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바람소리
[묵상]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은? 본문
[묵상]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은?
) -->
) -->
♣ 갈3:23-29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24-25절>……)
) -->
) -->
한자로 선생(先生)이란 단순히 ‘먼저 태어난 사람’의 뜻입니다만, 실제적 의미는 보다 넓다 하겠습니다.
) -->
학문적으로는 “도를 깨달은 자, 덕업(德業)이 있는 자”로 정의되고 있으며, 아울러 “학식이 많은 사람 또는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 -->
사회적으로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미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스승’이라는 높임말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 -->
위와 같은 정의는 고려만 하고, “선생”이란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단순화시켜서 묵상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무방할 것입니다.
) -->
) -->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학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취학 전에는 유치원 교육을 받는 것이 오늘날의 대세이기도 합니다.
) -->
아무튼 각 학제마다 ‘선생’이 존재합니다. 유치원 선생님, 중고등학교 교사, 대학 교수 등으로 칭해집니다.
) -->
어느 학제에서든 선생의 지식적 수준은 학생을 훨씬 능가합니다. 유치원 선생의 지식은 유치원생보다 우수하고 대학원 교수의 지식은 대학원생들을 능가합니다.
) -->
그런데 유치원생에게는 유치원 선생의 지식이 대단할지라도 대학원생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원생은 유치원 선생의 지식수준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 -->
여기서 ‘선생의 한계’가 도출됩니다. 즉, 선생이란 어느 특정 단계나 시기에 한하여 지식을 전수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 -->
그렇습니다. 선생은 ‘한시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단계나 시기가 지나면 선생의 존재(지식적 가치)는 현저히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개역한글성경(신약)을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 -->
○ 선생 : 64회 사용(마8:19-요20:16 등 복음서에서 56회, 행16:30-벧후2:1 등에서 8회).
○ 스승 : 3회 사용(고전4:15, 딤전2:7, 딤후4:3).
○ 몽학선생 : 2회 사용(갈3:24, 25).
○ 랍오니 : 2회 사용(막10:51, 요20:16).
) -->
한편 헬라어 검색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 -->
○ 디다스칼로스 : 교사(teacher). 58회 사용(복음서에 48회, 특히 예수님께 41회). 세례 요한, 니고데모, 유대선생들에게도 사용됨.
○ 파이다고고스 : 관리자, 안내자, 몽학선생(a trainer of boys=tutor). 3회 사용(고전4:15, 갈3:24, 25).
○ 랍오니 : 나의 주인, 나의 선생님. 아람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2회 사용(막10:51, 요20:16).
) -->
한글과 헬라어는 정확히 일대일 대칭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디다스칼로스 및 파이다고고스’가 ‘선생 및 스승’으로 교호(交互) 번역되었습니다. ‘파이다고고스’의 경우 1회는 “스승”으로(고전4:15) 2회는 “몽학선생”(갈3:24, 25)으로 번역되었고, ‘디다스칼로스’는 대부분 “선생”으로 번역되었으나 2회는 “스승”으로 번역(딤전2:7, 딤후4:3)되었습니다.
) -->
아무튼 “몽학선생”이란 ‘어린 아들(약 6-16세)의 외적인 교육(예의, 식탁예절, 행동거지)을 맡은, 대개 노예 상태에 있던 전쟁 포로 중에서 학식, 검술, 교양이 높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감시인 또는 교정인’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별지를 참조바랍니다).
) -->
한글과 성경의 문자적 의미탐색은 이 정도로 마치고,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 -->
) -->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신칭의’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곳입니다. 3장에서도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논증하면서 율법주의나 율법폐기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 -->
이러한 문맥에 포함된 오늘 본문은 ‘율법=몽학 선생’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
24절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몽학 선생인 율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기능입니다.
) -->
그런데 25절은 더 나아갑니다. 일단 믿음이 온 후에는 더 이상 ‘몽학 선생 즉,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 -->
위에서 살폈듯, “몽학 선생”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유치원 선생’에 해당된다 할 것입니다.
