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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무익한 논쟁 경험(6)
앞서 5회에 걸쳐 살펴본 댓글 논쟁 이후에, ‘침묵’ 모드로 들어갔으나 상대는 여전히 자기주장 펴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이 저술한 어설픈 무신론적 이해에 따른 사변 같다. 글의 제목만으로 보건대, < 무신론자들, 예를 들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러셀, 프로이드, 도킨스 등과 같은 이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형식 >이 아닐까 짐작된다. 어쩌면 유신론자들(특히 기독교인들)을 향한 ‘시비지심’의 발로로 느껴지지만 이는 역으로 자신을 향한 지적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싶어 착잡하다. 오로지 ‘무신론적 관점’에만 매몰되어 ‘유신론적 관점’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편식현상’이며 ‘지성인이 절대 피해야 할 덕목’이라는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과오일 뿐이다.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고희를 훌쩍 넘어 졸수(卒壽, 90세)를 목전에 둔 노년에 이르러서까지 이런 기본적인 인식조차 도외시하고 전혀 불필요한 사안에 정렬을 쏟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거북살스럽다. 게다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무례는 도를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다는 분노까지 자제하기가 버거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설득으로도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우려로 인하여, 직접적인 토론은 포기하는 대신에, ‘홀로 마음 재정리’하는 독백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
Ⅰ. 종교란 무엇이며 어떻게 시작되는가?
【학문적, 철학적, 종교적 ‘종교’의 정의를 다루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참고서적들을 참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항목에서 이야기하는 ‘종교’는 스스로 깨우치고 견지하고 있는 ‘개인적 소신’에 관한 내용이다. 】
본시 나이를 먹으면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기대와 상충하는 경우도 있는 듯싶다. 못 말리는 옹고집을 강요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잠시 성장기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자.
첫째는 초등학교 시절 구구단을 외웠을 때의 감격이다. 어렵사리 암기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았을 때의 기분은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산수의 신동’이라도 된 듯이 우쭐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구구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수학’이라는 고차원의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둘째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인생과 우주에 대한 의심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온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숙고하였지만 그 허무함과 무지함에 주눅들곤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사회생활에 접어들자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실제적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고쳐먹었었다.
고백하건대 10대 후반과 20대 중반까지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여러 서적을 읽으려 애를 썼고 사색하기를 즐겼었다.
그 흔적이 사관학교 졸업앨범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당시 유행하던 후배들의 아부성 프로필이 싫어서 “無念無想 無我의 境地에 沒入할진저!”라는 자필 프로필을 써넣었었다.
이후 30대 초반에 일종의 ‘신유체험’을 통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지금까지 수십 년을 신앙으로 고수해 오고 있다.
지금도 수시로 성경을 읽으며 깨우침을 받고는 있으나 성경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성경 통독(通讀, 많이 읽기)에 주력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27회 통독에 머물고 있으며, 주로 정독(精讀, 깊이 읽기)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읽더라도 한글, 영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성경을 참조해 가며 꼼꼼히 읽는다.
그래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타종교(불교, 유교, 이슬람교, 천도교 등등)에 대한 지식은 입에 올릴 수준조차 되지 않는다. 타종교 경전을 읽어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나마 조금 친숙한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사상서 일부를 읽었을 뿐이고 불교경전은 단편적 문장 이외에 서너 권을 넘지 않는다.
이러한 수준으로는 ‘해당 종교’의 진의를 알 도리는 없다.
비단 종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학문이든 응용학문이든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천문학, 천체학, 우주학, 물리학, 생물학, 의학, 국제관계학, 정치학, 군사학, 문학, 철학, 종교학 등등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지식에 통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차제에, 어찌 감히 ‘우주의 끝’과 인간의 ‘삶과 죽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큰소리 탕탕 치겠는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의 겸손을 따라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고백을 흉내 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이러한 처지에서 ‘종교’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특징을 다시 천명할 수밖에 없다.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궁구한 다음, ‘아, 이게 맞다!’는 확신에 따라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이전에, 즉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미리 선택하여 신앙으로 수용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라는 고백을 반복한다.
이 고백이 우선한 다음에 평생 동안 ‘자신이 선택한 신앙을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종교의 진면목이다!!
