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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가나안 전성시대’를 살아야 하는 비극

맑은바람청풍 2023. 8. 13. 08:37

[단상] ‘가나안 전성시대를 살아야 하는 비극

 

 

성경에서의 가나안은 참 복잡 미묘한 용어이다.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면 멸절의 대상이 분명하나 실현된 역사적 결과로는 포용의 대상이겠기에 그러하다.

 

구약성경 이곳저곳을 보면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모든 족속들은 멸절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너무 타락하여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최종적이고 불가피한 하나님의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인지하고 이스라엘에 협조한 개인 라합(여호수아 2)과 생존을 위해 속임수까지 동원했던 히위 족속’(여호수아 9) 등은 불가불 포용해야만 했었다.

 

이처럼 애매한 태도는 완전멸절을 원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준행할 의욕의 상실로 변질되었고 결국은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는 공존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사사기 전체).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가나안의 위상은 멸절의 대상인가? 아니면 공존의 대상인가?’라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역사적 난제(難題)는 당연히 예수님에 의해 해결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사마리아인들까지 철저히 혐오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안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용하셨다. 차별없이 다 받아들이셨다. 신약성경 전체가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 더 이상 거론은 생략한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전제하고 오늘날의 가나안에 대해 재고해 보도록 하자.

 

오늘날 한국의 지역교회 내에서 가나안의 문제는 심각하다. 물론 오늘의 가나안은 성경에서의 지명도 아니요 종족명도 아니다. 전혀 새로운 성도의 한 부류이다.

 

작금의 가나안지역교회 출석은 하지 않지만 성경의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 성도를 지칭한다. 문자적으로는 (교회) 안나가를 거꾸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예전의 무교회주의자와 유사하면서도 일면 다른 의미라 할 것이다. , <<지역교회에는 소속되지 않으나 명백한 보편교회 소속의 성도>>를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권면할 수 없는 무리가 생겼는지는 모호하다.

 

그러나 근래 수십 년 간의 교회생활(신앙생활과는 다름) 경험에 따르면 충분히 이해되고 심지어 공감되기까지 한다.

 

얼마 전까지는 지도자들(특히 목회자들)의 자질로 인하여 신앙의 시험에 드는 이들이 많았었다. 돈의 주구(走狗)가 된 배금주의자들과 목에 깁스한 권위주의자들과 성()의 노예가 된 성중독자들의 독소 때문에 힘겨워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돈과 권위와 성에 찌든 목사들은 양반이었음을 절절이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성경의 기독교 신앙과 양립 불가한 특정 사상과 일체화된 기독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니라 이념 써클이라 해야 할 정도로 타락되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이제는 교회를 출석하는 것 자체가 신앙을 병들게 하는 첩경으로 화하고 말았다. 출석하면 할수록 신앙에 해가 될 뿐이다.

 

유일한 대책은 교회를 멀리하는 고육지책뿐이다. 목사들이 활개치는 썩은 교회와는 관계를 단절하고 홀로 또는 소규모 인원이 오직 성경만 추구하며 고독 신앙을 고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신앙인들이 곧 가나안 성도이다.

 

성경은 분명 성도들의 교제를 귀히 여기고 모이기에 힘쓰라.’고 권면하신다. 성경 전체를 흐르는 맥도 공동체임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회는 출석할수록 괴물 교인, 사탄 교인이 된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성경에 기반한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가나안 성도들의 근본적인 딜레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