) -->
) -->
현실교회에서 믿음이 없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자세히 소개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자를 일컬어 “목사”라 합니다(이 용어는 비성경적이지만 전통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합니다).
) -->
기독신앙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신자 시절에 목사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 막 배움의 길에 들어선 유치원생에게 유치원 선생의 존재가 절대적인 것과 유사합니다. 목사는 초신자에게 꼭 필요한 “몽학 선생”입니다.
) -->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목사의 직능은 매우 제한적이 되고 맙니다. 마치 대학원생에게 유치원 선생의 의미가 변하는 것과 동일하게 됩니다.
) -->
이때가 되면 유치원 선생(목사)는 대학원생(영적으로 성숙된 일반성도)을 가르치려는 망상을 지녀서는 안 됩니다. 유치원 선생은 대학원생을 가르칠 능력이 없습니다.
) -->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라는 말씀(25절)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몽학 선생’을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이게 성경의 명령입니다.
) -->
만약 목사를 떠나면(목사의 가르침을 뛰어넘으면) 일반성도가 망할 것으로 걱정하기 십상이지만 이런 엉터리 근심은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 -->
성경이 ‘믿은 후에는 성령께서 직접 우리의 스승이 되심’을 보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요16:13). 믿음의 문을 들어선 다음부터 일반성도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한 분 뿐이십니다.
) -->
이 인도하심은 인간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현실교회에서 어떤 직분으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 -->
온전히 성령님께 맡겨 드려야 할 부분입니다.
) -->
) -->
서두에서 ‘선생은 한시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으며 단계나 시기가 지나면 그 존재(지식적) 가치는 현저히 줄어든다.’고 하였습니다.
) -->
현실교회에서의 목사의 직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성도가 믿음을 얻은 후에는 목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성령님(유일하신 대학원 교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 -->
이 명확한 성경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이미 장성한 일반성도를 가르치겠다고, 없는 지식 쥐어짜며 우왕좌왕하는(스스로 스트레스 받는) 일부 목사들의 행태가 마음을 울적하게 만듭니다.
) -->
) -->
초신자들에게 기독신앙의 초보를 가르치는 몽학 선생의 임무에만 충성하는 정신 차린 목사들이 많아지면 참 좋겠습니다. 이미 장성한(믿음의 길로 들어선) 성도들을 가르치실 분은 오직 성령님 한 분 뿐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양심적인 목사들이 많아지면 더 좋겠습니다.
) -->
) -->
*******************************************************************
) -->
) -->
[스크랩] 몽학 선생이란 무엇을 가르치나요?(글/扈一麥)
(출처:http://cafe.daum.net/ilmak / 자료-난해 알고싶은 성경)
몽학(蒙學) (어린몽 배울학)선생이라는 단어가 현대인들에게 생소하게 들려서인지 가끔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를 봅니다. 몽학선생이란 단어를 개정개역에는 초등선생, 한글개역에는 몽학선생, 킹제임스 성경은 훈육선생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몽학이라는 단어를 꿈몽(夢)자로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우리나라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스라엘 배경사적인 것으로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확인하는 습관은 가장 중요합니다. 일례로 paidagogos(파이다고고스)라는 헬라어는 유리피데스(Ευριπίδης)와 헤로도투스(Ηρόδοτος) 이래로 나타나며 자주 사용되는, 랍비 언어에서 빌려온 차용어 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단지 바울의 경우, 즉 갈라디아서 3장 24-25절과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만 사용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주변 세계에서는 (약 6세에서 16세에 이르는) 아들의 외적인 교육(예의, 식탁 예절, 행동거지)을 맡은, 대개 노예 상태에 있던 전쟁 포로 중에서 학식, 검술, 교양이 높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 -->
이런 점에서 paidagogos는 '감시인' 또는 '교정인'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paidagogos의 부정적인 평가는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두 구절에서도 전제되어 있습니다. 곧 paidagogos로 말미암은 감시하는 일의 마침도 간파된다(갈 3:23-26). 또 복수인 paidagogoi(개역성경에서는 '스승')는 '아비'(바울을 가리킴)와 대조적으로 나타냅니다(고전 4:14-16). 힘이 센 종을 골라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가르치고 감시하고 보호하며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는 자유가 없고 고난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하는 몽학선생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헬라문화로 거슬러 올라가서 스파르타교육 차원에서 보게 됩니다.
