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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무익한 논쟁 경험(7) (논쟁 소감)

맑은바람청풍 2024. 8. 4. 08:41

[단상]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무익한 논쟁 경험(7) (논쟁 소감)

 

대학 총동창회 홈페이지에서 무신론을 펼치며 기독교 폄훼를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는 동문 선배와 무익한 설전을 벌였었다.


그런데 이후에도 끊임없이 무신론을 설파하기에 아래와 같은 절차로 일방 선포식 설득을 시도하였다.


1: [단상] 과학은 만능인가?(1~7)를 연속 게재했다. 그랬더니 댓글로 시비를 걸었으나 일체 반응하지 않았다.


2: [단상]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무익한 논쟁 경험(1~6)을 하루 만에 연속 게재하였다. “그간 얼마나 같잖은 주장이 펼쳐졌는가에 대해 숙고해 보라는 취지였다. 여전히 댓글로 도배하였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3: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큰소리친 2건에 대한 답변을 올렸다. 제발 이해에 이르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성경이 틀렸다.’는 주장만 반복한다. 반응하지 않았다.


- [단상] “우주의 나이” - ‘137억년인가? ‘6천 년인가?
- [단상] “진화론” - 그 화려한 화장술


4: 이글 [단상]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무익한 논쟁 경험(7)(논쟁 소감)게시를 끝으로 지루하고 허무한 말싸움을 마무리한다.

 

 

<< 최종 선언 글 >>

 

이글 저글 여러 글에 달렸던 허무맹랑한 댓글들을 살펴봤으나 “[일반칼럼] 인생 칠십을 살고 깨우친 인생무현우(人生無賢愚)’”에 달렸던 최악 댓글만 다시 살피기로 한다.

 

KYO : 고희를 맞이하여 지난 인생 생각하니 후회뿐이란 것은 분명 패배자의 변입니다. 그리고 인생무현우란 말 타당치 않은 그대 자신만의 독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 신영복이 마치 뛰어난 이념가인 것 같이 묘사한 것도 마음에 안 듭니다. 감사합니다.


CST : 이제는 아예 상종을 안 할 테니 그대도 그리 하기 바랍니다! 불감청에 고소원이 올시다...

 

지독한 난독증으로 독해력과 문해력을 구비하지 못한 상대를 설득하기는 지난하다.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그간 어의(語義, 각 단어의 뜻)나 대의(大義, 글 전체의 뜻)를 따지며 설득을 시도해 봤으나 여전히 우이독경일 뿐이었다.

 

따라서 어차피 불가능한 설복은 포기하고 오직 분명 패배자의 변이라는 한 마디만 주목해 보자.

 

도대체 본문을 읽고 어떻게 저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정말로 난독증인가? 진짜로 독해력과 문해력이 그토록 모자라는가? ‘진솔한 고백글패배 자술서쯤으로 왜곡시키 능력이 참으로 신묘하다.

 

그보다 훨씬 한심한 것은 타인의 인생을 멋대로 폄훼하는 몰인격과 오만방자함이다!

 

이것이 동문 후배의 일생(一生, 전 인생)을 평가하는 선배의 안목일 수 있는가? 무슨 자격과 능력과 권한으로 이러한 판결을 내리는가? 겨우 이 따위가 자칭 선배라고 하는 자의 인격이란 말인가?

 

아니다!! 지금껏 배워온 신사도, 선비정신, 지성인의 교양, 그 어느 기준에도 부합되지 않는 천하의 몽언(夢言)일 뿐이며 명백한 꼴값일 뿐이다!!!

 

예비역 준장이 볼 때 예비역 중령이 “(인생) 패배자라면, 예비역 중장이 볼 때 예비역 준장도 ‘(인생) 실패자가 아닌가? 두 계급 차이의 동일한 논거이므로 동의하려는가?

 

사춘기적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 논리에 사로잡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자는, 신사도 아니고 선비도 아니며 지성인도 아니다.

 

글마다 말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멘트를 붙인다고 해서 신사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패배자라는 말로 상대를 능멸하는 자는 결코 신사일 수가 없다. 최악의 야만적이고 노망적인 언어폭력이자 인격 파탄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 으뜸 벽창우를 향한 우이독경은 면장(面墻)의 대상이 아님을 재확인 받았기에, 절제되지 않는 육두문자는 혼잣말로 소화시키며, 이전의 선언을 다시 공포한다!

 

아예 상종을 하지 않겠다!!!”

 

 

※※ 참고자료 : 시리즈 글에 달렸던 추가 댓글들 ※※

 

* 원본 파일에만 정리하고, 이곳에서는 생략함.

* 이유 : 워낙 분량이 많아서(25, 무려 52쪽 분량임).

* 끝없이 반복 되풀이 되는 중언부언들임.

