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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묵상

[목자상](01) 시작의 변(辯) - 듣기 좋은 꽃노래도…

맑은바람청풍 2018. 9. 2. 10:02

[목자상](01) 시작의 변() - 듣기 좋은 꽃노래도

 

미리 밝히는 사항

 

수년 전에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 홈페이지에 게재하기 시작했다가 약 10여 회 이후 중단했던 글입니다. 시작할 때와는 달리 영적 부담감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에야 밝혀지기 시작한 기독교계의 변질(사회주의 의식화)을 목도하면서 더 이상 인내할 사안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보고자 합니다. 무작정 목사를 따르는 신앙이 얼마나 성경과 무관하고 무모한 헛짓거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신앙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은 의외로 크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초안은 완성되어 있으나 하나하나 다시 읽으며 재작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현이 많이 바뀔 수 있고(그러나 주제는 바뀌지 않습니다) 등록 시기도 부정기적이 될 듯싶습니다. 아무튼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짐한 바대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까지만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용어의 정의

 

이글에서는 현대교회에서 만연되고 있는 잘못된 용어 중에서 특히 2가지에 유념하도록 할 것입니다. 첫 번째는 목사이며 두 번째는 평신도입니다.

 

1> ‘목사용어에 관한 아쉬움

 

원래 성경에는 목사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글에서 밝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영어 및 한글 성경의 목사목자의 오역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목사라는 단어를 제하는 것이 옳고 교회생활에서도 추방하는 것이 타당하기에 이 묵상(목자상)에서는 목자용어만 인정(사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묵상을 진행하면서 모든 목사라는 단어를 목자로 바꾸어 보았으나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의미전달이 방해받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미 수백년간 관습화된 용어의 위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섣불리 교체하기가 여간 난망하지 않습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목사직위를 만들어낸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묵상에서 어쩔 수 없이 목사라는 단어가 사용될지라도 그 의미만큼은 성경이 보증하는 바와 같이 목자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 ‘평신도용어에 관한 아쉬움

 

성경에 평신도라는 용어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교회에서 이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다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지칭하는 성경 용어는 성도, 하나님의 무리, 한 백성, 제자들등등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말들입니다.

 

그런데 천주교 사제의 위용이 마냥 그리운 [목사] 주의자들이 [목사]를 도드라지게 만들고 싶은 욕망에 굴복하여 만들어낸 대칭어(對稱語)가 곧 평신도입니다.(4:28 참조).

 

평신도라는 용어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비성경적인 용어입니다.

 

3> 따라서 이 묵상에서는

 

목사는 항상 [목사]로 표기함으로써 비성경성을 나타내도록 하겠습니다.

평신도는 일체 사용하지 않고 일반성도로 바꾸어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년 동안 신앙관련 수필(‘칼럼이라 했으나 어설픈 넋두리)을 쓰면서 많이 망설였던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목자의 위상과 권위와 직능 등에 관한 생각들입니다.

 

성경을 봐도 목자는 명백한 지도자 군에 속하는 직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수행해야 할 직능으로 본다면 매우 중요한 구성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목자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왔는지 모릅니다. 특히 천주교가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거부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바벨탑(=사제제도)의 위력은 매우 컸습니다. 중세 암흑기가 그 증표입니다.

 

천주교의 배교를 바로잡겠다며 개혁을 시도한 개신교는 이해할 수 없게도 그 흉악한 사제관(司祭觀) 만큼은 그대로 수용하는 우매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단지 신부(神父)’라는 용어를 [목사]로 바꾼 것 외에는 그 직능상 비성경성은 그대로 답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현대교회의 [목사], 천주교회의 신부처럼,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왕중왕입니다. 교회의 전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능력자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직능(권한)을 취득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도한 권한 집중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잘못된 현상입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목사]에게 집중된 권한의 편중 현상이 오늘날 세계 및 한국 교회 난맥상의 원흉일 수 있다.’는 것이 숨기고 싶지 않은 개인의 확신입니다.

 

그간, 이 글 저 글에서 이 같은 견해가 조금씩 언급되기는 했습니다만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작심하고, [목사] 관련 이런 저런 생각들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신학과 교리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만 충실하려 노력할 것이고 성령께서 열어주시는 선까지만 터치하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현학적인 영역은 감히 접근하겠다 욕심 부리지 않을 것이며 불가피하게 원어 등을 살피더라도 꼭 필요한 수준으로 한정할 것입니다.

 

다만, 소제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붓 가는 대로(손가락 가는 대로), 가볍게 수필 형식의 글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두려운 것은 은혜(?) 충만한 꾸지람입니다. “네가 뭔데 감히 주의 종님들에게 망발이냐!” 나무라신다면 몸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입니다. 하물며 듣기 싫은 노래는 단 한 번도 싫습니다. 듣기 싫은 것을 두 번 이상 들어야 한다면 이는 고문이나 진배없습니다.

 

[목사]에 관한 비평(비판)은 결코 듣기 좋은 꽃노래가 아닙니다. 신앙 좋으신 분들일수록 듣기를 거부하는 절대 금기사항에 해당됩니다.

 

이 껄끄러운 주제를 다루겠다니

 

실제로 비판(비평), 하는 자에게도 기꺼운 일이 아니며, 듣는 자에게도 유쾌한 일이 결단코 아닙니다. 비판하는 것보다는 격려하는 것이, 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더 낫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만약 성경이 무조건 비판을 금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의 본뜻을 잘못 아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사야의 비판, 예레미야의 비평, 호세아와 아모스의 호통은 실로 날카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즐겁게 들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비판자들은 극단적인 반대에 부딪쳐서 배척당했고 심지어 죽임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랬고 주님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나무라야 할 때는 반드시 나무랐습니다. 그리고 항상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불가불 환영받지 못합니다. 특히 왜곡된 은혜만능주의에 함몰된 오늘날의 기독교계에서는 최고의 금기사항(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이 곧 비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천벌 받을 일로 낙인찍힙니다. 두려워서라도 아무 말 안 하고 쉬쉬해 버리곤 합니다.

 

이러한 단순 정서는 이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정능력’(自靜能力)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미 주변 도처에서 확인되듯이 말입니다.

 

많이 망설였고 하지 말자며 자제해 왔으나, 영적인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했던 주제였기에, 무뢰하게도 겁 없게도, 한번 저질러 보고자 합니다.

 

무척 힘들 것입니다.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모두 말입니다.

 

그러나 각오 단단히 하고 시작해 보렵니다. 얼마만큼 또 언제까지 지속될는지 모르지만,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의지하고, 고통스러운 첫발을 떼고자 합니다.

 

주께서 앞길 밝혀 주시고 평강의 마음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