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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062-1] “목사”(포이멘)는 오역인가?(2)

맑은바람청풍 2019. 5. 5. 17:16

[의문 062-1] “목사”(포이멘)는 오역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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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목사라는 단어가 타당한가? 오역인가?에 대하여 타당오역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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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오역견해를 강하게 확신합니다만 타당견해도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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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논리적 측면에서 타당견해는 너무 궁색하며 거의 억지에 가깝다는 평을 피하기 어렵다 할 것입니다.(이전 글의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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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타당견해를 강력히 지지하는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현직 목회자인데, 전반적인 내용 자체가 비논리적이며, 특히 아래 인용부분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도저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 번 짚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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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pastors and teachers""and"라는 등위접속사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and"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목자(목동)라는 번역이 옳습니다. 그러나 "and"라는 접속사로 인하여 teacher라는 스승(선생)의 역할을 목자는 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목자 즉 목사(牧師)가 된 것입니다. 한자로 잘 표현을 한 것입니다. 한자의 목사(牧師)는 칠목()과 스승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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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인 헬라어를 볼까요. “포이메네스 카이 디다스콜로이목양하다와 가르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카이(kai)”라는 등위접속사는 영어의 "and"와 같습니다. 따라서 양을 잘 기르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사라고 번역한 것도 가능한 번역입니다. 잘못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잘한 번역이라고 저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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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글쓴이가 헬라어 포이메네스 카이 디다스콜로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포이메네스’(주격 복수)가 아니라 포이메나스’(목적격 복수)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착오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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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역본은 디다스콜로이가 아니라 디다스콜루스로 표기하기도 합니다만 정확한 어근은 디다스콜로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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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헬라어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콜루스와 영어 "pastors and teachers"+ 스승 = 牧師라는 한 단어로 번역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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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목자목사의 문제뿐 아니라 원어에 한 번 사용된 디다스콜루스를 한 번 더 추가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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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라는 단어에 이미 헬라어 디다스콜루스”(영어 teachers)가 번역되어 포함되었는데도, 한글성경에는 교사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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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번역하려면 원문인 헬라어에 디다스콜루스2번 존재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원어에는 디다스콜루스가 한번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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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글성경은 헬라어 및 영어 성경에 한번만 나오는 디다스콜루스(teachers)’2회 중복 번역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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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글쓴이는 말미에 자신이 첨부시킨 권위 있는 Walter Bauer 사전의 해석을 100% 신뢰하고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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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Walter Bauer 사전도 앞에서 지적된 논리적 하자를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 틀린 주장입니다. ‘하나인 단어(디다스콜루스)를 하나 더 슬쩍 추가하여 번역한 잘못을 모른 척하고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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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에 나오는 직책의 목록에서 포이멘은 목회자를 나타내는 듯하다. :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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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코롤이 즉 목사와 교사는 문법상 두 가지 직책이 아니라 한 직책이. 목회자인 교사, 그러면 목사라는 번역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는 당시에 공식칭호가 아니다. 왜냐하면 벧전5:1과 행20:17에서 지방의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들은 프레스뷔테로이(장로)라고 불리웠으며, 20:28에서는 에피스코포이(감독)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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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역할은 벧전5:2, 벧전5:4과 행20:28, 21:17(양떼들의 영적 행복에 대한 관심) 등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18:12-14과 마12:30(11:23,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님) 역시 관계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이 그들의 양떼에게 값진 모범이 됨을 보여야 한다(참조 : Walter Bauer ; J. h. Thayer ; E. Beyreuther ; J. Jerem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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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Walter Bauer 사전그러나 이 칭호는 당시에 공식칭호가 아니다.”라는 설명이 의미심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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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디모데전후서가 기록될 당시(그리고 다른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도), “목사라는 용어가 교회의 공식지도자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Walter Bauer’의 설명 그대로 당시 공식 지도자는 감독들과 장로들(모두 복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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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기 위하여 잠시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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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특정 구절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받고 있습니다. 뜻이 애매하거나 해석이 어려울 때는 성경 66권 전체를 조망(眺望)하면서 전체적 관점으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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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고려해야 할 구절이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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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한글개역 딤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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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감독’(? = 직분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도 교회를 총괄하는 감독이었을 것으로 해석됨 ; 私見)이었던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로서, 여기에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나오는데, 이는 앞에 나오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동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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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가 교회 대표인 디모데에게만 소위 오늘날 말하는 설교 독점권을 주었던 것이 아니라 디모데와 함께 복수리더십을 형성하고 있었던 장로들설교를 분담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순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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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설교’(성경적으로 말하면 계시또는 강론’)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수행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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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한글개역 고전14:30)는 말씀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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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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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영어성경이 성경의 다른 곳처럼 ‘pastors’가 아니라 ‘shepherds’로 제대로 번역했더라면, 종교개혁 당시 루터나 칼빈 등이 목사 제도를 확립하는, 무지한 오해를 범하지 않았을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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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냐 하면 엡4:11절의 목사는 오늘날 우리가 헷갈려 하고 있는 교회의 유일무이한 단독지도자가 아니라 교회 내에서 목양의 은사를 받은 여러 명의 지체인 목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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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당시 교회 지도자는 장로와 감독이었으며 목자는 집사처럼 협력하는 직분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물론 장로와 감독도 협력하는 직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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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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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단 한번 사용된 하팍스레고메나(Hapax legomena)도 아니고 단순한 오역에 지나지 않는 목사하나를 붙들고 성도들이 소비하는 심력(心力)이 너무 커서 무척 안타깝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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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분명히 목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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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경에 없는 목사에 연연하지 말고, 목사제도도 고치고 신학교제도도 바로잡아서, 성경에 부합되는 참 신앙 모습을 회복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확신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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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 아무리 살펴도 목사는 오역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목사를 원래 의미인 목자로 되돌리고 현재 실행되고 있는 목사제도와 신학교제도가 성경에 부합되도록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개혁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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