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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단상

[단상](개혁30) 신학 공부 중인 형제와의 논쟁(4)

맑은바람청풍 2021. 2. 21. 08:46

[단상](개혁30) 신학 공부 중인 형제와의 논쟁(4)

 

이어지는 8건의 글은 NS교회에서 함께 고등부 교사생활을 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 중이던 어느 형제와 공동목회 분란에 대하여 논쟁을 폈던 내용입니다.

교회홈페이지 소리방에 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올리자 N형제가 격한 질책을 발했습니다.

소리방에서 2번을 더 논박하다가, 설득이 여의치 못할 것 같아서, 개인 이메일로 전환하여 계속하였습니다(‘소리방에 있던 논박은 스크랩해 두지 않았습니다).

초기에 N 형제는 담임목사편을 강력히 옹호하면서 개혁진영을 질타하는 논조였습니다. 글의 뉘앙스가 나는 신학을 공부 중인데 일반성도가 뭘 아느냐?’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나마 나중에 다소 유화적인 논조로 변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 오고 간 이메일을 통하여, 교회운영과 개혁 사이의 진통에 대한 작은 통찰 정도는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논쟁의 진행과정과 논조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고간 이메일 날짜순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보낸 메일(2)> (2002.07.07.)

 

 

NSSoo 형제님, 많은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시 한번 글을 씁니다. 첨부된 글의 기술 내용에 대한 보충설명 두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첨부된 글은 LeeSB 목사님을 직접 지칭하며 직설적으로 썼습니다. 형제님이 존경하는 L 목사님께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무척 귀에 거슬릴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불가피하기에 그리 했습니다. 사실 나는 지난 5월에 L 목사님께 드릴 목적으로 무려 8 쪽에 이르는 개인 편지를 작성해 놓았었습니다. 꼭 보내려 했지만 너무 신랄하여 차마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왜 L 목사님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지에 대한 12개의 질문들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보아야 실감나게 이해될 것이지만 별도로 보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둘째는, 교회 내 비판문제에 대해 전통적 개념과 달리 비판 옹호적 시각에서의 표현입니다. 이 문제는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좋은 참고서적이 있으니 이를 참고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100% 침묵만이 교회의 유일한 미덕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쳐야 할 때 외치지 않는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 <존 맥아더 목사/무모한 신앙과 영적 분별력/안보현 역/생명의 말씀사>

 

모쪼록 열심히 공부하시고, 또 지금 우리가 토론하는 진정한 목회자 상에 대해 깊이 묵상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자만심에 도취된 목회자(영적 교만이라 함)가 아니라 진정 주님의 마음에 합한 그런 목회자(자존심이 조금도 없는)를 목표 삼기를 권고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형제님을 아는 모든 지체들로부터 "NSSoo 목사님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참 권위를 지닌 훌륭한 목사님이다"라는 고백이 거리낌없이 나누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샬롬.

 

정말 답 글 주지 마세요. 형제님 공부에 방해도 될 것이고, 또 나도 힘듭니다. 참 목자가 먹여주는 영의 양식만 받아먹으며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실현 불가능한(?) 교회와 촌스런 믿음을 꿈꾸는 어리석은 자로서, 더 이상은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성경을 떠나자는 것도 아니요 왜곡시키자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의 NS교회 수준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참 본질을 찾자는 것뿐이지요. 역시 꿈이겠지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것입니다!!!

 

추신 2 : 여기까지 쓰고 나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다시 또 2건의 글이 올라왔더군요. 읽어본 후 '허허허' 하고 웃고 말았어요. 사실 이 위치에 따끔한 경계의 글을 썼었지만, 지우고 다시 씁니다. 참으로 할 말 많지만 다 그만 두렵니다. 부질없고 무익할 뿐, 이미 이야기한대로 말로써 설득되거나 공감에 도달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럽니다.

