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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죽으면 죽으리이다(if I perish, I perish.) 본문
[묵상] 죽으면 죽으리이다(if I perish, I per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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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4:16(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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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참으로 오묘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의 진행과정이 아무리 다양하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사건이든 어느 인물이든 예수님께로 귀결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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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뿐이라면 성경의 오묘함은 제한될 것입니다. 지능지수가 높은 초천재들의 사유능력으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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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는 각종 신학(이론, 주장 등)을 보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어떤 이론(신학)은 무릎을 칠 정도로 기기묘묘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아무리 기발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단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성경의 오묘함은 이 수준을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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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오묘함의 한 국면은, 비록 성경의 모든 인물과 사건이 예수님께로 집중된다 할지라도, 각 사건과 인물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메시지를 더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집중된 것 같은데, 다시 보면 비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어떤 사건을 한 가지로 고정하여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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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스윗이 “같은 성경도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서 읽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한 가지 해석방법이란 없다.”(의문을 벗고 신비 속으로 p.123)라고 한 것도 이를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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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이해 범위에 속하기도 하거니와 초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신비입니다. 성경은 주님 오실 때까지 현재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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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백 위에서, 특정 성경 구절이 잘 알려진 대표적 한 가지 교훈만 제시한다는 생각을 고집할 경우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각 사건은 보다 깊은 영적 의미를, 보이지 않게 숨겨두고 있는 것에 대한 예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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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경험하는 특이 체험은 다양합니다. 불치병이 치유되고 불의의 사고에서 구출되고 사면초가 상황이 해소되고 방언이나 제반 신비현상을 체험하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각종 간증을 통해 증명되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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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간증들의 특징적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문제의 해결’입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상황의 호전’ 현상입니다. 만약 상황 악화를 간증한다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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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은 ‘은혜’와 ‘상황의 호전’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교육으로 말미암아 오직 ‘상황의 호전’만이 은혜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으나, 실은 ‘상황의 악화’도 은혜일 수 있다는 진실을 수긍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된 믿음의 바로미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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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인 신앙이해를 지닌 성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 사고나 질병에 의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100세까지 살아야 하며, 물질적 궁핍 당하지 않고 넉넉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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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가난은 성도에게든 불신자에게든 매우 중대한 관심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성도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당하거나 극한 가난에 처하게 될 경우, 몹시 껄끄러운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우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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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성도들의 잘못된 이해가 작용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다는 것인지 조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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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사고나 질병 또는 신비현상을 통해 죽음을 맛보고 다시 살아난 간증은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살아났기에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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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만약 ‘살아나지 않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영광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될까요? 질병이나 사고로 죽었다면 이는 결코 간증이 될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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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인 신앙인이면서도 젊은 나이에 주님 품에 안기는 주변 성도들을 수없이 보셨을 것입니다. 이분들의 경우는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잘못에 대한 주님의 보복(징계)으로 봐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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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0여 년 신앙생활의 체험과 또 성경을 읽으면서 깨우친 바로는, 때론 죽음도 영광이 되는 사례들이 너무 많았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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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성도들의 사례와 기독교 역사가 증거하는 순교자들의 경우는 생략하고, 성경 기사만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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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죽음과 관련하여 가장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야고보 사도와 스데반 집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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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으로부터 대단한 사랑으로 양육받는 야고보 사도는 아무 기여 없이 허무하게(너무 일찍) 순교 당했습니다. 또한 사도에 비해 조금의 손색도 없는 스데반 집사도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설교 한마디 하고 순교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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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의 경우에 대해서는 지난번 묵상해 보았기에 다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이분들의 죽음이 정말로 허무한 사건이었는가에 대하여, 성경은 결코 허무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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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죽음이 허무했다면, 베드로를 살려내신 그 방법 그대로, 이들도 살려내셨을 것입니다. 이들을 살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곧 이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역증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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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주변의 불치병에서 치유받지 못하고 죽는 성도들도 결코 허무한 상황이 아닐 수 있다는 유추는 쉽게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꼭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고 아프거나 사고로 죽더라도 이 또한 은혜일 수 있다는 진실이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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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경제적 궁핍 즉, 가난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된통 오해하셔서, 믿는 자는 무조건 잘 살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합니다만 헛짚은 것입니다. 믿는 자가 잘 살 수 있으나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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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가 몇 살에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죽기까지 단 한 순간도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낙원에 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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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믿는 성도들의 최종적인 소망은 천국 가는 것입니다. 나사로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나사로처럼 살더라도(나사로는 거지였습니다!) 천국에 가기만 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신앙차원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겠으나 현실에서는 쉽게 대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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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대부분 성도들은 이러기를 바랄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는 부자로 살고, 죽은 후에는 천국 가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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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살펴본 것과 같이, 성경은 우리의 단편적인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생각과 기대와 상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바로 믿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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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가난에 대한 이해도, 우리의 편협한 오해를 넘어,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믿어도 가난하게 살고 불치병으로 일찍 죽을 수 있다는 현실과 성경의 증거에 동의된다면 이는 바른 신앙에 이르렀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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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으로 앞에서 살폈던 내용과 오늘 본문을 연계해 보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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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잘 아시다시피 포로기간 중 바사국의 왕비 지위에 오른 에스더의 각오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풀어서 에스더의 공로로 유대민족이 구출되는 것으로 결말 맺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의 구출은 하나님의 기본 뜻에 속하기에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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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스더의 쓰임 받음은 조금 다릅니다. 성경은 에스더의 ‘살아서 쓰임 받는 경우의 수’를 말씀하시지만, 그녀가 쓰임받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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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사람 모르드개는 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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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의 구출은, 에스더가 아니면 실현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해서도(“다른 데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역사될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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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에스더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유다인의 구출은 에스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에스더가 더 살아서 왕비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목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하시는 사역에 헌신함으로써,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그녀의 생사와 부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짚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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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개개인의 생사와 부귀 자체를 중시하지 않으십니다. 성도가 건강하고 또 부유한 상태로 오래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병마로 고생하다 일찍 죽을 수도 있습니다. 80세 장수한 목사만 은혜 입은 것이 아니라, 40대에 요절한 서리집사도 은혜입은 성도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이해는 상당히 건실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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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삼박자 축복이니 천국체험이니 하면서 아무리 유혹하더라도 이는 아주 지엽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일지라도 가난할 수 있고 병들어 죽을 수 있고 천국체험 못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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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의 고백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배수진 믿음이야 말로 우리가 끝까지 견지해야 할 믿음의 또 다른 실상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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