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바람소리
[묵상] 많이 선생 되지 말라! 본문
[묵상] 많이 선생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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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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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교회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인 ‘목사’에 대한 인식이 극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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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멋모를 때는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목사는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직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할 지도자로 인식했었습니다. 늘 ‘옳은 자’로 여겼고 심지어 ‘영적 존재’(靈媒)로까지 오해하곤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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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목사도 어쩔 수 없는 갑남을녀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시초에는 의심을 품었고 조금 지나자 실망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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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을 넘어 절망에 이른 이유는 단순합니다. 성경이 목사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들 스스로가 ‘거룩한 성직자’로 자칭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폐해를 고스란히 일반성도들에게 전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마치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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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목사가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에 필수불가결한 직분이라면 우리는 달리 대우해야 합니다. 최소한 예수님과 동격의 존재로 인정해야 하고 무조건 순복해야만 할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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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뚫어지도록 읽어도 목사는 결코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를 좌지우지 하는 중간자일 수 없고 하나님과 성도를 연결시키는 중보자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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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 신앙에서 차지하는 목사의 비중은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는, 단지 나와 동일한 한 명의 성도일 뿐이며, 동역자 가운데 한 명일 따름입니다. 목사는 결단코 ‘영매’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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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목사에 대한 과대평가가 대세입니다. 목사를 여전히 ‘거룩한 성직자 내지 영감된 직분자’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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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증명하는 가장 비근한 예가 기회만 되면 너도 나도 목사 되려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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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변에도 친구들, 친구의 자녀들, 친소에 관계없이 아는 지인들, 선후배 등등 무수한 이들이 신학공부하고서 목사 안수를 받아 버리곤 합니다. 수십 명이 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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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잘 알려진 유명인들의 예도 무수합니다. 배우나 탤런트, 가수, 코미디언 등 얼굴 좀 알려지고 조금 특이한 체험 했다하면 영락없이 목회자의 길을 가곤 합니다. 목사 안수가 무슨 유행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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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고구마 전도왕 K 씨, 복음성가 가수 J 씨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들은 한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들이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이 그처럼 안타까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신학하지 말고 그냥 일반성도로 남아 있으면서 은사 받은 영역에서 섬기는 것이 훨씬 더 은혜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르게 영광 올려 드릴 기회를 상실하게 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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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신앙의 모범 여부와 무관하게, 그저 신학공부하여 안수만 받아버리면, 누구나 다 목사가 됩니다. 심지어 희대의 고문기술자까지도 목사 됐다 말았다 하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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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참 많이도 선생 되려하는구나!’라는 상념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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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극구 “많이 선생”되는 것을 말리시는 데 왜 성도들은 거꾸로 행할까요? 지금도 넘쳐나는 목사 숫자를 더욱 넘치게 만드는 이 현상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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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할 수 없는 요상한 현상입니다. 답을 모르기에 원인을 분석해 낼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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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경은 그 답을 정확히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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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많이”라는 형용사가 나옵니다. 원어(폴뤼스)는 ‘많은, 큰’의 뜻으로서 수(數)와 양(量) 모두에게 사용가능한 단어입니다만, 본문에서는 ‘여러 사람’을 뜻하여 숫자에 적용된 예입니다. 즉, ‘여러 사람들이 선생이 되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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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선생”이라는 명사(원어=디다스칼로스)는 ‘교사’(teacher)의 뜻입니다. 신약성경에 58회가 사용되고, 복음서에 48회가 사용되었습니다. 그중 예수님께 41회가 사용되고 나머지 7회는 세례 요한과 니고데모 등 사람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10회는 서신서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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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주석은 “선생”을 ‘율법을 분명하게 해석하여 회중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자, 즉 율법해석자’로 주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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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해석자로 주석한 것은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 기자가 오늘 본문을 포함한 이후의 말씀에는 ‘말로써 설명해야 하는 율법해석자들이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혀’라는 요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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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혀’에 관련된 주의사항은 본문 이후의 구절을 살펴야 하겠으나 오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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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오늘날 교회에서의 “선생”은 누구나 ‘목사’로 인식하게 됩니다. 조금 주의력 있는 성도들은 ‘신학교 교수’까지 포함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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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신학교수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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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존경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최소한 남는 것이 있게 됩니다. 반드시 고물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잘 하면 건더기를 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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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일반성도로 섬기면 생기는 게 별로입니다. 뭔가를 얻으려면 결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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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입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욕망’이 너도 나도 목사 되려는 현상의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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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도 그랬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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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대접도 받아보고 존경도 받아보고 자아실현의 자존심도 누려보고 싶은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현시의 욕심’이 “많이 선생” 되고자 하는 이들의 진정한 속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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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원하여 하겠다는 것을 제삼자가 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 둬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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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경고 한 마디만큼은 다시 상기시키며 마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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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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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심판’을 각오한 이들만이 목사와 신학교수가 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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