 

단지 2가지만 말하고 싶어요. 첫째, 바닷물을 됫박으로 재려는 자도 없고 상대성원리를 구구단으로 증명하려는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지성으로 규정하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무모함은 없습니다. 둘째, NS교회를 위한 충고를 하려는 뜻은 알겠지만, 충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헛다리만 긁는다면 충고자의 체면이 영 서지 않습니다.

 

NS교회의 문제는 형제님이 보듯 신앙관이나 교회관 등에서 오는 것 아닙니다(아세요? 우리 모두 L 목사님으로부터 교회관 배운 자들이지요). 일부 목회자의 잘못된 권위 남용에 따른 아픈 몸부림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그만 하렵니다. 정말 힘들고 지쳐요. 그냥 허허허 웃고 말랍니다. 허허허허허 . . . (추신 2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도 고쳐서 보내려다 그대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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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한 두 번째 편지] NSSoo 형제님

 

NSSoo 형제님

 

처음 우려와는 달리 서로의 이해가 많이 개선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견해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아 마음이 우울합니다. 먼저 금번 형제님과의 대화에서 느낀 몇 가지를 기술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나 느낀 소감을 감추고 싶지는 않군요.

 

하나, 엘리후의 날카로운 질책을 당했던 욥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 흔히들 이야기하는 견해차/관점차라는 것이 얼마나 조정하기 힘든 일인지를 절감했습니다. 진리가 아닌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양보한다는 것도 이처럼 힘드네요.

 

,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상황을 바로잡기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서해교전을 평가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같구요. 분명히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이 존재하고 또 핑계치 못할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론적인 주장으로 현실을 인정치 않으려는 모습이 가슴 아픕니다(누구의 판단이 옳은지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황이 그렇다는 의미이니 너무 확대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밝힐 것은 내가 상처받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하는 남산교회 내의 아픔들은 모두 다른 지체들의 상처입니다).

 

, 신앙의 초보도 이해 못하는 위인으로 치부되는 듯하여 씁쓸합니다. 지금 우리가 토론하는 것은 분명 딱딱한 음식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적 의미(기초) 해석차원을 넘어 지각을 사용해야 할 사안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개인적 욕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의 정확한 조명을 받기 위해 하는 일이라면 무슨 논제든 상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으로 다시 한번 나의 견해를 밝혀 봅니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소위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세월을 산 자로서, 나는 어떤 욕망을 위해 지금과 같은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촌스런 믿음을 사모한다 했는데, 그 뜻은 형제님도 알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요, 나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그것을 추구해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촌스런 믿음이란, 성경을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단순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믿음을 갈망하여 이 교회 저 교회 방황하는 지체들 의외로 많습니다.

 

