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바람소리
[묵상] 능력이 뭐길래! 본문
[묵상] 능력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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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4: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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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성경 용어에 관한 이해 부족으로 믿음의 유익이 손상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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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비전/열심/영광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는데, 좋은 용어라 생각하기 쉽지만, 미묘한 변의(變意;변질된 의미)가 스며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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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험한 개념 중에는 ‘능력’도 포함됩니다. 특히 이 ‘능력’에다 ‘불’의 개념을 가미시키면 끝내주는 환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불의 사자, 능력의 사자’라는 기괴한 인물도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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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부흥회 했다하면 천편일률적으로 재현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정신 쏙 빠지게 찬송시킵니다. 복음성가가 좋습니다. 목 터지게 통성기도 시킵니다. 무조건 큰소리여야 하고 방언기도라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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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으면 신령한(?) 부흥강사가 나와서 카랑카랑한 톤으로 외쳐댑니다. “불로! 불로! 불로! 불같은 성령(능력?)을 내려주소서!” 소름 돋을 정도로 대단한 광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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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극적이고 열광적이고 뜨겁고 밖으로 표출되는 체험을 갈망하는 기대가 엮어내는 현상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면 최고의 체험이요, 방언이나마 터지면 횡재한 것이요, 그도저도 아니면 눈물 콧물이라도 쏟아 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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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됐든 종교적 카타르시스가 만족된다면 만사형통입니다. 오직 황홀감의 경중에 따라 만족감이 좌우됩니다. 이게 성령의 능력인양 흐물흐물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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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경은 이런 것을 ‘성령 또는 능력’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대는 엉뚱한 오해에서 기인되는 허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표피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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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허무한 일이 발생되는 원인은 복합적일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해서 일 수 있고 감성적인 성도들이 스스로 원해서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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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해석 능력을 구비하지 못한 일부 목사들이 자의적으로 오도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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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누구나 다 암송하는 구절입니다. 설교 본문이 되기도 하고 보강을 위해 인용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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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뜻인지 모르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능력’을 바르게 설명하는 설교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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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주시는”(엔뒤나모오)는 전치사 ‘엔’(안에)과 동사 ‘뒤나모오’(강하게 하다. 힘을 얻다)의 합성어입니다. ‘뒤나모오’의 명사형이 ‘뒤나미스’(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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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려 깊지 못한 이들 중에는 ‘뒤나미스’를, 후세의 확장된 개념인 ‘다이나마이트’와 연결시켜, ‘무지막지한 폭발력을 지닌 물리적인 힘’으로 변질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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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뒤나미스’는 물리력을 포괄합니다. 마22:29절의 “하나님의 능력”(헤 뒤나미스 투 데우)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조의 원동력에는 일부 물리력이 포함됨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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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문은 물리력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력입니다. 모진 역경을 극복하고 어려운 형편에서 자족하며 이길 수 있는 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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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를 자연스럽게 읽으면 금방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2:5) 나(=바울)를 본받아서(3:17) 항상 기뻐하라(4:4)”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4:10-12절에서 ‘자족의 비결’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자족비결의 요체(핵심)’가 제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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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능력”은, 황홀경이나 물리력이 아니라, 자족능력(자족비결)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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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본문의 “능력”이 ‘자족’과 관련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압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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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인간 역사의 특징이었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세 가지 야망(돈, 명예,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 뒤에는 능력을 얻고자 하는 충동이 숨어 있다.… 능력! 그것은 술보다 더 취하게 만들고, 마약보다 더 중독성이 강하다.… 왜 우리는 능력을 받기 원하는가?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증거를 위한 능력(행1:8에서처럼)이나 거룩함을 위한 능력이나 겸손한 섬김을 위한 능력인가? 아니면 실상은 개인적인 야심을 감추는 가면이자 우리 자신의 자아를 높이고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주며 감명을 주거나 지배하거나 조종하려는 갈망인가?”(리더십의 진실. p.40-42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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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는 같은 책에서 ‘고든 피’ 목사의 말을 간접 인용하여 “능력을 요구하고 지혜를 주장하는 것은…지금도 타락한 세상의 기본적인 우상숭배이다.”(p.47)라고 재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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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습니다. 성경의 “능력”은 지금까지 우리가 막연히 알아왔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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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뜻 모르는 단어를 연발하거나,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어떤 현상들이 아닙니다(이러한 현상들의 일부를 ‘성령의 은사’라 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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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능력은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입니다. 안으로 갈무리하여 인내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의 열매”(갈5:22-23)라 하십니다. 아홉 가지 열매는 전부 ‘품성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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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본문의 능력은, 뭔가 외부적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자족할 줄 아는 능력’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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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촉발되는 헷갈림 현상이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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