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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21:18-22) 본문
[묵상]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21:18-22)
성경을 읽을 때, 【적용 범위】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행1:8절의 “땅 끝까지 이르러”라는 말씀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보통 “땅 끝”을, 마28:19-20절에 기록된 대위임령의 “모든 족속으로”와 연계시켜, ‘온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이라고 해석합니다. 범지구적인 전도사명이라고 해석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적용 범위】라는 표현에 유념해야 합니다. 행1:8절이나 마28:19-20절은 오직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비가시적 공동체)에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흔히들 생각하듯, 성도 개개인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구절들이 아닙니다.
아주 쉽게 증명됩니다. 위의 대위임령과 전도명령을 개인에게 적용시킨다면 실행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개인이 온 지구상의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에게 이를 방법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부흥사라 할지라도 몇몇 나라 소수의 대중에게 설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선교사도 한(一) 나라(그것도 한 지역)에서 한 민족에게만 봉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조금 범위를 넓혀, 지역교회를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최대의 지역교회라 하더라도 결코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적용 범위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종종 신앙의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곤 합니다. 즉, ‘나는(또는 우리 교회는) 여러 나라에 선교사로 나가서 여러 민족에게 증거 하지 못했으니 어찌할꼬!’라며 스스로를 비하하곤 합니다. 이런 자괴감을 교묘히 이용하여 소위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라는 캐치플레이스를 내세웁니다만, 이는 부정확한 이해입니다.
우주적 교회에 적용해야 할 구절을 특정한 지역교회나 더 심하게 개인에게 적용하면 신앙의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뿐입니다. 교회(특히 지도자들)가 크게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없이】‘세상의 모든 영혼 구원이나 아프리카 빈민 구제’를 위해 기도하며 부분적으로 동참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없는】것이 아닙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특정 개인이나 국제단체의 전적인 책임이 아닙니다. 당연히 성도 개인이 해결해야 할 임무/사명/소관이 아닙니다(할 수도 없습니다). 적절한 선에서 동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웃을 향한 전도와 구제 등은 일정 부분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해 두어야 합니다.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할 것입니다. ; 《내 능력 범위 안에서 나의 가장 가까운 주변을 섬기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래도 여유가 있다면 확장된 주변을 위해 협력하면 된다.》
지금까지 배워온 것과는 달리, 매우 매몰찬(인정머리 없는) 말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른 이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추운 겨울 길을 가다 벌벌 떨며 구걸하는 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제한됩니다.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씻기고 먹이고 재우며 남은 일생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아니면 10만원이나 100만원을 줄 수도 없습니다. 단지 동전 몇 개(큰마음 먹으면 천 원짜리) 던져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입니다.
이것이 현실이요 사실입니다. 걸인의 인생은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부모나 형제자매를 비롯한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지나가던 ‘나’의 책임도 아닙니다. 부모나 형제자매도 아닌 제3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다만 긍휼의 마음으로 약간의 동정(동전 몇 개)을 베푸는 것이며 이것이 충분한 수준입니다. 무모한 감상과 냉철한 현실을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어쩌면 보다 큰 믿음, 많은 것을 감당할 능력을 주장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해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성경은 결코 성도의 능력을 넘는 무리한 헌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주 작은 부분에서 작은 헌신을 요구할 뿐입니다!
< * 은과 금 없이 앉은뱅이를 고쳐준 베드로의 사역(행3:6)을 흉내 내려는 욕심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기적은 오늘을 사는 현대 성도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베드로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이 계실 때에만 이적과 기적이 가능하다는 진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열망과 하나님의 뜻을 섣불리 동일시하는 경향’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단순한 오해에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
이것이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도를 넘으면 곧 좌절하게 됩니다. 성경의 요구는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자발적 헌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걸인의 예로 본다면, 걸인들을 볼 때마다 동전이나 지폐를 넣어 주는 것으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영역이든 믿음의 영역이든, 일정 부분에 국한될 뿐입니다. 감당할 수준을 잘 식별해야 합니다.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라 다소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정말로 성경도 위의 견해를 지지할 것인가 궁금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만난 주님은 특별히 베드로에게 3번의 확인 절차를 거쳐 “내 양을 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베드로의 이후 삶을 예언해 주십니다. 의미는 ‘네 맘대로 못 산다. 내 뜻대로(주님의 마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순교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19절).
얼떨떨해진 베드로는 사도 요한의 미래도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습니다(21절).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바로 22절인데, 우리는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문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What is that to you?” 여기서 that는 바로 앞 문장의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요한을 죽지 않게 할지라도’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요한이야 죽지 않고 영원히 살든 말든, 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 너는 네 인생만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주제넘게 남의 삶에 관심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앙은 공동체를 매우 중시합니다. 천국도 공동체요 교회도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건전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앙은 또 한편으로 단독성(單獨性)도 요구하십니다. 우리 개개인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부모나 자식의 신앙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위대한 담임목사의 후광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자신의 믿음으로 설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남의 인생과 믿음에 이러쿵저러쿵 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선 내가 살고 나머지 여유가 있을 때 주위를 돌아보라는 것이 성경의 진정한 뜻입니다! 당연히 그 범위는 위에서 살핀 대로 주변의 아주 작은 소규모입니다. 결코 큰 범위가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기독교는 이 【적용 범위】를 잘못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온 세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특정교회가 한 도시를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한 개인이 수많은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너무 크게 잡았습니다. 무조건 크고 많으면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대교회, 세계 제2위 선교사 파송국, 세계적 목사, 누구나 알아주는 전도왕, 철저한 십일조 생활 등등에 대하여 ‘옳거니! 바로 이거야!’라며 흥분하곤 했습니다(정확히 말하면 이는 아주 고약한 허영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부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외형주의는 필연적으로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실입니다. 작은 것입니다. 성경도 우리의 삶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진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큰 자(의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 자(죄인)를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지자로서 큰 업적을 이룬 자들에게는 최악의 판결(나를 떠나라=축출)을 내리셨고(마7:21-23), 보통 사람으로서 보잘것없는 일을 한 자들에게는 최고의 포상(천국 상속=영생)을 하셨습니다(마25:34-36).
오늘날 한국교회 위기의 진짜 원인은, 큰 것을 향한 열망의 부재가 아니라, 작은 것에 대한 관심의 상실에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작은 것을 지향하는 진리’를 회복함으로써, 오늘의 위기도 극복 가능할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의식이 ‘큰 것 중심에서 작은 것 중심’으로 하루속히 되돌려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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