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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교파/교단은 필수인가?(Ⅰ) 본문
[묵상] 교파/교단은 필수인가?(Ⅰ)
< 본문 = 고전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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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사 자료를 보니 현재 한국기독교 교파/교단의 수가 122개라 되어있었습니다. 신흥 소규모 교파 등 모든 교파들이 포함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단으로 분류된 교파들은 확실히 제외되었습니다. 이단까지 포함한다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위 자료가 정확하든 부정확하든, ‘이처럼 많은 교파가 존재했는가?’라는 놀라움과 함께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다른 묵상에서 “기독교의 교파란 성경에 관한 인간 이해의 제한을 나타내는 현상에 불과하며 일반성도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입니다. 교파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성도(특히 일반성도)에게 주는 유익이 조금도 없습니다.
물론 일부 성도들 중에는 인간의 연약성을 고려하여 교파의 불가피성을 주장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만 옳은 생각이라 하기 어려우며 단지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뿐입니다.
교파란 무엇일까요? 사전은 ‘같은 교리를 믿는 종교단체’라고 설명합니다만, 조금 부연한다면 ‘성경해석의 관점이 같은 부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전적 교파개념에는 불가불 숱한 난점이 내재되고 많은 오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은 과연 교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알아보고, 나아가 다수 교파로 분리된 현실교회에서 일반성도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그렇듯이 성경의 증거를 찾아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 성경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교파를 인정하거나 장려하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무 분명합니다. “아니다.”입니다. 오늘 본문이 명백하게 교파의 불필요성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잘 아시다시피, 여러 가지 문제로 골치가 아픈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바울이 질책하는 교회의 잘못 중의 하나가 바로 “교파”(분당/분파)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단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든 바울이든 아무 것도 아니다.”입니다(4-7절). 비유도 아니요 상징도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직설법입니다. 해석이 안 되는 어려운 구절도 아니고 달리 해석될 여지조차 없는 아주 명쾌한 구절입니다. 실제 의미는 “교회 안에는 결단코 교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신학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성도들이 오해하기 십상인 교파관(敎派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몇 군데를 조심스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5절)라고 정리해 주십니다. 물론 표현 기법상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무슨 기법이 되었든, 이 말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대표성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뿌리도 줄기도 잎도 열매도 모두가 포도나무에 소속됩니다. 그것들이 모인 전체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포도나무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교파”만이 유일한 기독교의 교파임을 확증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파와 감리파와 오순절파는 무엇입니까? 각자가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하나의 줄기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줄기가 따로 떨어지면 어찌됩니까? 그대로 포도나무인가요? 아닙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줄기는 결코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쓰레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분리된 장로파는 냄새나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교회를 이루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부분에서 은사를 설명하다가 후반부로 가서는 이를 ‘몸과 지체’의 원리로 비유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확증하십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몸’은 누구입니까? 현대의 각 교파들은 자기 교파가 몸을 대표한다는 듯이 설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몸 전체는 오직 예수님만이 대표하실 수 있습니다. 각 교파들은 손이나 다리나 피부 등 몸의 한 지체는 될 수 있으나 몸 전체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 개인 차원에서의 지체도 홀로 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부여된 한도 내에서만 기능합니다. 손이든 발이든 피부든 모두가 일부를 책임질 뿐입니다. 손이 눈을 대신할 수 없듯이 입술이 발가락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체도 몸에서 분리되면 지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표현이 적절치 않으나, 단순한 뼈다귀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약성경 여기저기에는 “청지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 청지기 개념도 목사들에 의해 무척 많이 왜곡되는 개념입니다만, 여기서는 묵상 주제와 연관되는 것으로 한정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청지기는 결코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청지기 개념을 가장 극명하게 오해한 사람은 사도 요한과 야고보 형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 형제들을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삼아 달라고 로비했습니다(막10:37).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욕심냈던 것입니다. 당연히 거절당했습니다. 천국은 정승판서들(목사들)과 몸종들(일반성도들)이 감투(성경의 면류관을 한국적 감투로 오해하곤 합니다) 싸움 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구원받은 모두가 한 형제로서 서로 섬기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일 뿐이며(마23:8) 형제는 여럿입니다(獨子에게는 형제가 없습니다). 청지기 직분에는 문지기, 창고지기, 식모 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똑 같은 청지기입니다. 계급이 없습니다.
◎ 청지기 개념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어느 청지기든 일부를 담당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창고지기는 창고를 책임 관리할 뿐, 부엌까지 총괄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부분을 담당하는 청지기이든, 그 분야에서의 책무는 인정되지만 다른 분야에까지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청지기는 그 누구든지 주인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아니 대표해서는 안 됩니다!
◎ 성경적 청지기 개념을 교회에 적용해 봅니다. 가르치는 목사 청지기, 다스리는 장로 청지기, 재정을 담당하는 안수집사 청지기, 심방하는 권사 청지기, 안내하는 서리집사 청지기, (아직 청지기라는 호칭을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젖 빨고 있는 초신자 청지기 등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청지기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이들 중에서 교회의 주인이 있습니까? 물론 모든 성도가 위임된 주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실제적 주인은 오직 예수님(성령님)이십니다. 목사를 위시한 모두는 그냥 교회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서리집사가 목사를 대신하여 강대상에서 설교할 수 없듯이 목사가 안수집사 대신 재정에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 혼자 설교하고 안수하고 축복하고 재정관리하고 행정관리하고 감놓고 배놓는 현대교회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치는 직임을 감당하는 담임목사라고 해서 교회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대표는 예수님일 뿐, 성도는 목사든 장로든 서리집사든 모두 일부분을 담당하는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몇몇 구절의 원리는 예수님의 대표성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대표하실 뿐, 어떤 교파도 교회의 대표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교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예수님과의 연계성(신학적/교리적)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파가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반증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교파만 증거하실 뿐, 여타의 모든 교파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어느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교회의 분파(교파)에 있다.’는 교훈은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파는 성경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결론은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해인 것입니다.
▣ 단일교파가 만능인가?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교회는 무조건 단일교파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교파라는 단일교파만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답임에는 틀림없으나, 실행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어려움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단일교파 실패에 관한 변명할 수 없는 역사적 증거는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지금까지 단일교파의 형식을 취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비성경적 작태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 2천 년 간 단일교파 형식을 취해온 천주교의 폐단은 무엇일까요? 강조점에 따라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권력의 집중’을 가장 큰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와 상명하복 조직체계는 절대권력의 필수요소입니다. 절대권력은 필연적으로 절대부패를 낳습니다. 중세의 암흑시대가 그 증거입니다. 단일교파의 형식을 취했던 천주교의 철저한 타락을 교훈 삼을 때, 다양한 교파의 필요성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습니다. 천주교의 역사는 교파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오해받기 쉬운 사례입니다. 건전한 견제세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혹자는 성경의 근본 가르침은 ‘단일교파’이지만 이는 관념론 내지 이상론일 뿐, 불완전한 인간의 실상을 고려할 때, 교파가 필요할 수 있다고 주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치 이론적으로 완벽한 공산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실패했듯이, 성경의 단일교파주의도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므로 교파주의를 허용하자는 설명인 것이지요. 성경적 원칙에는 조금 벗어날지 모르지만, 현실을 고려한 일종의 타협으로서 허용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단일교파를 명령하시는 것 같은데, 다양한 교파의 장점도 있는 듯 생각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할까요?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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