형제님이나 KimGH 자매님의 글에서 우려하는 바와 같이 믿음의 근간인 순종의 의미와 중요성을 몰라서 이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상처받을 다른 지체들요? 안타깝지만 더 많이 곪아 전체가 상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소탐대실은 현명한 처신이 아닙니다. 현재의 아픔만 걱정하다 시기를 놓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에서 이러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측면에서 설명된다고 봅니다. 죄 또한 그렇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조화 아닙니까?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단절(분리)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죄의 동인은 욕망이며 그 현상이 곧 성경이 밝히는 대로 불순종과 교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불순종을 싫어하시는지 왜 모르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엄히 선포하심을 왜 모르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촌스런 믿음에는 진정한 순종도 포함됩니다. 아무렴요. 말씀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 믿습니다.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이게 잘 안되어서 걱정이지(미성숙된 믿음), 몰라서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을 몰라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꼭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문제를 제기하는 근본 이유는, 죄의 한 현상인 불순종은 평신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신앙의 원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순종을 오직 평신도의 덕목으로만 국한시키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목회자도 당연히 순종해야지요. 왜 목회자의 불순종적 자세를 문제삼으면 안 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순종의 자세를 보인다면 앞 전의 글과 같은 것들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평신도보다 더 진지한 순종의 본을 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목회자의 중요한 기능은 가르치는 것인데, 이 기능의 가장 큰 취약점은 입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점일 것입니다. 강대상에서 설교는 잘 하지만, 자기 자신(목회자)의 삶(행동)에는 적용치 않고 성도들에게만 강요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이 점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의 관점이었던 것입니다(23:2-7).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생각은 명확합니다. 바로 순종의 대상 측면입니다. 자꾸만 순종의 대상에 목회자를 끼워 넣으려는 것 같은데, 이는 잘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순종이란 하나님께 대한 절대순종을 의미하는 것이지 목회자에 대한 상대순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주로 목회자라는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므로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거의 정확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도 불완전합니다. 그들도 실수가 있습니다. 이때 이를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과 불순종과는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순종을 내세워 목회자가 하는 일은 모두 침묵하고 용납하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목회자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이를 지적해 주어야지요. 이것까지 무조건 감싸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판단이나 정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순 지적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 이러한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인지, 어떤 점에서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인지? 나단의 지적도 없이 다윗이 회개에 이르렀을 것인지를 묵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는데. . . 구약의 무수한 선지자들의 지적도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 . . 오해는 마세요. 내가 선지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권위에 관한 것입니다. 권위란, 사전적 의미를 떠나, 잘못 이해할 경우 곧바로 교만과 관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님도 잘 아는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가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목회자의 권위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해서이지, 결코 목회자 자신의 권위에 근거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호랑이(하나님)의 권위를 등에 업은 여우(목회자)가 그 사실을 잊고 자기 스스로의 권위(목회자 직분, 성경지식, 설교능력 등등)에 의해 다른 동물들(평신도)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가장 위험한 것은 다른 동물들이 아니라 바로 여우 자신입니다. 반대로 호랑이의 권위를 인식한 여우라면 진정한 두려움의 원천을 알기에 더욱 조심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가장 안전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목회자들께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경계인 것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목회자도 지렁이입니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 엄격한 성경의 선포를 목회자 자신에게는 적용치 않고 단지 평신도에게만 적용한다면 이처럼 공평치 못하고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인식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첩경이 아닙니까?

 

이 같은 인식을 가진 자를 성경은,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한 자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자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이 함께 하시지요. 그 결과가 바로 권위로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칭의와 마찬가지로, 바로 권위의 대위임이지요. 이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권위의 본질입니다. 인간 측면에서 볼 때, 구원과 마찬가지로 권위 또한 결코 자랑할 수 없겠지요?

 

내가 목회자들께 요구하는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필수사항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때, 우리는 이것을 교만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으며, 현재 한국교계의 여러 문제점들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NS교회의 문제도 여기서 기인되고 있구요.

 

당연한 질문이 생기지요? “그럼, 너는?”이라는 것 말입니다. , 지난번 글에서 말했던 영향력 범위의 차이입니다. 나의 부족함은 나 개인 차원에 국한되며 아주 넓게 생각해도 작은 범위입니다(물론 이것이 용납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다릅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목회자에게 더욱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아무나 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형제님, 잘 알지요? 내가 누구를 겨냥해서 이런 말들을 하는지 말입니다. , L 목사님입니다. 형제님은 내가 NS교회 모든 목회자를 비난하는 양 오해하는 것 같기에, 마음 아프지만 확실하게 실명을 밝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렵니다. 나는 처음부터 NS교회의 문제점을 L 목사님으로부터 찾았습니다. 그리고 문제해결의 열쇠 또한 L 목사님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분, 그 옛날 초심으로 돌아오기만 하신다면 지금의 남산교회 문제는 일순간에 해결된다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합니다. 그분의 잘못된 권위의식(솔직히 표현하면 목회자적인 욕심입니다. 이는 세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에 의한 여러 사건들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단지 한가지만 간략히 말하지요.

