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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나는 왜 십일조의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는가? 본문
[단상] 나는 왜 십일조의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는가?
성도들의 행동강령 중에서 십일조만큼 미묘한 것도 없는 듯합니다.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견해와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반드시 할 필요까지는 없고 단지 마음 내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견해가 팽팽히 대립되는 것 같습니다(단순 비율로만 보면 십일조옹호론이 압도적 우위를 점합니다만 폐기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신학과 교리를 포함한 각종 견해들은, 참고서적들도 많고, 또 웬만한 웹사이트에도 많이 토의되고 있으므로, 관심만 가지면 얼마든지 참고할 수 있습니다.
몇 번 십일조 논쟁에 참여해 봤지만, 단 한번도 합의에 이른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하다가 처음 상태 그대로(각자 생각하는 대로) 끝마치곤 했습니다. 서로 간 약간의 상처를 안고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따라서 말3:10; 마23:23; 히7:8; 고후8-9장 등, 대표적인 십일조 관련 구절의 문자적 의미 해석은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바처럼, 관심만 있으면 얼마든지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원하신다면, 인터넷의 수많은 자료 중에서 일독해 볼 가치가 있는 글, 수십 편 정도는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십일조에 관한 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정신)를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다만 그것이 율법적 사고에 사로잡힌다거나 공로주의/보상주의에 물든다면 곤란하다. 십일조는 자율적으로 시행하되 이행/불이행 자체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해서도 안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해에 도달하였는지에 대해 설명(변명)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십일조가 율법조항이므로 폐지되었다는 주장(십일조 폐기론)의 미비점입니다.
○ 구약의 십일조는 명백한 율법조항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마침”(롬10:4)이라는 구절에 꿰어 맞춘다면 폐기론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때 폐기의 개념은 ‘싹 쓸어 없애는 것’의 의미로 설명되곤 합니다. 필요성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율법의 폐기는 소멸의 개념이 아니라 계승/발전/완성의 개념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강화의 개념입니다.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입니다.
○ 마태복음 5장을 보면 팔복에 이어, 율법과 사랑을 대비한 주님의 선포가 나오는데(마5:17-48), 살인/간음/맹세/동해복수법/사랑 등이 소재로 등장합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주님의 새 명령으로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앞의 율법이 쉬울 것인지 아니면 뒤의 사랑이 쉬울 것인지에 유념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읽어보면, 대충 읽어도 사랑이 율법보다 갑절 이상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구약의 모든 의를 충족시키셨다고 해서, 성도들의 임무가 가벼워진 것은 아닙니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오히려 더 어려워졌습니다.
○ 여기에 십일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입해 볼 수는 있습니다. 본문의 뉘앙스로 볼 때, ‘십일조는 충족되었으니 이제부터 할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도출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구약의 십일조보다 더 많은 십일조를 해라.’는 의미가 강해 보입니다.
○ 따라서 비록 신약성경에 “십일조를 하라.”는 명시적 명령은 기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 구절에 비추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 정신은 살아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마23:23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 당연히 위 구절에서도 이러한 이해를 확인받을 수 있는데, 18-19절입니다. “지극히 작은 계명”에 십일조를 포함시킨다 해서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마친다면 십일조 폐기론의 패배가 확정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항상 한 부분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좀 더 살펴야 합니다.
‘십일조를 행한다.’는 행위 자체는 아무런 공로도 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 해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수 있고 십일조 안 해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눅18:9-14절입니다.
○ 너무나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입니다. 세리는 열납받고 바리새인은 거부된 결론은 다 아십니다. 오늘은 결론을 따져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행위 자체의 타당성을 분석해 보자는 것입니다.
○ 주님께 거부된 바리새인이 행위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을까요? 놀랍게도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참으로 모범적인 모습뿐입니다. 그는 드러나게 토색/불의/간음/징세 등의 잘못들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2회 금식과 십일조를 행했습니다. 자,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다는 곳에 밑줄 쫙~ 치셔야 합니다.
○ 주님께 열납된 세리는 정말 잘했을까요? 간음은 몰라도 토색/불의/징세의 과오를 비켜갈 도리는 없습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자기 몫을 더해야 했으니 토색이요, 이는 정해진 세율을 넘는 것이니 불의이며, 동족의 형편을 외면했으니 역시 불의입니다. 금식을 했을는지 몰라도, 십일조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들은, 유대사회 전반의 분위기상, 세리와 창기의 헌금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리는 십일조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다른 행위들은 차치해 두고, 십일조만 가지고 정리하지요. 외견상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한 바리새인은 거부되고, 한번도 십일조 드리지 않은 세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유는요? 13절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단 한마디의 고백(인간의 정체성) 때문이었습니다. ‘십일조 했다. 안 했다.’는 행위 자체는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분과의 논쟁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구원이다.’라고 하면서, 십일조는 어찌 보면 비본질에 속하는 지엽적인 것일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물론 엄청난 반박을 겪었습니다.
