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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성경은 용서만능론을 가르치는가?

맑은바람청풍 2016. 8. 22. 10:45


[단상] 성경은 용서만능론을 가르치는가?

 

 

18:21-22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할 사항 중에는 부분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있습니다. 성경 해석은 성경 전체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부분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용서에 관한 교훈을 도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특정 구절만으로 성경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지지하는 것처럼 호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주 잘못된 현상입니다.

 

성도들이 용서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인용되는 구절이 본문입니다. 그리곤 전혀 엉뚱하게 해석되는 구절로 둔갑되어 버립니다. 목사들은 대부분 이렇게 설명하곤 합니다.

 

<베드로의 일곱 번 용서할까요?’라는 질문은 이 정도면 충분한 횟수일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없는 기준이었다. 예수님은 490번 즉 무한 용서를 강조하셨다. 성도는 내게 잘못한 사람을 한없이 용서해야 한다.>

 

본문 구절에 한정하여 문자적으로 본다면 딱히 잘못을 지적하기 어려운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오히려 가능성이 높은 해석으로 수용되어야 할듯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궁극적으로 무슨 일이든 상관하지 말고 모든 잘못까지 눈감아 줘야 하는, 즉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오직 용서만 해줘야 하는, 선택불가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 지적해서도 안 되고 야단 쳐서도 안 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을 나무랄 근거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부분 해석의 전형적인 폐해입니다.

 

본문의 뜻은 전혀 이렇지 않습니다. 사실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은 의외로 쉽습니다. 왜냐하면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몇 절 앞에 있는 말씀을 읽기만 하면 금방 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5-17절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성도의 정당한 용서법입니다! 간략히 살펴봅니다.

 

용서의 첫 단계는 단 둘이서 잘못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참가자는 나와 나에게 잘못한 형제입니다. 한글개역은 권고하라.”고 번역하였지만 영어성경은 “show him his fault”(NIV)라고 번역했습니다. ‘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격려 뿐 아니라 책망의 의미까지 가미된 말입니다. 결국 이 단계에서의 용서의 조건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고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용서의 진의입니다.

 

용서의 두 번째 단계는 첫 단계가 실패할 경우 두세 증인 앞에서 첫 단계를 재연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동일합니다. , '잘못한 형제의 과실(fault)을 인식시키고 자백을 이끌어내어 고치는 것'입니다.

 

용서의 세 번째 단계는 교회 앞에서 행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여기서 잘못을 범한 형제가 뉘우쳐 고치면 용서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단계에서도 자백(=회개)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용납하지 말고 상종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그 사람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문이 가르치고 계시는 성도의 용서법은 잘못한 형제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자백(회개)하고 다시는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확보한 다음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잘못한 형제의 자백(회개)과 다짐이 없으면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껏 들어왔던 일반적인 가르침(목사들의 설교)과 정반대되는 교훈입니다. 용서는 아무렇게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용서받을만한 자에게 하는 것이 성경적 용서입니다!

 

구약에 비추어도 이는 쉽게 증명됩니다. 구약의 5대 제사 중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의 용서와 밀접히 연관되는 제사들입니다. 당연히 제물을 가지고 제사드리게 되지만, 실제적 요건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시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맨 먼저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간의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한 자의 시인(=자백=회개)이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현실에서의 적용입니다. 어느 목사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헌금 유용이든 성적 범죄이든, 아무튼 잘못이 있습니다. 목사는 공인입니다.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시인(자백=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교회의 성도들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의 경우에는 유념해야 할 사항이 더 있습니다. 그가 지도자라는 사실에 따르는 불가피한 요건입니다. 그는 즉각 목사직에서 사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신도 신분으로 평생 주님과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의 과오에 대한 올바른 용서법입니다(장로나 안수집사 등 평신도 지도자들도 유사한 방법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만약, 목사가 말로 시인한 것을 성경적 용서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킨 것으로 착각하여, 목사직 수행을 묵인한다면, 이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 용서의 뜻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도자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또 만약 잘못을 범했다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로만 얼버무리고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이는 옳지 않습니다.

 

혹자는 아픈 마음으로 고통스럽게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용서의 본질이라고 부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편협한 이해입니다(不知其二). 지루한 논증 대신, 간단한 비교로 설명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정치인은 어느 시대든 대중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직업의 상위권에 속합니다. 그들의 언행을 보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최고 관심사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이지 도덕이나 윤리나 양심 등이 아닙니다.

 

이처럼 자신의 이해득실에 민감한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얼마 전, 모 국회의원의 성추행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소속당은 재빨리 제명조치 했고 당사자는 아무 변명도 못하고 침묵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도덕과 윤리와 양심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단지 표를 의식한 이해득실의 판단에 따른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알았던 한 가지 사실은 이 일은 그대로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현실감이었습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냥 넘어갈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정치인들보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우울합니다. 만약 목사가 성관련 의심을 받게 되면, 상당수의 성도들이 용서를 먼저 언급합니다. 성경의 이런 저런 구절들을 인용하며 마치 용서와 사랑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아주 강하게 주장하곤 합니다.

 

일일이 집어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리에도 맞지 않고 성경도 잘못 이해한 편협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한 용서론은 정치인들의 판단력에도 훨씬 못 미치는 미흡한 사고능력이라는 점만큼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치인들도 감히 억지 부리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눈입니다. 사람 눈이 무서워서라도 성관련 피의자는 섣불리 감싸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용감무쌍하게 성관련 범죄혐의 목사들을 지극정성 보호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듯이…… 성경에는 오직 용서만 있다는 듯이……

 

일부 성도들의 용서만능론은 성경이해의 미비와 함께 인간심리의 가변성을 간과한 결과입니다. 이 용서론은 지나치게 관념화된 것입니다.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관념적으로는(머릿속 생각으로는) 무한용서가 가능하리라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용서만능론(무한용서론)이 얼마나 가식적인가를 증명하는 데는 단 1분이면 족합니다. 입술 터지고 이빨 빠지도록 뺨 세 대만 때리면 관념적 용서의 허구성은 즉각 확인됩니다. 용서를 너무 쉽게(값싸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대뽀 용서만능론으로 성경의 참 의미를 훼손시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