 

형제님도 잘 아는 부목사님(지금은 다른 곳에서 목회하고 계심)이 부지불식간에 이런 넋두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살았다!”. 정황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뭘까요? L 목사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부목사가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상태로 어떻게 담임목사를 보좌하여 목회사역에 동역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감정 지닌 분들이 평신도 중에도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L 목사님의 잘못된 권위의식에서 출발되는 오류인 것입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런 사실을 아무도 L 목사님께 말씀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L 목사님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이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지난번 편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제님은 왜 공동목회라는 희한한 제도가 출범하게 되었는지 아세요? 상세히 말할 수는 없고, 공동목회 출범 전, 내가 J 목사님께 권고 드렸던 요지만 간추려 이야기하지요. ‘공동목회는 힘든 일이다. 공동목회 성공의 필수요건은 욕심제거와 상호신뢰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후일 엄청난 아픔을 겪을 수 있다.’ 뭐 대충 이런 뜻이었습니다. 불과 1년이 지난 현재, 불행하게도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공동목회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는 단지 부러 잊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속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게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요. 그만하지요. 이런 이야기 어떻게 공개적으로 하겠습니까? 내가 왜 소리방에서 쉽게 물러섰는지 조금은 이해하겠지요?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지만(바울과 형제님을 조금 흉내 내 봤습니다), 나도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행하는 것을 옳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리방에 글 하나 올리는 것도 앞뒤를 재어보고 의지를 가지고 올립니다(최근에 올린 몇 편의 나의 글에서 변함 없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있음을 알겠지요? 지도자입니다. 이건 형제님을 겨냥해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L 목사님이 목표였습니다). 최근의 글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아무 미련 없이 삭제하였던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정리하지요. 내가 보는 NS교회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교회 내에 분명한 영적 오류가 있다. 이것이 분란으로 표출되고 있다. 근본 원인을 찾아내어야 하고 이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성경을 상고컨대, 교회 내에 잘못이 있을 때는 누군가 그 잘못을 비판해 주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렇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도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엄한 말까지 하시며 지적하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끊임없는 개혁이 필요하며 그 개혁은 비판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치유 과정의 아픔이 두려워 개혁을 포기한다면 이는 성도의 직무 유기이다. 침묵과 인내가 좋은 것이나, 말해야 할 때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요나의 실수(침묵 선택)를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다. 침묵의 미덕만을 강조했다면 오늘날의 개신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시적인 아픔에 주눅들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소망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형제님, 오해는 마세요. 감히 내가 선지자라는 것도 아니고 종교개혁자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외쳐야 할 시기라는 확신이 들기에 외치는 것일 뿐입니다.

 

형제님이 생각지 못했던 국면이 있다는 점만 이해하시고, 현재의 아픔이 사단의 역사라고 지레 짐작하지는 마세요. 역설적이지만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외쳐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려 할 때 찾아오기 쉽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청소를 하시면서 왜 심한 말로써 유대인들을 나무라셨고 또 바리새인들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씀들을 하셨는지, 그 뜻을 놓친다면 교회는 희망이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용인과 덮어둠과 침묵이 능사는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 볼 일일 것입니다.

 

아픔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연단의 특징이기도 하고 치유의 반증이기도 하니까요. 성령님께서 아픔을 통해 고쳐 주실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샬롬.

 

 

추신 : 현재 내 마음도 무척 아픕니다. 내가 꼭 교회를 책임진 자인 것처럼 날뛰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요. 얼마 전 목사님들께 드리려다 그만 둔 글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이 글은 세분 목사님들과 면담하고 난 며칠 후 썼던 것입니다.

 

그러네요. 교회가 산으로 가든 강으로 가든, 이는 성령님의 몫이고 또 목사님들이 책임지셔야 할 일인데, 한갓 평신도 주제에 무슨 책임자나 되는 양 날뛰었으니 너무너무 부끄럽습니다. 오직 침묵하며 맡은 일에 충성만 했어야 하는데 . . . . . 이를 조금만 일찍 깨달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처와 좌절은 맛보지 않았을 텐데. . . . . 하지만 분명한 漆室之憂였음을 시인하겠습니다. 깨달았으면 이제 남은 일은 회개와 자숙뿐 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는 것은 성도의 임무가 아니라 생각되어 편지는 발송치 않았었습니다. 목사님들께서 평신도의 이 아픔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셨으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