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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용서에 '무조건'이란 없다!(용서2) 본문
[묵상] 용서에 '무조건'이란 없다!(용서2)
♣ 삼하12:5b 및 7a(…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당신이 그 사람이라…)
일전, ‘용서는 야단친 다음의 조건적 절차이다.’라는 제목으로 묵상을 나눈 바 있습니다. ‘용서란 한없이 무조건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성도의 최고 덕목 중 하나이다.’라는 가르침에 익숙하기에, 평소 듣던 내용과 달라 많이 생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성령훼방죄(막3:29)를 제외하고는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잘못했습니다.’라며 돌아오는 것(회개)입니다. 돌아온 이후부터는 무조건입니다. 더 이상의 필요한 조건은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의 오해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어 버립니다. 설교 시간에도, 성경공부 시간에도, 큐티나눔 시간에도,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며 용서만능론 펼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심지어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을 예로 들어가며, 강압적인 용서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무던한 노력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가르침을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성경이 가르치니까, 그냥 따르자는 생각입니다.
생각 자체야 나무랄 데 없겠으나, 실제로 옮겨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결코 실행되지 않습니다. 용서되지 않습니다. 말로는, 생각으로는, 용서하자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전혀 아닙니다. 무수히 갈등하면서도 도저히 용서되지 않아 마음 끓입니다.
이런 저런 논의를 생략한 체, 다음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을 스스로 해 봐야 합니다. “크든 작든 내게 잘못한 사람들을 정말로 용서했고, 하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개개인의 답변이 무엇이든, 정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마음대로 안 되더라.”가 유일한 정답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될지라도, 전부 가식과 변명일 뿐입니다(1분이면 용서가 인간의 속성에 반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값없는 용서’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용서는 너무 가벼웠습니다. 아무 책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결코 값없지 않습니다. 뒤에서 정리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절대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서는, 결코 가벼운 행위가 아닙니다. 엄한 책임을 동반하는 지극히 무거운 행위가 용서입니다. 용서 받는 자는 모든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감당해야 할 응분이 있습니다. 때론 그 책임이 용서 이후에 부과되기도 합니다(구약의 속건제를 깊이 공부해 보시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형제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응당 그 값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과연 어떤 책임을 졌었는지, 교훈 받아보고자 합니다.
○ 본문은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 우리아 장군을 살해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과 다윗이 감당해야 할 배상(변상=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 자신의 행위가 끔찍한 죄악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어 비유로 지적하십니다(1-4절). 미몽에서 깨어나 제 정신이 든 다윗은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5절b)며 바른 판단을 내립니다. 다윗의 분노와 확신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 그러나 나단이 바로 잡아 줍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You are the man!). ‘왕께서 마땅히 죽을 자라 하신 그 사형수가 곧 왕입니다!’ “당신이 죽어야 할 바로 그 사람이다!”
○ 보통 여기에서 그치기 일쑤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나단의 지적에 잘못을 깨달은 다윗이 철저히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얻었다는 설명(13절=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으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더욱이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는 구절과, 시편 51편 등을 끌어다 붙이면서, 용서를 감상주의적 관점에서만 조금 조명해 보곤 그만 둡니다. 우리 입맛에 맞고 속 편한 설명이겠지요.
○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경우, 용서의 대가가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 성경은 결코 숨기지 않는데, 그걸 간과하고 있습니다.
○ 나단을 통해, 다윗의 죄악(간음죄와 살인죄)이 재확인되면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3가지 징계가 선포됩니다(7-15a). 첫째 ‘네 집에 칼부림 그칠 날이 없을 것’과(10절), 둘째 ‘네 처들이 백주에 겁탈당할 것’과(11절), 셋째 ‘갓난 아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14절).
○ 이미 용서가 선포된(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13절) 다윗의 죄는 추가적인 꾸지람 없이 그냥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책임추궁이 뒤따랐습니다. 하나님의 3가지 징계는 하나도 생략되지 않고 완전하게 시행되었습니다.
- 첫 번째 징계(네 집에 칼부림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5곳에서 다윗의 자녀들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약간의 표기상 차이는 있을망정, 다윗의 아들 19명은 이름까지 기록되었고(삼하3:2-5; 삼하5:14-16; 대상3:1-9; 대상14:3), 일부는 무명으로 처리되었습니다(삼하12:15; 대상3:9b). 또 다말이라는 딸도 있었습니다(삼하13:1). 아무튼 다윗의 아들들은 총 19+α명입니다.
- 이 중 세 명이 칼로 죽습니다. 장자 암논은 이복여동생 다말을 강제로 욕보였다가 그녀의 친 오빠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삼하13:28). 압살롬은 부친을 모반했다가 요압 장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삼하18:14). 이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듯 아팠는지요(삼하18:33). 아도니야도 부친을 모반했다가 선지자 나단의 기지와 솔로몬의 아량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후일 결국 솔로몬에게 죽습니다(왕상2:25). 부모형제간의 처절한 칼부림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첫 번째 징계는 철저히 이행되었습니다.
- 두 번째 징계(네 처들이 백주에 겁탈당할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란 당시, 다윗 왕은 후궁 열 명에게 예루살렘 방어를 명하고 피난 갑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왕권계승(쿠데타 성공)을 공포할 목적으로, 부친의 후궁들과 백주 대낮에 동침합니다(삼하16:22). 역시 하나님의 징계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시행되었습니다.