Ⅱ. 종교 선택의 폭에 대한 이해
앞항에서 정의하였듯이 ‘종교 = 선택’이다! ‘알아 본 이후에 택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그러므로 불가불 유신론과 무신론과 불가지론이라는 3가지 외에는 인간이 택할 종교적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신론은 ‘무종교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신론도 ‘신이 없다’는 일종의 ‘신앙’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쨌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신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유보적 자세(불가지론)’를 택할 수밖에 없다. 누누이 말했듯이 ‘다 알아보고 결정하겠다’는 망상은 버리는 것이 좋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Ⅲ. ‘종교 선택’에 있어서의 방점(傍點)은?
종교는 당연히 ‘인간다운 삶’을 조명한다.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의 보람찬 삶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실제적인 궁극점은 ‘죽음’에 있다. 즉 사후세계에 관한 관심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 방점은 “사후세계의 실존 여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추론에 의해 “사후세계가 있다! 없다! 모른다!”의 3가지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사후세계의 실존여부를 어떻게 단정할 것인가? 답은 뻔하다. “아무도 모른다!”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다. ‘3가지 중 하나의 선택’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어느 것을 택하든지 확답 내릴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또 다시 인식해야만 한다. 정말 아무도 모른다.
어찌하려는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와서 “모른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다. 사후세계의 존재여부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단정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경험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전히 ‘선택’할 수밖에 없음이 진리이다.
이쯤에서 ‘죽음학 또는 사후세계 또는 근사체험’ 등의 제목으로 포털이나 유튜브를 검색해 보기를 권면한다. 종교인들은 당연하려니와 의사 등 학자들 중에서도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들은 오랜 동안 연구하고 관찰한 결과에 따라 사후세계를 확신하고 있다. 물론 각론적 부분에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존재한다!’는 결론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들의 주장이 검증된 과학적 공리인가?’라는 측면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
불행스럽게도 이 또한 ‘검증완료’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나의 ‘가설’일 뿐이요 또 다른 ‘선택’일 뿐이다!
Ⅳ. 그러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순환논리’를 대체 어찌하란 말이냐?
여전히 정답은 하나다! ‘선택’일 뿐이다! 다 알아보고 난 이후에 택할 도리는 없다.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로지 ‘선택한 이후에 알아가는 것’이 종교이다!!
당연히 현 시점에서도 자신의 종교에 대해 100%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를 부인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랜 세월을 살아 노년층에 이른 사람이라면 이 사항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인지한 자기 종교의 비의(秘儀)를 타인에게 명쾌히 설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부족한 면에 주눅 들지 않고, 남은 자기의 신앙 여정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정수유심 심수무성(靜水流深 深水無聲)’이라는 말이 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우리 격언과 맥이 통하는 말로서, 허세 부리지 말고, 시비 걸지 말고, 논쟁 승리에 연연하지 않는 대인(大人, 선비, 신사)을 지향하라는 권면의 말이다.
자신이 아는 아주 작은 지식, 알량한 지식이 전부인양 큰소리치지 말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침묵하는 지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슬기이기도 하다.
Ⅴ. 마무리
잘 알려진 ‘삼세지습지우팔십(三歲之習至于八十)’이라는 속담을 상기하며 마치자. ‘세살 버릇 팔십까지 간다.’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이것을 역시 부정적인 의미로 재구성해 보고 싶다. ‘지학지민지우팔십(志學之悶至于八十)’이라고 말이다. ‘지학’은 ‘15세’의 별칭이므로 ‘사춘기’를 암시한다고 보면 ‘사춘기 때의 번민을 팔십까지 붙들고 간다.’는 의미라 하겠다.
‘사춘기 고민’을 노령에 이르러서까지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에, 남은 여생의 경구로 삼아 유념하기로 다짐한다.
※ 추기 1 : 경박한 지식으로 타인의 인생을 “패배자”로 규정하는 편협한 인사에게 “세상을 꼭 그렇게만 보지 말라!”고 권면하고픈 글이다.
※ 추기 2 : 공개하지 않고 지금까지 비밀로 붙였던 사건 (수년 전의 통화 내용)
○ A : “(내가 지은 책을) 보내고 싶다. 정확한 주소를 알려 달라.”
○ B : “다 아는 내용으로서 관심 없다. 보내지 말라.”
○ A : “그래도 보낼 테니 읽어 보라.”
○ B : “만약 억지로 보내면 분리수거하는 수고만 더할 뿐이다. 절대 보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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