○ 여기서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논의를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이러한 이해에 이르게 된 근거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눅23:39-43절에 나오는 구원얻은 강도에 관한 것입니다. 이 강도는 실존인물입니다. 우리가 후일 천국에서 분명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 자, 이 강도가 십일조 한 번이라도 했을까요? 십일조는커녕 그 어떤 선행이든 한 가지도 이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클 것입니다.
○ 본문에 강도의 직접적인 죄 고백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도가 낙원을 허락받은 유일한 근거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뿐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결국 인간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근거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 공로일 뿐, 인간의 행위적 공적이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아무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17 등)이라 말씀하셔도, 이 말씀이 구원의 근거에 인간행위가 포함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 인간행위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십일조도 포함됩니다. 십일조 이행여부는 구원 자체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위의 세리와 강도의 경우에서 살펴본 그대로입니다.
‘이제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십일조를 하란 말이냐 말라는 말이냐?’
답변 드리겠습니다.
○ 일차적인 답변은 “마음이 원하시면 십일조 생활하십시오.”입니다. 십일조 생활 쉽지 않습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이 생활하시는 성도님들의 신앙은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드립니다. 거의 십이조에 육박하는 헌금생활을 하는 분들도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정말 칭찬받을 만한 모습입니다. 진정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공로로 인정받을 도리도 없습니다! 그냥 원해서, 믿음으로 하는 것일 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십일조 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 생활 자체가 신앙심의 정도를 결정하는 유일한 증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차적인 답변은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입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여 억지로 해서는 곤란합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핵심은 ‘억지로 한 헌금’에 대한 경계였습니다. 이 부부의 헌금액수는 상당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까운 마음으로 얼마를 감추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원인은 ‘헌금을 했으나 액수가 적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거리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 부부가 밭을 팔아 헌금하지 않았다면 이런 징계를 받았을까요? 헌금 안 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아무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요점은, ‘헌금시 자원하는 심정의 중요성’입니다. 구약도 그렇지만 특히 신약에서 헌금(십일조 포함)의 필수요건은 ‘자원’입니다. 이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과 눈치에 따라 행하는 십일조는 오히려 정당치 못합니다.
○ 이차적 답변은 조금 배경설명을 곁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마5장으로 돌아갑니다. 39-41절에 보면 “오른편 뺨/왼편 뺨, 속옷/겉옷, 오리/십리” 등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자신있게 행할 수 있을까요? 오리/십리의 비유만 살피겠습니다(이 비유는 주님 당시 로마 정부가 유대인에게 부과했던 노역의무와 관계된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인 중에서 지나가던 생판 모르는 사람이 “너, 오리 따라와.”했다고 십리까지 아무 말 않고 따라갈 분이 계실까요? 전혀 없습니다! 자, 심각한 것은 이것입니다. ‘십리’는 문자로 기록된 주님의 직접 명령인데도 이행 못합니다. 이런 저런 해석을 들이대며 안 합니다. 그런데 문자로 기록되지도 않은 ‘신약의 십일조’는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입니다. 역시 이런 저런 해석을 들이대며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딘지 논리가 맞지 않아 보이지 않습니까?
위의 이차 답변에 근거하여, ‘배수진 믿음’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죄를 짓든, 무슨 행위(십일조 포함)를 이행하지 못했든, 『주님 앞에 나오지 않는 죄만 범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기도 응답받은 세리와 구원얻은 강도를 통해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죄의 다소나 행위의 완수여부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 앞이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지니고 있기에, 십일조의 필요충분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얻은 자로서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이 옳지만, 구원의 요건이 될 정도의 핵심행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십일조 실행차원에서 본다면, 이제 십일조 문제는, 심리적 압박요인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과거의 인식(전통이라 맹신하고 있는 보수신학의 견고한 틀)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성도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바른 해석일 것입니다.
십일조 -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신학이론들을 총동원하여 어렵게 살펴볼 필요도 없이, 그냥 단순히 큰 틀에서 천주교와의 간략한 비교만으로도, 명백한 답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촉발된 요인 중의 하나는 면죄부로서 전형적인 ‘돈’ 문제였습니다. 이후 개혁의 대상이었던 천주교는 철저히 반성하여 십일조는커녕 과도한 헌금마저 포기했습니다. 소위 ‘교부금’(연회비 개념)이라 하여 아주 약간의 헌금을 낼 뿐입니다.
반면 개혁의 주체였던 개신교는, 천주교와 정 반대의 길을 걸어, 이제는 십일조가 ‘믿음의 증표’ 수준으로 변형되었고, 헌금의 종류만도 헤아릴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물론 단편적 성경 구절들을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 그럴듯한 논리를 주장합니다만, 이는 참으로 구차한(사악한)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액수와 무관하되 자원하는 헌금’이 곧 신약의 십일조임을 깨우치는 슬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작금의 십일조 옹호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십일조는 결코 성경적이지도 않고 따라서 이런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할 당위성이 전혀 없다는 진실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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