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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바벨탑의 꿈 - 흩어짐을 면하자! 본문
[묵상] 바벨탑의 꿈 - 흩어짐을 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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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1:3-4(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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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내리신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습니다(창1:28). 이 말씀은 실행령(實行令)이었습니다. 당연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령(禁止令)을 앞서는 긍정적 명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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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명령의 최종 형국인 “땅에 충만”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한 곳에 머물러 정착해서는 안 되며 지속적으로 뻗어나가야만 합니다. 즉 ‘떠돎’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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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독교 진리는 ‘끝없는 떠돎’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떠돎은 천국에 가야 겨우 끝날 숙명일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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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죄성의 부정적 영향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가인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창4:17). 다른 말로 ‘정착’했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명령(유리=창4:12)에 위배되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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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로 원인류가 전부 멸망당하고 새로 시작된 신인류도 그러한 과오를 다시 반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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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아들들에게 동일한 복을 내리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이 말씀도 당연히 끊임없는 ‘떠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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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시 정착을 시도합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시날 땅에 이르러 성과 대를 쌓는 목적이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흩어짐을 면하자.”(본문 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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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17절의 에녹성과 이곳의 바벨성 모두가 ‘성’(城)입니다. 성은 성벽에 의해 내부와 외부가 엄격히 구분됩니다. 적아 대치의 개념입니다. 결코 동료나 동포의 한 무리 개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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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아주 조금만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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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벽돌 만들기, 벽돌 굽기, 성과 대를 쌓기 등은 인간의 준비와 노력이 전제된 일들입니다. 아무 준비없이 아무 각오없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치밀한 계획 아래 장기간 꾸준히 해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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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히) ‘이르’는 ‘성읍’을 말하는데 이는 ‘영구한 정주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명령(충만하라. = 흩어지라)과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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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히) ‘미그달’은 ‘탑, 망루’의 뜻입니다만 가장 크고 높은 장소를 지칭합니다. 성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설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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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본문의 뜻을 간략히 요약한다면 ‘인간의 대단한 노력으로 견고한 성과 망루를 건축하여 흩어짐을 면하자.’입니다. 떠돌지 말고 정착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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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가나안 시대에 접어든 후에도, 유리와 정착의 대립은 계속됩니다. 그것도 구약 성도들에게 최고의 가치였던 성막과 성전을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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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정통신학은 성막이 성전으로 바뀐 것을 ‘점진적인 계시의 발전’으로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개괄적 계시’가 요한계시록의 ‘세부적 계시’로 발전되었다는 사고의 산물로서, 상당한 논리성을 지니는 이론입니다(일면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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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특정 신학이론에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불변진리가 있는가 하면 특정 시기와 장소에 한정되는 진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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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열린 관점으로 보면 성막에서 성전으로 발전된 것은 아쉬운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대충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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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성전의 피상적인 특징은 ‘이동식’과 ‘고정식’이라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무조건 떠나야 했고, 성전은 예루살렘에 고정되어 결코 이동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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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막과 성전 사이에는 놀라운 상이점이 있는데 성경은 이를 살며시 가려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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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산물’입니다! 모세를 비롯한 그 누구도 성막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주 세부적인 식양까지 정해주셨습니다. 성막은 ‘순수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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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성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혹 다윗에게 성전의 모양을 알게 해 주신 구절(대상 28장)을 피상적으로 읽고서, 성전도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건축물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12절)이라든지 “하나님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신 것”(19절) 등의 구절을 보면 더욱 그리 생각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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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너무 성급한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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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성전건축 소원과 이를 금하시는 하나님의 대화를 자세히 읽어야 합니다(삼하7장, 대상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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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성막이 협착하고 비좁아서 지내시기에 매우 불편하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드넓은 왕궁에서 살던 다윗이 미안한 마음에 ‘성전이나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건축의 출발점이 누구였느냐를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으로부터 출발된 것이 성전입니다. 다윗의 소원을 일시적으로 거절하셨다가 이후에 솔로몬이 건축토록 허락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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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하나님의 원래 뜻에 의한 허락이 아니라 다윗의 소망에 대한 마지못한 허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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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비록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더라도, 인간들의 요구를 수락하시는 기사가 많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징계를 만류하는 아브라함의 경우와(창18장), 타락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십사 간구하는 모세의 경우(출32장)도 그러한 예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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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극명한 예는 신정통치를 거부하고 왕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요청을 허락하시는 장면입니다(삼상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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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백성들이 왕을 세우게 해달라고 하자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7절). 그래서 사무엘에게 왕정의 폐해를 백성에게 알려주라고 하십니다(9절). 그래도 막무가내로 버팅기자 하나님은 마지못해 허락하십니다(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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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22절)는 말씀을 단순한 허락의 의미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허락은 하시지만 그 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섭섭함과 아쉬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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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성전건축 소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한번 추측해 봅니다. 아마도 ‘쓸데없는 걸 만들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정 만들고 싶으면 한번 만들어 봐라.’는 속마음이셨을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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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성막과 성전의 이러한 차이점을 깊이 숙고해본다면, 하나님의 뜻은 항상 ‘떠돎’에 있으셨고 결코 ‘정착’을 의도하지 않으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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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해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듯, 성전 자체를 조금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3개의 성전 모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히 파괴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심지어 성전보다 중요한 언약궤조차 사라지게 만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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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오늘날의 성도들은 성막이든 성전이든 언약궤든 모두가 하나의 모형이었고 그 실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히 완성되었음을 압니다. 따라서 단순한 그림자에 불과했던(한시적으로 역할을 담당했던) 성막이나 성전을 도에 넘도록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가시적인 언약궤 대신 “육의 심비”(고후3:3)에 새겨진 말씀이 있고, 물질적인 성전 대신 걸어다니는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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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겠습니다. 기독신앙은 ‘정착’이 아니라 ‘이동’입니다. 다른 말로 ‘떠돎’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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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고 현대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결코 한 곳에 정착해서는 안 되고 항상 떠돌아야 합니다. 만약 정착하면 그때부터 생명력이 사라집니다. 과거 중세교회가 그랬고 오늘날 대형교회들이 그렇습니다. 정착은 교회의 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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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떠돎’의 진실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신앙이 되었으면 합니다. 갈 바를 모르더라도 늘 하나님과 동행(이동=떠돎)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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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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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한국교계에 일종의 대안으로 기대되던 서울 강남의 S 교회 예배당 건축문제가 시끄럽습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가 열변 토하며 성전(?) 건축의 당위성을 설파하더니만 결국 2,500여 억 원짜리 예배당의 건축이 시작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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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건축헌금 작정 결과, 14,259매의 작정서가 제출되었고 약정액은 약 1300억 원에 이르러, 목표치(1100억원)를 초과했다며, 좋아들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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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고 어느 편이 성경에 부합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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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확신에 찬 설명을 들어도, 마음 한 구석에서 이는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아 착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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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한 대로라면, S 교회가 서초동에 신축하려는 새로운 예배당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떠돎’과는 연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반하는 ‘흩어짐을 면하자’는 시도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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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교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많은 애를 쓰겠지만(바벨탑을 쌓는 이들처럼),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끼리끼리의 잔치(안정적인 정착) 벌이려는 것 같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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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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