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바람소리
[단상] 문십지일(聞十知一) 본문
[단상] 문십지일(聞十知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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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반 현상을 대하는 성도들의 인식은 천차만별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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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현실교회의 모든 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특단의 조치를 필요로 한다고 여기는 부류가 있습니다. 강경한 개혁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틀 자체를 불신하면서 판을 다시 짤 필요까지도 거론하는 정도입니다. 강력한 비판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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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다소의 문제는 인정하지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도주의자들입니다. 기존의 틀 안에서의 부분적 개선을 선호하는 온건주의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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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교회는 원천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없고 또 현재 상황 자체도 아무 문제없다고 확신하는 부류입니다. 자칭 정통주의자들입니다. 교회와 성도(특히 목사 등 지도자들)를 비판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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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비판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대’ 입장을 지닙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것이며 ‘비판절대금지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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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십자가 핏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절대 타락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약간의 문제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므로 그냥 둬야 한다.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된다. 비판할 자격을 지닌 자가 누구인가?(들보론). 교회의 일은 무조건 용납하고 용서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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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은 구구절절 옳은 말로만 도배되어 있기 때문에 무심코 들으면 아주 그럴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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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판절대금지론은 성경의 일부를 극단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성경의 온전한 진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편파적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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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교회가 결코 완전한 조직체가 아니라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구약교회와 신약교회 모두가 불완전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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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인간의 불완전성(죄성)에서 기인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교회(구성원인 성도들 포함)는 얼마든지 범죄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인정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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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교회에 잘못이 있을 때는, 이를 감추어 쉬쉬할 것이 아니라, 명쾌히 지적하고 고쳐야합니다. 비록 그 과정이 심히 아프다 할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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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비판절대금지가 성경의 뜻이라면, 우선 구약 선지자들의 행위 자체가 비성경적이 되고 맙니다. 구약에 기록된 무수한 예언들이 몽땅 ‘비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통렬한 내용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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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도 세례 요한이나 주님의 중요한 가르침을 ‘비판’과 연계시키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한과 주님의 비판은 신랄한 정도를 넘어 거의 저주 수준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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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에 신중해야 한다.’는 몇몇 구절들을 도에 넘도록 강조함으로써, 성경과 기독교에는 아예 비판 자체가 없다는 듯이 곡해하는 것은 전혀 온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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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뛰어난 인물을 지칭할 때 ‘문일지십지재’(聞一知十之材)라고 표현합니다만, 이런 능력자는 많지 않고, 문일지일(聞一知一)하는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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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절대금지론은 전형적인 문일지십적 편견입니다. 성경에서 찾아 낸 몇몇 구절만 가지고 자의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고는, 이게 성경의 유일한 진리라고 강변합니다. 하나만 가지고 열을 안다는 듯이, 참으로 대단한 자긍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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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판절대금지론은 문십지일(聞十知一)의 우(愚)에 다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비판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비판절대금지론은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슬기로운 비판’의 순기능을 철저하게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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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교회와 성도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지적하고 고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황희 정승의 ‘이래도 응 저래도 응’ 처세술은 성도들의 덕목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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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절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잘못을 지적(비판)하고 고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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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유독 일부 성도들만이 ‘비판의 批’ 자(字)만 나와도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곤 합니다. ‘네가짓 게 뭔데 비판하고 야단이냐? 네가 그렇게 잘 났느냐? 네 눈의 들보나 빼라!’며 몰아붙입니다. 눈 부라리며 윽박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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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상수훈에는 이런 말씀도 포함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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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상수훈 전체와 연계하여 문맥적으로 살펴야 하겠습니다만, 때로는 축소된 교훈을 도출한다고 해서 문제되지는 않는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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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대상에 적용되어야 하며, 예외는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거룩한 존재니까 적용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됩니다. 교회든 성도든, 잘못이 있을 때마다, ‘이건 아니야. 고쳐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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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절대금지론자들은 이러한 구절을 왜 살피지 않고 그냥 넘어갈까요? 혹시라도 뭔가 감춘 욕심이 들통날까봐 일부러 ‘제해 버리는’(계22:19)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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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보고 ‘개독’이라 놀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제기하는 ‘자성의 목소리’마저 ‘개독’으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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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개인이나 단체의 미래는 확인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비록 잘 하고 있을지라도 반성하는 것이 인격자의 덕목이요 발전하는 조직체의 필수요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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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가 잘 하고 있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그래도 반성은 해야 합니다! 현대교회가 잘못하고 있습니까? 매우 안 좋습니다. 반드시 반성해야 합니다! 반성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자기 살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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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성경 용어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일회적 개념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되는 연속적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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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비판(=반성=자성=회개)의 필요성이 공감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망을 걷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비판은, 단순히 허용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기독교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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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십지일적인 ‘비판절대금지론’으로 기독신앙을 뒤틀어버리는 우(愚)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비판상대자제론’(비판은 최대한 자제하되 꼭 필요한 경우에는 반드시 실행한다는 진실)에 이르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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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참 뜻은 비판절대금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상대자제에 있다는 진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현재 우리를 아프게 하는 현실교회의 많은 난맥상들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교회와 성도의 제 모습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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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참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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