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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누가 성서를 기록했는가?’를 읽고(R. E. 프리드만) 본문
[독후감] ‘누가 성서를 기록했는가?’를 읽고(R. E. 프리드만)
기독신앙의 근간인 성경에 대해 거룩한 관심을 지니지 않은 성도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절대적 신뢰를 전제로 신앙생활하기 마련입니다.
신앙 초기에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영감설’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러려니.’하고 지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신앙심이 돈독한 분들은 소위 ‘축자영감설’ 절대신봉자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꼼꼼한 성도들은 축자영감설을 비롯한 각종 영감설의 난점들을 인식하게 됩니다. 영감설만으로는 정확한 설명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때부터 성경형성에 관한 강한 의구심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자연스레 ‘문서설 또는 편집설’ 자료를 접하게 됩니다. 편집설이란, 영감설과 달리, 성경이 ‘인간의 편집에 의한 산물’이라는 이론입니다.
편집설을 처음 접할 때, 그간 알고 있던 지식(스스로 습득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로부터 주어들은 어설픈 지식)과의 상충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혼선과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뭐 이런 사탄의 꾐이 다 있냐? 이단을 넘어 삼단에 가까운 거짓이다!’라며 흥분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정통신앙과 이단신앙의 영적 전투처럼 여겨지는 이 과정(영감설과 편집설의 이해와 정리)은 무척 괴로울 수 있습니다. 자료의 확보도 여의치 않고 독자적인 연구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끝 모를 늪처럼 느껴져서 고민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독후감이라는 형식상의 제한으로 인하여 영감설과 편집설을 논증할 도리는 없으나, 나름대로의 성경 형성관을 표현한다면 ‘편집적 인격 영감설’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인격적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나 그 방식은 편집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부연한다면, 성경형성에 있어서 ‘편집’의 역할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편집성을 무시하고는 성경형성 과정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R. E. 프리드만 교수의 ‘누가 성서를 기록했는가?’(한들출판사)를 읽었습니다. 편집설 감초인 JEDP 자료의 작성자와 작성 시기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매우 탁월합니다.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 남방계열 유다 자료인 J(여호와/야웨)와 북방계열 이스라엘 자료인 E(엘로힘)는 BC 922년에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한 722년 사이에 살았던 익명의 저자 작품일 것이다. 722년 이후 J 및 E가 JE 자료로 합쳐졌을 것이다.
○ 신명기 법전인 D 자료는 모세의 후손인 실로의 제사장 계열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다. D는 시기별로, 요시야 왕이 죽기 전인 BC 609년 이전의 제1역사서(Dtr¹)와, 이스라엘이 멸망한 BC 587년 이후의 제2역사서(Dtr²)로 구분된다(기록된 시간차는 약 22년). 그리고 그 저자는 예언자 예레미야일 것이다.
○ 제사장 자료인 P는, 포로기 이후인 BC 517년 이후에 아론 계열의 제사장 그룹에 속하는 자의 편집일 것이며, 학사 ‘에스라’가 가장 가능성 높은 편집자일 것이다.
○ 최종적으로 모세오경의 편집자는 에스라일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저자의 주장은 시종일관 ‘JEDP가 모세와 아론 계열 제사장들 간의 주도권 확보 내지 생존 경쟁의 산물’이라는 논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주 특이한 논조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전형적인 편집설과 중복되는 주장도 있고 약간 시각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읽어 가는 동안, 때로는 동의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동의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편집설과의 명백한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감설의 기본정신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편집설적 이해를 설파하는 저자의 식견에 공감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추기 참조).
워낙 중요하고 미묘한 주제이기에 읽는 사람에 따라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될 수 있고, 또 다소 논리적이고 학술적이라 읽기에 부담도 되겠지만, 성경형성에 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주는 책입니다. 분명 끝까지 읽어볼 만한 가치를 지닌 그런 책이라 하겠습니다. ♣
※ 추기 : 책의 말미 부분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저자의 인식을 인용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성경 편집자)는 신의 인격적인 특성과 초월적인 특성 사이에 새로운 균형을 형성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주적인 동시에 매우 인격적인 분으로 그린 모습이다. 야웨는 우주의 창조자이시지만, 동시에,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다. 그 융합은 예술적으로 드라마틱하고 신학적으로 심오하지만, 새로운 긴장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이제 인간이 전능하신 우주의 주재와 친밀한 인간적 대화를 하는 것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개별 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못한 균형이었다. 하지만,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균형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브니엘에서의 야곱처럼, 그 이후로 두 종교는 모두 우주적이며 인격적인 신과 함께 살면서 투쟁해 왔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세련된 신학자와 순진한 신앙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궁극적인 것들이 문제가 되면서도, 모든 인간은, “우주의 주재께서 너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는다. 특이한 사상이 생겨난 것이다. 재차 말하건대 이것은 저자들 중 그 누구도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다. 이것은 아마도 편집자의 의도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편집자가 자신의 자료에 충실하려는 한, 새로운 혼합물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본문 속에 너무도 깊이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p.3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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