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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상](31) 신앙교육 관점에서의 [목사]의 역할
오늘날 [목사]의 직능은 구약의 제사장 및 선지자와 닮은 점이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제사(예배)의 집전(주관)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미묘합니다. 조심해서 받아야 할 주장입니다. 상세히 살피기는 어렵고 간략하게 핵심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사장 직능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는 제물(예배)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제물을 가져와서 제사장에게 넘겨주면 제사장들이 그 제물을 잡고 태워서 대신 제사를 지냅니다. 특히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대속을 받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일 년에 한 번).
일반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였습니다. 만약 이를 어기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징계가 따릅니다(사울 왕은 이것 때문에 왕권을 상실했습니다). 심할 때는 죽음까지 임했습니다. 결코 어길 수 없는 절대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 절대진리가 새로이 변화되었습니다. 제사의 방법이 바뀐 것입니다(보다 명확해졌다고 함이 적절합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의가 충족되었습니다. 더 이상 피의 제사는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제사의 완성입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남았을 뿐입니다. ‘구약 제사’가 ‘신약 예배’로 발전된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순절 이후 모든 믿은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방인에게까지 동일하게 임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놀라운 점은 「믿는 자는 누구든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만 의지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구약의 인간 중보자(중간자=제사장)가 불필요해졌다는 뜻입니다. 이 놀라운 성경의 진리를 깨달은 종교개혁가들은 이것을 ‘만인제사장 교리’라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깨우침은 성경에 부합되는 올바른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약과 신약의 제사(예배) 집전의 내용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필수불가결한 요원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없으면 제사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 제사장이 필요 없어 졌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 [목사]가 없다면 성도의 예배는 불가능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목사]가 없어도 살아 숨쉬는 영적인 예배를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목사]는 예배의 필수불가결한 직분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반성도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모르고 지냈을 뿐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를 잘 아는 [목사]들이 의식적으로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신약의 [목사] 직능은 구약의 제사장 직능과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말씀 선포’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을 ‘타나크(Tanakh)’라고 하는데 이는 ‘토라(Torah=모세오경)’ 그리고 ‘느비임(Neviim=예언서)’ 및 ‘케두빔(Ketuvim=성문서)’의 첫 글자를 딴 명칭입니다.
토라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학자들 간의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토라의 가장 큰 가치는 ‘족장시대로부터 구약교회 시대로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즉 토라 덕분에 구약교회가 태동되었고 그 구심체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토라는 모세에 의해 일괄적으로(시간적으로는 약 40년 정도 소요되었지만) 제시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문화된 토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구약교회 시대(족장시대는 제외)에는 토라에 대해서만큼은, ‘계시’라는 의미가 없이 ‘해석’이라는 행위만 존재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계시’는 모세 혼자서 받고, 일반백성들에게는 ‘율법’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에는 오직 모세를 통해야만 하나님과의 접촉(교제)이 가능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사망한 이후부터 비로소 제사장 및 선지자들이 하나님(성령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그 계시는 부분적이며 한정적이며 개별적이었습니다. 이것들을 전부 모은 것이 ‘느비임과 케두빔’(광의의 율법)입니다.
자, 이제 구약교회 시대(모세 이후로부터 400년 침묵기 직전까지)의 신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째, 토라는 처음부터 ‘해석’의 방법으로 후손들에게 전수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이다.’의 형식이었습니다. 이 역할은 제사장들의 몫이었고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담당이었습니다. 철저했습니다.
둘째, 여러 선지자들에게 순간순간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입니다. 이것은 ‘선포’의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구약성경에 무수히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라는 형식(使臣公式)입니다. 이 역할은 선지자들의 몫이었고 백성들은 100% 수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셋째, ‘선포’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전달된 다음(구약 성경 한 권이 완성되었을 때)부터는 다시 ‘해석’의 방법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토라처럼 제사장들이 해석하여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한 번 더 종합하면 구약시대의 신앙교육은 ①선포와 ②해석의 2가지 방식이 공용(共用)되었습니다.
이상의 신앙교육 방식은 신약시대 초기까지 존속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료되기까지의 경과를 함축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 사역기간 중에는 오로지 예수님의 ‘선포’만 존재했습니다. 유일한 선지자의 직임을 수행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해석’도 전담하셨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의 양대 기능을 홀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 승천 이후부터는 예수님의 선포를 기록하는 작업(사도들과 지도자들이 기록업무를 수행)과 소수의 선지자들이 성령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행위(계시가 있었다는 것만 천명되었을 뿐 그 내용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음)가 복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제한된 ‘선포’였다고 할 것입니다.
셋째, 1세기말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신약성경의 기록 사역은 완료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성경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지도자들(속사도들과 감독들)에 의한 신약성경(아직 확정되기 이전에는 서신서들)에 대한 ‘해석’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넷째, 이제 1세기 이후부터의 ‘신앙교육’의 특징을 정리할 시점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1세기 이후부터의 기독교 신앙교육은 오직 「해석」 방식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및 신약시대 초기에 존재했던 ‘선포’ 방식은 완전하게 종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점은 오늘날의 [목사] 직임의 임무 이해에 결정적인 요건이 되므로 다시 재정리 강조합니다.
현대 교회의 신앙교육은 오직 「해석」 방식만이 인정받습니다! 간혹 주장되는 ‘개별적 계시에 의한 선포’는 완벽하게 종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사]는 오로지 확정된 구약 및 신약 성경의 의미를 성령님의 조명에 힘입어 ‘해석’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마땅합니다. 그나마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해석은 불가능하며 다만 부분적으로 한시적으로 조금씩만 해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언급된 내용이기 때문에 다시 중복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왜 이런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하는지, 간략히 요약하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하고도 확실한 이유는 ‘성경의 완성’에 있습니다. 즉, 구약이 예표하고 신약이 확증하신 예수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계시하실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해 주실 말씀이 더 이상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취할 자세는 이미 완성된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고 순종하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추가적인 하나님의 뜻을 전하던 선지자의 역할은 중지되는 것이 타당했고(세례 요한의 때까지) 제사장의 역할(말씀 해석)은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이 막중한 임무를 [목사]들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정신 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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