) -->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듯이 철학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schoolmaster)입니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였습니다. 칼타고가 제국의 서부에서 로마 다음의 제 2의도시가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에서 로마 다음의 도시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칼타고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평가해서 칼타고는 로마적인 특성을 지녔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을 지녔습니다.
) -->
주전 200년부터 주후 300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이고, 약 50만의 인구를 가진 상업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집트 전체를 합친다면 유대인의 총수는 약 100만에 육박했습니다.
) -->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종교와 삶의 방식에서 헬라사상과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역사에 알려졌으며 이들에 의해 이곳에서 주전 250년경에 70인경(the Septuagint)이 번역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대표적 인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배경에 대해 몽학선생을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 -->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사이에서 큰 세력을 가졌던 국가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스파르타는 군주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그 교육제도의 특색도 군국주의식 교육입니다. 스파르타의 교육목적은 극기(克己)와 엄한 기율(紀律)의 생활을 통하여 호전적(好戰的) 시민을 훈련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각종 신체적 훈련을 통하여 강건하고 민첩한 육체로 단련시키는 한편 군사훈련을 통하여 용감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이 스파르타의 교육목적이었습니다. ) --> 이것이 스파르타의 생활이 군사적 기초 위에서 조직되어 있으므로 교육목적도 시민은 국가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스파르타인은 원레 호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목적도 군국주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강한 힘․용기․복종력․인내력을 기르면서 또한 조국에 대한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인은 이와같은 교육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남아는 출생과 더불어 신체검사를 해서 허약아는 산속에 버려 죽게 하였으며 합격 판정을 받은 아이만 7세까지 가정에서 길렀습니다. ) --> 8세가 되면 부모에게서 떠나 18세까지 국가가 마련한 공동교육소에 수용되어 엄격한 육체적 단련과 애국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18세부터 20세까지는 전문적 군사훈련을 받고 이어서 30세까지는 군인으로 복무하게 했습니다. 또한 스파르타의 교육내용은 지적인 면보다 신체적인 훈련을 중시하였습니다. 즉 신체의 성장과 발달을 위한 군대식 훈련을 받으며 전투방법과 기술을 배웠고 씨름․창던지기․말타기․수영 및 뛰어넘기와 활쏘기 등이 그들의 중요한 교육과정이었습니다. ) --> 음악도 이에 맞추어 군대음악과 노래, 군대식 춤을 곁들였고, 지적인 면에 있어서는 호메로스의 시, 리쿠르구스(Lycurgus)의 법률을 암기시키는 정도의 간단한 것이었으며, 독(讀)․서(書)․산(算)은 극히 초보적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교육방법은 교수라기보다 일종의 훈련이었습니다. 무자비한 체벌에는 군대식 훈련방법과 전투방법을 사용하였고, 체벌의 목적은 심한 고통을 참는 습관을 기르려는 것이었습니다. ) --> 스파르트 교육방법은 극히 엄격하고 강제성이 입각한 것이었으며, 체벌이 무자비하게 가해졌으므로 극히 엄격한 교육방식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교육목적은 비단 남자교육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여자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여자교육도 7세까지는 주로 가정에서 담당하였으나, 그 후에는 일정한 수에 따라 몇 개의 반으로 조직되어 국가의 감독 밑에 유희와 신체적 단련을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 --> 스파르타 여자교육의 특색은 ① 건강한 신체로서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하는 것, ② 정절(貞節)을 지키는 것, ③ 남자와 같이 나라를 사랑하고 의무를 지키며 법률을 준수하는 것 등이며, 이와 같이 스파르타의 여성교육은 강한 무사(武士)의 어머니로서 혹은 아내로서 애국심에 불타는 여성으로 양성시키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강한 훈련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http://cafe.daum.net/ilmak |
) -->
갈라디아서 3장 24절은 율법(nomos)을 paidagogos와 비교한다. 곧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의 의미는 모세의 율법이 우리를 "교육적으로"(paedagogisch)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에 의해 어떤 식으로 갇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5절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곧 "그러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더 이상 감시인(개역성경에서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이런 비교로써 바울의 경우 단지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즉 예속적인 기능을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율법의 시한적 과제 역시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26절),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갈4:1-7).