 

 

■■■ 소감 ■■■

 

여전하다. 했던 소리 또 하고 그리고 다시 또 한다. 주어들은 무신론자들의 견해 몇 가지를 밑자락에 깔고 거기에 자기의 엉뚱한 소견을 얼기설기 엮어서 세상 위대한 지혜인양 우쭐한다. 자기 혼자만 아는 듯 자긍하지만 이는 자기 소견에 갇힌 우매함(管見)일 뿐이다. 온 세상이 ‘1+1=2’의 단순 논리로만 구성된 것으로 착각한다. 세상과 종교는 그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 눈을 크게 떠야 하지만 크게 뜬다고 다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 무지막지한 주장을 정리하며 느낀 점이다.

 

무신론자의 본질이 글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하다.

 

사고의 틀이 진화론적 무신론에 완전 고착되어 있다. 출발부터 허구에서 자유롭지 못한 진화론(다윈의 7대 가설)과 무신론 학자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수용하되 성경에 대해서는 최악의 부정적 견해를 견지한다. 진화론과 무신론과 성경에 대한 인식 모두가 독단적이다. 독단은 통찰을 무디게 한다.

 

이제 이러한 독단적 사고와 생각들을 머릿속에 넣고 믹서를 돌리듯 마구 돌려서 출력을 뽑아내었다. 나온 결과물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삼척동자도 안다. “심은 대로 거둔다.”, “콩 심은데 콩난다(種豆得豆)”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따라서 정답은 무신론하나뿐이다!

 

풀어놓은 자신의 무신론 썰이 자못 그럴 듯해 보이고 자랑스럽게 여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그맨 박영진의 명대사 그건 니 생각이고~~”에 비춘다면 성급한 기대일 수 있다.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산뜻한 경구(警句)가 있다. 바로 기고”(GIGO ; Garbage In Garbage Out)이다. 무엇을 입력시키느냐에 따라 출력은 정해진다. 무신론을 집어넣으면 무신론 밖에 나올 것이 없다.

 

처음부터 논쟁 자제를 요청했었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쟁은 합의에 이를 수 없고 무익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누누이 설명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꾸역꾸역 진행시켜온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얼마나 무모한 우행인가? 열 받으며 말씨름하여 얻은 것이 무엇인가? Nothing! 아무 것도 없다!!

 

왜 이런가? 당연하지 않은가? 기독교인은 유신론을 의지하기 때문에 무신론을 거부한다. 오직 성경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신앙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입력물은 기독신앙이요 출력물 또한 기독정신이다. 입력이 신앙인데 어찌 무신론이 출력될 수 있겠는가? 초등학생 구구단보다 더 쉬운 논리 아닌가?

 

무신론자와 달리 성경의 가르침을 수용한다. 이런 논거이다.

 

첫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말씀에 따라 성경이 곧 진리임을 믿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유출되는 영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 <글쓴이와 180° 상이한 가치관이다.>

 

둘째,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14:1)라는 말씀에 따라 무신론자를 어리석은 자로 간주한다. 기독교인은 말씀 그대로 함부로 남의 인생을 패배자로 규정하는 망동을 행하지 않는다.

 

이처럼 상이한 무신론적 가치관유신론적 신앙관은 애초부터 대립 이외에는 얻을 게 없음을 알기에 처음부터 논쟁 사양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정말 답답하다.>

 

마냥 혼자말만 지껄인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특히 노년에 이르면 말하기보다 듣기에 치중하는 것이 지혜이다.

 

노년의 삶은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건강과 경제뿐만이 아니다. 사고의 폭 또한 여유로워야 한다. 여유를 가지고 유유자적하는 태도야말로 노년의 특권이 아닐까?

 

논쟁을 피하기 위해 무시전술’(요즘 젊은이들은 읽씹이라 한다)의 일환으로 침묵하니까 답변이 궁해 절절 매는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기고만장하는 것은 웃음을 자초할 수 있다. 스스로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는 것도 가련하게 비칠 수 있다.

 

장황히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랴?! 미리 언급했던 기고’(GIGO)와 성경 말씀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통상 Garbage쓰레기로 번역하지만 out과 연계할 때는 배설물로도 해석 가능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성경 말씀이다.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3:8).

 

성경과 현시대의 경구가 공히 쓰레기(배설물) 경계를 요구하고 있다!

 

총정리하고 마친다.

 

신앙은 각자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타인의 종교를 힐난하는 것은 지성인의 덕목이 아니요 교양인의 자세도 아니다.

 

누구든 우물 안 개구리의 좁은 안목(管見)을 고집함으로써 스스로 쓰레기’(GIGO, 배설물)가 되는 자학과 자해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선포의 말 : 송충이와 굼벵이는 변태의 과정을 거쳐야 나비가 되고 또 매미가 된다. 고통을 감내하며 이전 단계의 껍질을 벗을 때(脫殼)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사유도 마찬가지이다. 끝까지 무신론을 고집하면 그냥 송충이와 굼벵이의 세상에 머무를 뿐이다. 하지만 변태를 수용하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 즉 나비와 매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선택으로 실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