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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보아도 보이지 않는 눈 본문
[단상] 보아도 보이지 않는 눈
♣ 사6:9b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보기에는 멀쩡하나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을 청맹과니라 하는데, 당달봉사라는 속된 표현이 더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육체적 제한에 관한 비하의 의미가 가미된 용어라 가급적 사용치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권장할만한 단어도 아닌 당달봉사라는 말을 꺼낸 이유는, 육체적 부분이 아닌, 마음의 청맹(靑盲)을 짚어보고 싶어서입니다.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묘해서 한번 자기가 생각한 것 이외의 것은 누가 뭐래도 믿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합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을 말합니다.
이러한 심리현상을 ‘확정편향(確定偏向)’이라 한다 합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사건이 벌어지면 논리적 분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평소 갖고 있던 신념과 편견에 따라 쉽게 판단하여 버리는 경향”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외교정책 이론에서는 ‘선별적 인식’(selective percep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정책결정자는 스스로 믿고 싶은 정보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믿고 싶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확정편향의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의지의 화신’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못 말리는 옹고집에 불과한데 자신이나 측근들에게는 정의의 사도처럼 인식된다는 점입니다.
주변에서도 이러한 확정편향적 사례를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확고한 대북관(對北觀)을 지니고 있었던 몇몇 종교인들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과 북한 끌어안기 운동에 힘쓰던 천주교 J 신부가 있었습니다. 인품과 종교성에서 아주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1985년 이산가족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에서 누이동생을 만난 이후부터 1993년 운명할 때까지, 이전의 활동양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왜 침묵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는 듯합니다. 추측컨대 누이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북한은 자기가 추구했던 그런 사회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닐까 기대해 봅니다.
2010년 7월 20일(화) 동아일보 30면에 “‘김일성敎’와 어느 목사”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6월 12일 정부의 허가없이 방북하여 활동중인 H 목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핵심 내용은 H 목사의 무대포 친북 언행의 문제점을 꼬집으면서 이는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의 역사와 다른 양상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H 목사는 이런 기독교의 역사도 모른단 말인가.”라는 말로써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위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는 순수하고 인도주의적인 사고에서 출발했습니다. 두 사람의 처신의 옳고 그름에 대한 시시비비는 가릴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모두 자신의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신의 지속성의 차이는 꼭 짚어야 할 것입니다. J 신부는 ‘북한의 실상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습니다. H 목사는 ‘북한의 실태를 정확히 보고도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습니다. 의미심장한 차이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선입견에 따라 선호를 미리 표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잘 살펴서 확인하고 난 후에는 정확히 재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성인다운 처신입니다.
북한의 실상은 보면 곧바로 보입니다. 안 보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보이는 데도 안 보이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의도적입니다.
자의적 성향이 강한 이들일수록 말만큼은 번지르르합니다. 자신이야말로 최고의 인도주의자요 평화주의자며 참 기독교인이라고 확신합니다. 목소리 아주 큽니다.
하지만, 확정편향에 사로잡혀, 보고도 못 보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비정상입니다.
눈을 멀겋게 뜨고도 못 보는 당달봉사는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들으면 깨달아야 하고 보면 알아야 한다!” 오늘 본문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자랑과 수치도 구분할 줄 모른다면 이는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깊은 성찰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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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횡설수설/이진녕] ‘김일성敎’와 어느 목사
(출처:동아일보 2010. 7. 20(화) 30면 오피니언)
불법 방북한 HSR 목사가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북한 군인의 도움을 받아 망원경으로 남쪽을 살펴보는 사진이 어제 한 신문에 실렸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배포한 사진 속에서 H 목사의 표정은 자신이 평생 살아온 ‘남쪽 나라’를 구경하는 듯하다. 그가 눈을 똑바로 뜨고 살펴볼 곳은 기아에 굶주리는 주민이 널려 있는 북한이다. 북에서는 보여주는 것만 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상식의 눈으로 보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 H 목사는 6월 12일 정부 승인 없이 중국을 통해 방북했다. 그는 6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어 남한을 향해 “북한 체제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모독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서는 “이명박식 거짓말의 결정판”이라고 주장했다. 6월 23일에는 북측이 평양에서 마련한 환영 군중집회에 참석해 “이명박 정부가 한반도에 전쟁을 몰아오고 있다”고 강변했다. 김정일은 ‘국방위원장님’으로, 이명박 정부는 ‘역적패당’으로 지칭했다. 사용하는 용어나 표현을 보면 김정일 집단 내부 사람의 말과 똑같다.
▷ 그는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옹호 등 북한의 대남노선을 충실히 대변해왔다. 김일성이 남침한 6·25전쟁을 ‘애국적 통일전쟁’이라 했고, 군을 앞세워 독재 세습체제를 강화하려는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한반도) 평화정치’로 옹호했다. 북이 내려 보낸 간첩과 빨치산을 ‘통일애국열사’라고 미화했다. 그가 간부로 몸담아온 전국연합, 통일연대, 진보연대는 항상 반미(反美) 투쟁의 선봉대 구실을 했다. 이들에게 반미는 곧 종북(從北) 숭북(崇北)의 다른 표현이다.
▷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원래 공존할 수 없다. 공산주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無神論)을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다. 북에도 교회와 절이 있지만 위장(僞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H 목사는 ‘김일성교(敎)’ 전파에 열심인 듯한 모습을 보이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광복과 6·25전쟁을 전후해 북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수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H 목사는 이런 기독교의 역사도 모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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