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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036] 레위인 최초 정착지 베들레헴? 산당이 회당의 효시? 본문
[의문 036] 레위인 최초 정착지 베들레헴? 산당이 회당의 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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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성도가 신학과 교리적 설명을 참조하고 싶을 때, 주석류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국내외 유명 주석은 몇 가지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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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확인하고픈 사항이 있어 사무엘 상서에 관한 ‘매튜 헨리 주석’을 참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짧은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거의 동의하기 어려운 설명 몇 군데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중 2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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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레위의 후손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은 베들레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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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매튜 헨리 주석의 원문(삼상1:1-8 개요)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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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은 레위의 후손들이 처음에 자리잡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중의 한 지파가, 엘가나가 살게 된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했다. 미가의 집에 찾아간 레위인은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갔다(삿17:8). 모름지기 목회자의 가정은 어떤 곳으로든지 이동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원래부터 에브라임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그들과 다윗과의 관련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베들레헴은 레위의 후손들이 처음에 자리잡은 곳이었다.”는 문장을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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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지파는 원래 기업분배에서 제외된 대신, 거주 장소 48개 성읍을 각 지파로부터 할당받았고(민35:7; 수21:41), 생활비는 십일조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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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21:4-40절에는 각 지파로부터 받은 성읍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베들레헴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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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베들레헴은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베들레헴은 레위의 후손들이 처음에 자리잡은 곳이었다.”라고 기술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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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석가는 왜 이렇게 주석했을까요? 아마도 삿17:7절 및 18:30절 해석에 있어서 약간의 혼선이 있었지 않을까 추정해 봅니다. ‘베들레헴에 거주하던 레위인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모세의 손자인 요나단이었다.’라는 식으로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매튜 헨리 주석의 흐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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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복 및 정착기에, 레위인들은 48개 성읍에서 살았습니다(이를 부인할 근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각 지파의 신앙생활이 해이해지고 십일조도 잘 거출되지 않는 등, 레위인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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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길을 찾아야 할 레위인들이 원래 거주지였던 48 성읍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황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48 성읍 이외의 장소에서 타 지파 사람들과 섞여 함께 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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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7-18장 사건은 이러한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며 해석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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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중의 한 지파가, 엘가나가 살게 된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했다.”는 문장을 살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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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문장은 앞의 ⓐ문장 검토시 이미 대충 밝혀졌다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문장은 ‘레위 지파 중의 한 지파가 최초 정착지였던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갔다.’는 의미인데, 이 주장의 논리성에 동의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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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베들레헴이 레위 지파의 거주지로 할당되거나 또는 일부 가정이 정착했다는 기록을 찾지 못합니다. 다만 앞에서 설명했듯, 세월이 흘러 레위인들의 생계가 막막해진 다음에, 일부 레위인들이 베들레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전혀 ‘한 지파’라고 단언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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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문장의 뉘앙스 또한 곤혹스럽습니다. 에브라임 산지는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에 속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레위인에게 세겜과 게셀과 깁사임과 벧 호론 등 4성읍을 할당해 주었습니다(수21:20-22).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던 레위인들은 기본적으로 이 4성읍 거주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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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7장의 레위인은 추가로 한 명이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을 뿐입니다. 한 지파가 이주한 것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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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산당(또는 선지자학교)이 회당의 효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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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매튜 헨리 주석의 원문(삼상10:5-6)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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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사무엘이 출생하던 때 모양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사무엘은 이러한 학교(선지자학교를 의미함) 또는 신앙의 집들을 세웠는데 ⓓ이것들이 회당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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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무엘은 이러한 학교(선지자학교를 의미함) 또는 신앙의 집들을 세웠는데”에 대해서는 별도 글인 「[변명] ‘정말 사무엘이 선지자학교 창건자인가?’」를 참조바랍니다(사무엘은 선지자학교를 창건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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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이 회당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문장을 살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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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전체를 개관적으로 읽어보면, 성전제사와 산당제사 간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산당제사가 무수히 시행되기는 했으나 언제나 부정적 이미지를 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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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왕의 대표적 치적이 곧 산당을 제한 것이며, 나쁜 왕의 대표적 악행이 곧 산당을 세운 것입니다. 산당은 결코 긍정적 이미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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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무엘이 선지자학교를 창건했을 것이라는 기대에 동의되지 않고, 사무엘이 창건한 선지자학교가 회당의 시작이었을 것이라는 추리에도 동의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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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공인되다시피 한 회당의 효시는 바벨론 유수기입니다. 성전도 파괴되어 버렸고 또 포로 신세이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족혼과 신앙 유지를 위해 끼리끼리 모여 회상과 말씀을 나누던 모임이 곧 회당의 효시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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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회당의 효시에 관한 명확한 논증은 불가하다 할지라도, 사무엘의 선지자학교에 그 연원을 두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 가능성이 크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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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주석이지만, 매우 엉성한 설명이 많습니다. 조금만 신경써서 성경 전후를 읽으면 쉽게 논리적 미비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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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보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연구함으로써, 비전문가들의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시켜주기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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