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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용서는 야단친 다음의 조건적 절차이다(용서1)

맑은바람청풍 2015. 7. 4. 11:18

[묵상] 용서는 야단친 다음의 조건적 절차이다(용서1)

 

 

17:1-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

 

 

성도들에게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다양하겠지만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답변이 대세를 이룰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정답 같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용서가 결코 무조건적이지 않다.’는 주제를 냉정하고도 강력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용서 이전에 반드시 필요한 선행조건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너무 피상적으로 읽음으로써 간과하기 십상이지만 말입니다.

 

조건적 용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두 구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1-4절을 조금 세밀하게 살피겠습니다.

 

1절에서 실족이라는 단어는 제대로 번역된 용어가 아님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 실족(失足)이란 잘못 디딤 내지 헛디딤의 뜻을 지닌 한자어로서 성경 본래의 의미 전달에 충분치 못합니다. 중국어 성경을 근거로 번역한 개역성경의 한계를 나타내는 사례일 것입니다.

 

- 원어인 헬라어 스칸다론’(skandalon), 유혹, 걸림돌의 뜻입니다. KJV‘offences’, NIV‘cause to sin’으로 번역했습니다.

 

- 따라서 본래의 뜻(주님의 본심 및 헬라어 표현)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다.’라는 의미로 받아야 맞을 것입니다.

 

2절은 크게 잘못된 부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 맷돌이란 곡식을 탈피하거나 잘게 가는데 사용하는 돌로 된 도구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손으로 돌릴 수 있는 규모입니다만 무척 무겁습니다.

 

- 연자맷돌(mill stone)이란, 인력으로는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커서,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하는 대형 도구입니다. 손맷돌보다 수배의 무게가 나갑니다.

 

- 복강 내 공기에 의한 미미한 부력 덕분에 겨우 물에 떠있는 인체는 약간의 추가 무게도 견디지 못합니다. 조그만 돌맹이 하나만 더해도 무조건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손맷돌도 아닌 연자맷돌을 목에 걸었다면 그 결과는 볼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입니다.

 

- 결국 2절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만약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죄를 짓도록 유혹하면 결과는 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물에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3절은 아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몇 가지를 짚어야 할 듯싶습니다.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데, 헬라어/KJV/한글 성경은 모두, 아무데도 연결되지 않은 독립적인 문장처럼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NIV‘so’라는 접속사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만큼은 NIV가 가장 적절하게 번역했다고 봅니다. , 의미상 이 문장은 앞의 1-2절과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작은 자를 죄로 유혹하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므로 조심하라.’는 뜻이 된다 하겠습니다.

 

- 그러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경계라는 말도 적절한 번역은 아닙니다. 헬라어 에피티마오’(epitimao)책망하다/꾸짖다/책임을 돌리다/벌하다의 뜻이며, 영어 ‘rebuke’도 같은 뜻입니다. 죄를 범한 자는 그냥 묵인해 주는 것이 아니라 된통 야단치라.’는 것입니다.

 

- 그러다 3절 하반절에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용서하라.”는 부분만 뚝 잘라서 적용해 버립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 3절의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은 영어(NIV)로 읽어야 참 뜻이 전달됩니다. 영어성경은 명백하게 ‘if~if~’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건절인 것이지요! ‘용서에는 선행조건이 따라붙는다는 뜻입니다.

 

4절은 부연절로서 용서의 횟수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 물론 죄 범한 형제에게 행해야 할 용서의 횟수는 무한대이고(490=18:22), 4절도 이를 다시 지지합니다.

 

- 그러나 4절 또한, 3절과 마찬가지로, 용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와서 시인(회개)’하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if 조건절).

 

그런데 용서의 방법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18:15-17절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당사자 간에 은밀히 해결하는 단계입니다(15). 두 번째는 두 세 명의 증인을 세워 제한적 공개 방식으로 해결하는 단계입니다(16). 세 번째는 교회를 통한 완전 공개적 해결 단계입니다(17).

 

만약 3단계가 실패했을 경우(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의 처리방식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방인과 세리죄인의 전형입니다. ‘열심히 야단치고(세 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뉘우치지 않으면) 죄인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당시 죄인들과는 밥도 함께 먹지 못했습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은혜를 강조하는 나머지, ‘용서라는 말만 나오면 상대(잘못이 있는 자)의 반응과 무관하게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으로 실행해야 할 덕목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용서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고, ‘잘 분별하여 선별적으로 처리하자.’는 말에는 눈 흘기기 일쑤입니다.

 

물론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면, 잘못에 대한 시인(회개)과 용서의 선후관계를 일률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론 먼저 용서하고 나중 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가 빠르든 늦든, 시인(회개)은 필수입니다! 잘못에 대한 고백(시인 내지 회개) 없는 용서는 성경의 참 뜻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왜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기만 하시면서 내게로 돌아오라.”는 수동적 요구만 하셨는지, 가룟 유다를 설득하여 회심시킬 수 있으신 주님께서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는지, 떠나는 데마를 만류할 수 있는 바울이 왜 붙잡지 않고 보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막무가내식의 용서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성경의 참 뜻에 근접한 이해를 추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분별력 있는 신앙을 지향하는데 매우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