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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상](22) [목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여해야 할 일반성도의 몫도 있다. 본문

신앙의 여정/묵상

[목자상](22) [목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여해야 할 일반성도의 몫도 있다.

맑은바람청풍 2020. 3. 22. 09:18

[목자상](22) [목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여해야 할 일반성도의 몫도 있다.

 

앞에서 일반성도의 신앙교육은 주로 [목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불가피할 뿐 아니라 적절한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커다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일반성도가 미리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일반성도 스스로가 성경을 묵상하고 살펴서 스스로 바른 믿음에 거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가르치는 대로만 신앙생활하면 된다.’는 생각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안일하고 무모하며 불행한 맹신일 뿐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적 믿음이 전혀 아닙니다.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참 [목사](개인적 표현입니다)를 만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인간인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며 또 끝까지 변질되지 않는 [목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변질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셔도 그 위험성과 가능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목회생활 한 10여 년 하고도 변하지 않은 [목사]는 거의 없습니다.

 

썩은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 변질된 [목사]의 신앙지도로는 올바른 믿음에 거할 수 없습니다. [목사]의 변질 여부를 검증하는 것은 일반성도들의 사명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마는 교회에서도 검증은 필수적입니다. [목사]의 가르침이 옳은지 그린지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 것은, 눈을 감을 채 친구의 손을 잡은 상태로, 가파른 산길을 전속력으로 내려오는 것과 똑 같습니다. 아무리 친구([목사])의 손(설교/가르침)을 잡는다 해도, 스스로 눈을 뜨고 살피지 않으면, 급경사와 돌과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다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가는 방향이 맞는지 방해물을 잘 피해 가는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후회하지 않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기도도 더 많이 하며 성경해석에 능숙한 [목사]의 가르침을 도외시한다면 일반성도가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드십니까? 일반성도에게 신앙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질문을 정당합니다. 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인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전지(全知)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모르는 것 엄청 많습니다. 단지 설교하기 전에 미리 공부해서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개인(인간)에게 성경을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조금씩만 알고 자신이 깨달은 작은 깨우침을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28:1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하여금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인도를 해도 여전히 옆길로 빠지는 유대민족을 경계하시며 너희들이 그러니까 내가 여기저기서 조금씩만 알려주어서 마음이 청결한 자라야 깨닫고 겨우 찾아오게 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알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많이 알면 교만해질 뿐입니다.

 

고전13:12절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앎과 믿음은 제한적입니다.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부분적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깨우친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고전14:19). [목사]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성도보다 조금 더 알 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이단 여부를 가늠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강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는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집단은 이단이기 쉽습니다. 자기의 설교와 해석만 옳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면 일단 주의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고전14:13절은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사람([목사])에게는 100%, 어느 사람(일반성도)에게는 0%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목사]에게만 지식의 전부를 맡겨 놓으시지 않았습니다. [목사]든 일반성도든 모두가 조금씩(하나씩) 알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의 도움과 합력을 통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몸의 원리요 지체의 원리인 것입니다.

 

벧후3:16절은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이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성경을 다 알 수 없고 알기 힘든 것이 있으며 이럴 때는 함부로 풀지 말도록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목사]가 다 못 풀면 다른 [목사]가 나머지를 풀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일반성도가 풀기도 합니다. 자기 교회 [목사]의 해석과 가르침만 유일한 진리라고 믿는 것은 무모한 신앙입니다.

 

일상생활의 지혜에 비추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의 심정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이 되어 봐야 대통령 못해 먹을 짓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논리를 성경지식에 적용하면, 하나님과 지능지수가 같아야 성경을 다 알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IQ 무한대가 되어야 하나님과 같은 지능지수가 됩니다(전지전능).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기술된 부분도 많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어떤 곳은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도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밖에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성경을 다 모른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야 서로 서로 깨달은 바를 나누며 서로의 영적 성장에 기여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는 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18:26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는 아볼로로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24)입니다. 오늘날의 신학자입니다(아볼로를 사도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성도인 아굴라 부부가 신학자를 가르쳤습니다. 일반성도의 신앙지도를 잘 받은 신학자 아볼로는 그 후 아가야로 가서 교회를 크게 유익하게 하였습니다(27~28).

 

성경해석이 오직 [목사]에게 허락된 권능이라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주교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깨우침을 서로 서로 고하여 함께 유익을 나누는데 있어서 직분상 구분은 없습니다!

 

[목사]의 깨달음이 일반성도에게 유익해야 하듯, 일반성도의 깨달음도 [목사]에게 유익이 되는 교회라야 참된 교회입니다. [목사] 지상주의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하며 배척되어야 합니다. [목사]도 일반성도의 지도를 필요로 할 때가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양심의 회복이 요구됩니다.

 

일반성도의 영분별의 중요성을 웅변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17:11절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바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목사]가 설교할 때 큰 소리로 아멘!” 하기만 하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싶은 열정 때문입니다. 옳고 바람직한 자세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잘 가려서 선택해야 할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이 부분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지금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을 보고 왔으며 기독교 최고의 지성과 영성을 구비한 바울의 가르침까지도 다 믿지 말고(요일4:1) 성경에 비추어 맞는지 아닌지 검토해 보라는 것입니다! 속뜻이 무엇입니까? 비록 바울의 가르침이라도 성경에서 벗어나면 거절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바울에 견줄 수 있는 영성의 [목사]가 있습니까? 바울도 비켜가지 못한 권위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목사]가 있습니까?

 

일반성도들은 ‘[목사]만 기름부음 받은 성직자이므로 그들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고 그들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종교적 망언에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지금까지 살핀 것을 기억하여 목숨걸고 [목사]들의 설교를 검토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목사]란 일반성도들에게 자신의 성경해석의 진정성을 검증받는 직분이라는 성경의 선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목사다운 목사]로 살아남게 되며 [목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일반성도의 거룩한 사명이자 성업(聖業)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