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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성모 마리아 숭배론자’ 성도와의 논쟁(9)
Ⅹ. HEK 자매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
HEK 자매님께.
P 목사님 덕분으로, 가상공간을 통한 만남이었으나 별로 유쾌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울적합니다.
먼저는 제가 H 자매님의 “효(孝)” 관련 글에 대하여 직설적 반론을 드린 바 있고, 금번 마리아 논쟁은 두 사람 간의 상당한 견해차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다 알 정도의 세월을 산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가끔 논쟁에 임할 정도로 철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사고의 차이는 결코 상호수용에 이르기 어렵다는 체험을 무수히 했습니다. 몇 번의 글 교환을 통해, 이미 자매님과 저의 견해차는 충분히 입증되었다 하겠습니다.
자매님을 설득하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지금도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자매님 글에 논리모순과 이해의 부족과 판단의 편향 등에 관한 지적들이 무척 많습니다. 대충만 세어 봐도 10여 가지가 넘는 것 같습니다(제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들 완벽한 지식의 소유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저는 답글을 쓸 때마다 자매님 글의 취약점을 지적하기보다 큰 흐름에서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까지 주고받은 저와 자매님의 글들은 이미 수정하기 어려운 고착된 신앙관념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쉽게 양보하고 포기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감을 잡았기에 제가 반론 포기를 선언한 것입니다.
자매님의 마지막 글에는 숙고해야 할 이야기까지 나와 있더군요. “역시 오늘 깨달은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솔직한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토론해 봐야 이제부터 나올 것은 순간적인 판단과 기지와 재치 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비록 짧은 몇 편의 글들이었으나 자매님과 제가 가진 신앙의 진면목들은 다 나타났다고 봅니다.
다만 자매님을 설득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매님 견해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 2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자매님이 주장하시는 ‘상식’의 위험성에 대한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러 번 질문하신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면 요한에게 모친 봉양을 부탁했겠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자매님의 대부분 주장들이 전승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저 또한 전승을 이용하여 답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십자가 처형 입회 측근들이 누구였는지는 비교적 쉽게 정리됩니다. 문자적으로 확인되는 측근들은 모친 마리아를 비롯한 수 명의 여인들과 사도 요한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로마병정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구경꾼들과 행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다른 측근들은 어디 있습니까? 장소는 알 수 없으나 이들(안드레를 비롯한 사도들과 주님의 동생들)이 십자가 주위 가까이 있지 않았다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됩니다(이것이 바로 자매님의 주장인 상식적인 판단이며 다른 말로는 ‘추론’이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전승입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 주변에는 사도 베드로도 머물렀다고 합니다(물론 가야바의 법정에 따라간 것을 가지고 당연히 십자가 처형 장소에도 베드로가 있었을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가능성은 반반일 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으로는 베드로의 입회 여부를 확증할만한 근거가 없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아닌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하셨는지에 관한 의문도 생기겠습니다만, 이는 최춘선 할아버지의 귀한 말씀으로 대신 하면 될 것입니다. “사명은 각자 각자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사명이 있고 요한은 요한의 사명이 있습니다. 요한의 사명에는 마리아의 봉양임무도 포함된 것이구요. 아주 쉬운 주문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동생들에게 하지 않았느냐에 대한 답은 여전히 안 나왔습니다. 자, 앞에서 동생들은 십자가 가까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가상칠언 발언순서를 검중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주님의 육성 가청거리는 결코 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실 때의 청중수를 최대 약 1만 여명으로 추정할 수는 있겠지요. 또 미국의 어느 목사님은 1.5마일(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상까지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의 전파거리는 수십 미터를 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생들을 불러 모친을 부탁할 수 없으십니다. 봉 대신 닭이라고 요한에게 부탁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증빙근거로 제시하기는 곤란하지만 어느 목사님께서 왜 요한에게 부탁하셨는지에 대하여 설교하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억에 의하면, 그 이유는 성질머리 못된 요한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님 사역에 쓰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요한 형제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지요(오죽하면 주님께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까지 지어 주셨을까요).
우리는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를 읽으면서 요한이 원래 사랑의 사람인 것처럼 오해합니다만, 처음의 요한은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요한은 오히려 기회주의자이고 욕심쟁이였습니다.
주님도 승천하시고 주변의 사도들과 지도자들은 하나 둘씩 순교하며 떠나가는 데, 자기는 늙은 마리아나 모시고 살아야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과정에서 요한은 비로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노년에 기록한 성경들은 어떤 사랑의 노래보다 더욱 진솔한 사랑의 글이 되었다는 것이 그 목사님의 요점이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자매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왜 동생들이 아닌 요한에게?’는, 당시 정황 상 주님께서 동생들에게 모친을 부탁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이 답입니다. 할 수 없는 상황인데 왜 안 하셨느냐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요한에게 부탁하셨으니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몇 가지 보충설명만 가지고도, 자매님의 의구심 해소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자매님의 마리아 사랑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마음속에 숨어드는 무서운 영적 속임을 아시는지요?
교리사는 자매님의 사랑의 심리현상이 이미 초대교회부터 있어 왔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정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자매님의 글에 표현된 그런 내용들입니다.
교리사는 이러한 경향을 ‘신비주의’라는 용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사랑은 자매님의 고유한 사상이 아닙니다. 이미 있었던 사상입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전3:15).
