교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난제(難題)로서 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 불교는 「도대체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없는 심오한 교리를 엄청난 글과 말로 설명해야 하는 미증유(불교 용어임)의 모순에서 출발」 한다.
셋째, 바로 앞에서 지적한 불교의 근원적 난제에 대한 해명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만, 무비 스님의 해설은 이보다 훨씬 더 큰 난점을 안고 있습니다.
지난 번의 ‘성철 스님 열반송에 관한 해프닝’이라는 [단상]의 요지는 ‘문자적으로 아주 명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문이나 한글의 의미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비 스님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므로 불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면서 ‘표현된 문자적 의미와 완전 정반대’의 해설을 내 놓았습니다.
스님의 신심(信心) 여부와 무관하게 이는 서두에서 지적했던 ‘문자와 언어의 사회적 합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최고의 천재라 할지라도 성철 스님의 열반송과 유언 등을 읽고 나서 무비 스님과 같은 해석을 내 놓을 사람은 없습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부연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명백한 성철 스님의 열반송과 유언 등을, 무비 스님처럼 정반대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면, 또 이것이 불교의 참 교리에 따르는 올바른 해설이라면, 불교는 「불립문자니 염화미소니 하는 공허한 구호를 뛰어넘어 명실상부한 ‘문자와 언어의 포기’부터 천명(闡明)」해야 합니다.
그 내용은 「불교는 사회적 약속인 문자와 언어의 기능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불교교리는 문자 내지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불교만의 문자와 언어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사전조치가 없다면 불교에 관한 그 어떤 글이나 말도 ‘불교적’으로 각색 가능해 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인다.” 써놓고 “살린다.”는 뜻이라 해석해도 할 말이 없어집니다. 또 ‘지옥=천국, 사랑=살인, 남자=여자, 사탄=부처’라고 강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에 정면 배치되는 반어적(反語的) 해석은 언어유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기록된 문자적 의미와 정반대로 해설해도 된다.」고 합의해 준 사회 구성원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교교리가 아무리 심오(不立文字)하여,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는 문자와 언어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합의된 문자적 및 언어적 定義’는 지켜져야 합니다.
만약 불교계가 현존 문자와 언어의 기능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불교계와 다른 분야 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각 문자와 언어마다 고유의 의미를 지닌다는 약속’에 따라 글을 쓰고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합의에 따르는 문자와 언어의 기능’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무비 스님 등의 ‘성철 스님 열반송 해설’에 명백히 부동의합니다.
「의사소통은 문자적 의미를 준수할 때 비로소 원활해진다.」는 엄연한 진실(사회적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 바라면서 지난번의 제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성철 스님의 열반송 및 유언 등(첨부 자료)을 ‘아무 사심 없이 그냥 읽어보기만’ 합시다!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불교 교리’도 잠시 접어두고 ‘학교에서 배웠던 대의(大意) 찾기’도 밀쳐두고, 무념무상(역시 불교용어임)으로 그냥 읽기만 합시다! 그 이후에 각자 해석해 봅시다!!! ⇒ ‘어떤 해석이 옳을 것인가’의 판정은 ‘문자와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무시할 것인가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글과 말은 그것이 의미하는 사회적 합의 한계 내에서 해석되는 것이 합당」 합니다!
********************** < 별지 : 첨부 자료 > ***********************
<자료 1 : 성철(性徹)스님 열반송>
생평기광남녀군 미천죄업과수미 (生平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활함아비한만단 일륜토홍괘벽산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자료 2 : 무비(無比) 스님의 해설 >
이 글은 성철(性徹,1912-1993)스님의 열반게송이다.
스님께서 이 게송을 남기고 열반에 들자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불교인들에게는 항상 접하는 내용이라서 별 관심이 없었으나 비불교인들이나 타 종교인들은 대단히 의아해 하였다.
나아가서 일부 다른 종교인들은 불교를 폄하할만한 꺼리가 생겼다고 하여 이리 저리 글자대로만 해석하여 크게 비방하고 나섰다.
그래도 불교인들은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소치라 생각하고 그러다가 말려니 여겼다.
그런데 10년이 훨씬 지난 요즘에 더 극성이란다.
성철스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선전을 하며 불교를 형편없는 종교라고 비방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새삼 이 명구 난에 그 해석을 남기게 되었다.
불교에서 존재 일체를 보는 견해가 교리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중도(中道)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성철스님은 일생의 불교공부를 백일법문이라는 법회를 통해서 거의 모두를 피력하였다.