) -->
고린도전서 4장 15절은 paidagogos를 '아비들 외에 존경 받는 사람'(Respektsperson, 개역성경에서는 '스승'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로서 고린도인을 권면한 후에(14절), 자신과 그곳 교회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아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복음으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 아비의 권면과 스승을 통한 폭로의 차이는 특히 아비가 아이들에게 그 자신을 본 받을 것을 요구한다(16절)는 사실에 있습니다.
) -->
성경에서는 구약의 율법이 신앙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며, 몽학선생인 율법아래에 있을 때에는 율법에 매여서 종 노릇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제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과 믿음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몽학선생인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음으로서 종의 신분이 아닌 주인의 아들로서의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갈3:23-25, 요1:12)
) -->
다시한번 몽학 선생을 쉽게 정리하면 몽학은 어릴 몽(蒙)자로 배우는 어린학생을 의미합니다. 어린 학생과 무자비한 선생의 관계로 두 사람이 존재하는 낱말과 같이 느껴지지만, 둘이 하나되는 낱말로 선생은 선생인데, 어린 선생이라는 말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
그런데 이 선생님이 누구인가에 혼동을 하기 쉽습니다. 선생이라는 말이 인칭대명사이기 때문에 사람일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경의 문맥을 자세히 읽어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 몽학선생이 누구인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 -->
성경을 읽어 보겠습니다.【갈라디아서 3장24절이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을 그대로 보면 율법 몽학선생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문자이고 언어인데, 어떻게 몽학선생인 인칭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될 수도 있겠으나, 율법은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존재함으로 선생이라는 인칭을 쓸 있다는 것입니다.
) -->
또, 갈라디아서 말씀에서 율법은 몽학선생이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해석 하자면, 율법은 도의 초보를 신앙인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함으로 몽학선생이라는 말씀입니다. 도의 초보라 함은 젖이나 먹을수 있는 수준의 가르침이 된다는 말씀이기도하고, 율법은 젖이나 먹이는 수준의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라는 뜻도 되고, 그래서 율법이 어린 학문의 선생이라는 말씀입니다.
) -->
바울 사도가 이런 말씀을 한 이유는 어린아이 신앙에서 장성한 자의 신앙으로 자라가라는 말씀으로, 율법의 문자주의는 어린아이가 지켜야 할 규례이지만, 율법 속에는 말씀의 속뜻이 있음으로, 그 속뜻을 알 때 온전한 율법, 완전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음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라는 의미로서 신앙자세가 되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어린신앙은 율법에 매여서 꼼짝을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몽학 선생인 율법의 감시에서 벗어나서 원래 종이었던 몽학선생을 호령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扈ⓗ
) -->
'신앙의 여정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 바벨탑의 꿈 - 흩어짐을 면하자! (0) | 2016.07.20 |
---|---|
[묵상] 바른 교리는 바른 실천 위에서 (0) | 2016.07.17 |
[묵상] 많이 선생 되지 말라! (2) | 2016.07.12 |
[묵상] 능력이 뭐길래! (0) | 2016.07.11 |
[묵상]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21:18-22) (0) | 2016.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