초대교회부터 계속된 이 왜곡되고 잘못된 마리아 사랑론은 지금도 천주교를 통해 그대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리아 사랑은 자매님의 기대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저절로 우상화의 길로 가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2천년 교회사를 통해 절실히 깨닫고 있지 않나요?
마지막 글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매님의 性 개념입니다. 성은 결코 추한 분야가 아닙니다. 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분야입니다!
제가 현대의 왜곡된 성문화를 두둔하느냐고요? 아닙니다. 현대의 성문화는 죄악상태입니다(물론 이 현상도 구약시대부터의 반복일 뿐이지요). 성에 관한 인간의 절대적 회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어찌하든 성의 오용은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성은 좋은 것이고 그렇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신약에서는 기도의 기회를 얻기 위해, 한시적으로 성생활 금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특수명령을 가지고 성생활 전반에까지 확대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입니다.
한편, 자매님의 거룩한(?) 성개념도 처음 있는 견해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견해 또한 초대교회부터 있어 왔던 생각입니다(구약의 이스라엘부터 유전된 인간의 오해의 하나입니다).
이원론에 대해 들어보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것이지요.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는 생각이지요. 그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이원론이 이단이라는 점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코 논리의 부족 때문도 아니요 사상의 괴상함 때문도 아닙니다(어찌보면 참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 이원론입니다). 유일한 이유는 성경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현재 입고 있는 육신은 썩어 없어질 것이기는 하지만 속됨의 전형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비록 주님을 출산하셨다 하더라도, 그 이후 요셉과 성생할 하는 것이 어찌 속되고 추한 행위가 될 수 있을까요? 어찌 이를 지성소에 비유하며 시비 걸 소재가 될까요? 자매님은 거룩하고 저는 추악하기 때문일까요?
마리아 숭배사상의 근본 오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이는 자매님의 편향된 마리아 사랑 견해와 맥이 통한다고 생각됩니다).
구속사에 있어서의 마리아의 임무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위상은 유일하면서 위대한 면을 지닙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또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사역을 감당하셨지요.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신비주의와 경건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다보니 급기야 ‘하늘의 여왕’으로까지 발전해 버린 것이지요(당연히 그 출발점은 평생처녀설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천국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위상은 어떻게 됩니까? 여전히 예수님의 어머니인가요? 예수님의 보좌가 하나님 우편이니 마리아의 보좌는 하나님 좌편인가요?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새로운 관계가 정립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창세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이시지 마리아의 태에서 처음 탄생하신 분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육신의 예수의 모친은 될 수 있어도 영적(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모친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얻어 와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여러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념으로는 “이삭의 조부 하나님, 야곱의 증조부 하나님”이라 해야 맞는데 성경은 촌수개념도 모르는 사람이 기록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1200대 조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왜 그냥 2촌 호칭인 “아버지”로 부릅니까?
바로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현재밖에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2천년 전이든 21세기든 모두가 현재입니다. 이 개념은 지금의 우리가 잘 이해 수 없는 천국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냥 믿어야 할 그런 개념 중의 하나입니다.
왜 다 아는 기본인 설명을 하느냐구요? 예수님과 마리아의 존재 선후를 말씀드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입니까? 불행하게도 천주교가 믿는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선재의 존재’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의 천국에서까지 예수님의 모친으로 남으려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지요.
마리아의 정확한 임무와 위상에 관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한정되어야 합니다.
육신에 거하는 동안 예수님의 모친으로서의 역할로서 모든 것이 종료된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당연히 1인의 피조물로서의 원위치로 돌아가야 하지요.
그렇다면 마리아의 실제적 사역(주님 탄생 도구)의 가치는 어떤가요? 무척 큽니다. 그 누구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리아의 복입니다(눅1:28, 42).
이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의 임무는 없습니다. 결코 천국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복은 인류역사상 수 억 명의 여인 중에서 유일하게 ‘마리아’만 받은 복입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도 남는 복입니다.
더 이상은 욕심입니다. 이 욕심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바로 천주교의 성모론인 것이구요.
그렇다면, 주님은 출생한 이후에 가지는 요셉과의 성생활은, 마리아 자신의 임무를 수행치 않은 것이라거나 추하고 더러운 죄악을 저지르는 행위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답고 귀한 성생활을 제대로 영위한 장한 일이 됩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자매님의 마지막 글에서 관련되는 문장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자매님은 구약의 지성소를 마리아의 자궁과 연계시켜 말씀하시는데(마리아의 태가 지성소보다 더 거룩한 곳이라 하셨군요) 참으로 대단한 도약입니다.
자매님, 끝도 없으니 그만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자매님 홈에 두 번 들러 서너 편의 글을 읽은 바가 있습니다. 자매님의 관점이 매우 독특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더 이상 읽지는 않았습니다. 각자 각자의 개성이겠지요.
어느 것이 옳은지는 판정할 수 없습니다.
자매님과 저의 마리아 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저와 자매님의 행동은 동일합니다. 자매님은 그냥 자매님의 생각을 고수할 것이고 저는 그냥 저의 생각을 고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논쟁을 그만두는 이유입니다.
이제 이러한 정황이 확인되었으니 상호간의 설득 노력은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자매님이나 저나 설득하겠다는 생각으로 의견은 나눈 것은 아니었는데 과정이 그렇게 진행된 듯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제 글을 게시판에서 삭제하려 합니다. 우리 둘의 논쟁은 정답도 없고(종교개혁 이후부터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간 판이한 견해로써 마음을 괴롭게 해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믿으시는 대로 참 신앙의 길 가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살롬.
- 끝 (大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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