백일법문의 일관된 사상은 중도다. 그것은 스님 역시 일체 존재를 중도로 보았고 불교를 중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중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시다가 스스로를 중도광(中道狂)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일체의 존재원리가 중도며 그것을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도 중도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백일법문 속에는 근본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중도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정리하였다.
중도는 공식이다. 경전과 어록도 모두 중도공식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이론은 아무리 짧은 글이라 하더라도 중도가 표현되지 않으면 온전한 글이라고 보지 않는다.
열반송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성철스님의 열반송은 철저히 중도로써 자신의 일생을 표현하였다.
중도란 간단히 말하면 절대부정에서 절대긍정을 나타내는 이론이다.
사물이나 인간의 의식세계를 중도적으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을 쓰지만 성철스님은 자신의 일생을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라고 철저히 부정하였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성자이기에 그 부정은 더욱 빛난다. 자신존재의 그 진공성의 표현은 참으로 숨이 막힐 정도이다.
경전이나 어록에는 공(空)이나 무(無)를 사용해서 중도를 표현한다.
참고로 금강경의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은 세존이 자신의 깨달음과 일생동안의 설법을 철저히 부정한 내용이며, 또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은 제자들의 수행성과(修行聖果)마저 철저히 부정한 내용이다.
다시 절대긍정으로서의 내용은 “산체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一輪]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라고 하였다. 절대긍정의 지극한 표현이다.
선불교에서의 지옥은 극락의 다른 표현이며 한은 기쁨의 또 다른 표현이다.
큰 죽음은 큰 삶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옥과 극락을 소요자재하면서 모든 생명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그들을 제도한다.
또한 산체로 지옥에 간다는 말은 죽을 겨를도 없이 지옥에 빨리 가서 지옥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성철스님 같이 법력이 뛰어난 분이 지옥에 가야 지옥의 중생들을 건질 수 있다.
보통의 도력으로는 지옥에 갈 자격이 되지 못하며 가 보아야 지옥의 중생들을 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양”이란 무엇인가? 성철스님 자신이다. 태양이 높이 떠서 세상을 비추다가 지금 이렇게 아름답고도 장엄한 저녁노을을 드리운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지나친 자기자랑인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이 이상의 자신에 대한 절대긍정은 없다.
한편 태양은 우리들의 자신이며, 지금 이렇게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바로 이 사실이다. 모든 존재와 모든 생명의 근본이며 성철스님의 본래 면목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크게 긍정하여 가위 중도광(中道狂) 답게 철저히 중도로서 표현하였다. 천고의 절창이다.
부디 바른 이해가 있었으면 한다.
<자료 3 : 성철스님의 유언>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자료 4 : 성철스님의 신앙고백>
-. 성철스님은 조계종 종정으로 있던 1987년 "부처님 오신날" 법어에서 "사단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부처님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 출처 : 조선일보 1987.4.23.(7면), 경향신문 1987.4.23.(9면),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사서실 [큰빛총서 1, 서울사시연 1994년 p. 56-59]
<자료 5 : 성철스님이 운명 전 지옥의 석가를 보고 쓴 시>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西天(서천)에 속이고 東土에(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녀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칼을 휘두르니 만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알든지 모르든지 상신 실명을 면치 못하리니
말해보라 이 무슨 도리인가.
작약 꽃에 보살의 얼굴이 열리고
종녀잎에 夜叉 야차(마귀 이름)의 머리가 나타난다.
목위의 무쇠간은 무게가 일곱근이요
발밑의 지옥은 괴로움이 끝없도다.
석가와 미타는 뜨거운 구리 쇳물을 마시고
가섭과 아난은 무쇠를 먹는다.
몸을 날려 백옥 난간을 쳐부수고
손을 휘둘러 황금 줄을 끊어버린다.
산이 우뚝 우뚝 솟음이여 물은 느릿느릿 흐르며
잣나무 빽빽함이여 바람이 씽씽 분다.
사나운 용이 힘차게 나니 푸른 바다가 넓고
사자가 고함지르니 조각달이 높이 솟았네.
알겠느냐 1 2 3 4 5 6 7 이여
두견새 우는 곳에 꽃이 어지럽게 흩어졌네.
억! ---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임종하다)
* 위의 시는 성철 스님의 운명 전 <시사저널> 김당 기자가 취재해온 것이며 이 시는 추상적인 시가 아니라 운명 전 영계를 직접 보고, 그리고 지옥의 석가와 달마와 가섭과 아난이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시로 묘사한 것으로 영계를 직접 보지 않고는 자기가 평생 섬겼던 석가를 도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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