- 세 번째 징계(갓난 아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밧세바와의 첫 아들은 낳아서 이름도 짓기 전에 하나님의 징계로 앓다가 죽습니다(삼하12:19). 다윗이 금식하며 용서를 빌었으나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후, 회개하여 용서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엄청난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다윗이 얻은 용서가 말로만 얻은 속 편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용서는 결코 무대가일 수도 무조건적일 수도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다윗의 사례를 통해 알았습니다.
이는 약 1000년 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극명하게 재확인되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떠났던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표지로서 용서의 전형(典型)입니다!
○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나 책임을 묻지 않고 십자가로써 몽땅 용서해 주셨음을 압니다. 주님 십자가는 명백히 인간의 책임을 감해주신 사건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구원의 값(대가)을 지불하라고 하셨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용서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해야만 합니다. 올바른 성경 이해입니다.
○ 하지만, 용서는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달라집니다. 특히 주님 입장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 용서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포기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용서의 값이 주님 목숨이었다는 것입니다! 용서가 결단코 무대가적이 아니며 무조건적이 아니라는 성경의 절규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위에서 살펴본 다윗의 사례는 이러한 주님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조명해 주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정의에 포함되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용서의 큰 값’입니다.
○ 이 ‘용서의 큰 값’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이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해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의 큰 값’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큰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것처럼, 상대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큰 값’은 절대적으로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의 절대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그런데, 십자가(용서)에는 주님의 목숨값 이외의 추가적인 값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회개입니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기독 신앙의 지독한 역설 가운데 하나는, 비록 주님의 십자가 공로가 모든 죄를 용서하고 만인을 구원하실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아무 조건 없이 시행되지 않는다는 진리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구원도 회개하며 돌아온 자가 아니면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다윗이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시편 51편을 지은 것은 바로 이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용서의 정의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용서의 작은 값’입니다. 비록 작은 값일망정 절대 조건에 포함됩니다.
○ 그렇다면, 성경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은, ‘용서란 주님 목숨이라는 큰 값과 우리의 회개라는 작은 값이 지불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으로 요약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무조건 용서’의 개념과 미묘한 차이가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용서의 보다 깊숙한 측면을 고려해야만, 제대로 실행되지 않아 마음 조리는, 실생활에서의 적나라한 모습이 설명됩니다. 그것은 ‘머리(지식/이해)로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전혀 용서가 안 되는 현상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아예 용서하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습니다. 용서는 인간에게 적합한 행위가 아닙니다!
○ 이 난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다윗의 사례를 살펴봤고 용서의 큰 값과 작은 값을 조금 더 살펴봤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해결책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이래야 인간이 실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책이란, ‘인간 사이의 용서는 ‘큰 값’은 탕감하고, ‘작은 값’만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쉽고 가벼운 십자가”(마11:30)입니다.
○ 만약 이같은 이해가 옳다면, ‘용서의 작은 값’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적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한 (양보할 수 없는) 최저값은,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과실자의 명백한 시인(회개)’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가장 작은 값이 지불되지 않았다면 용서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자녀양육 경험자는 직감적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서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무거운 신앙행위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잘못을 범한 성도는 ‘무조건 용서’라는 도피성에 숨어서, ‘자신의 책임’만 모면하려 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이 같은 이해는 조금 세심한 성도라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는 일반적인 수준입니다. ‘헨리 클라우트 및 존 타운센트’라는 분들도 역시 이러한 이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고백하고 회개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들을 맞이하고 그것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당신을 미치게 하는 열두 가지 잘못된 믿음 p.120). 이분들도 잘못했을 때는 ‘고백하고 회개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결과들을 맞이한다.”는 말이 곧 ‘용서의 대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성경의 용서를 크게 오해하여, 용서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용서는 전혀 안 되고 마음(신앙심) 상처만 커지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대포 용서’(값도 대가도 없는 一方施惠的 용서)는, 인간의 몫이 아니며, 아무리 노력해도 실행되지 않습니다.
○ 따라서 이제부터는 ‘용서란 값없는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용서는 응분의 책임이 따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적 손해에는 당연히 배상이 따라야 하고, 정신적 피해일지라도 잘못한 자의 시인(회개)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 인간의 죄성을 겸허히 인정하고, 수용 가능한 수준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만 합니다. 잘못한 자에게 그 잘못을 명백히 지적해 주고(지난번 묵상의 요지였습니다), 상대가 깨닫고 시인하면 그때 비로소 시행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 잘못한 자의 시인이 전제되지 않은 체, 억지로 용서하려다 보니, 실제로 용서는 되지 않고, 마음만 괴로운 상태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서의 올바른 정의를 오해함에 따른 우매한 처사입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용서의 큰 값’은 주님께 맡겨 더 이상 거론하지 말되, ‘용서의 작은 값’(시인)만큼은 반드시 요구하자는 것이 이 묵상의 요지입니다.
이용규 선교사의 “또 하나님께서 나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더라도 우리의 잘못에 대해 갚을 것을 분명히 하는 정확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셨다.”는 고백(더 내려놓음 p.188)을 통해 나름대로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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