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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겟세마네의 기도 - 이 잔(This Cup)

맑은바람청풍 2016. 6. 22. 18:47


[묵상] 겟세마네의 기도 - 이 잔(This Cup)

(26:36-46)(22:39-46)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을 역기점으로 하여 계산합니다. , 춘분이 지난 후 첫 보름(滿月) 바로 다음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이로부터 40(주일 포함시 46) 전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에는 주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묵상하며 경건히 지내야 합니다.

 

사순절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인 고난주간(Holy Week) 중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에 대하여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최후의 만찬)를 마치시고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간절히 기도드리십니다. 이것이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영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기도를 육체적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을 육체적 고통에 주눅이 든 허약한 인간으로 비하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의 육체적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 고통입니다. 비록 예수님이라 해도 피하고 싶은 고통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데, 우리의 기억에만 의지하더라도, 죽음의 극한 고통을 의연하게 이겨낸 영웅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관운장, 이순신, 성삼문 등은 참으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위인들이었습니다.

 

성경에도 다니엘과 세 친구, 에스더, 갈렙 등 수많은 선진들이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2사도 중 요한을 제외한 열 한 분이 모두 순교를 당했는데, 이분들 중에는 톱을 잘려 죽으신 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분, 피부 벗김을 당하신 분도 있으며,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도 화형, 참형, 사자 밥, 십자가형 등등 모든 참혹한 사형방법에 따라 죽임 당한 분들이 무척 많습니다. 카타콤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그 어떤 성도도 죽음에 주눅 들어 죽음을 회피하려 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만 육체적 고통에 마음이 약해지시어, 육체의 고통을 피하려하셨다고 보는 것은 어딘가 어색해 보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평소 말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해석입니다. 16:15-24에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칭찬(교회의 터전, 천국열쇠), 십자가 고난 예고와 베드로의 만류가 나오고, 곧이어 예수님의 섬뜩한 선포가 나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씀은 가장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의 진심 어린 만류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만큼 무지막지한 욕설(?)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탄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잘못한 것인가요?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알고 계셨고 이는 피할 수 없는 당신의 사명이며 이 사명을 의연히 감당하시겠다는 결심을 굳건히 하시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명(하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함으로 인해 엄청난 꾸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분이 육체적 고통이 겁나서 이 길을 피하도록 기도하셨다고 믿어지십니까? 아니라고 보는 것이 성경에 부합됩니다.

 

그렇다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중, “이 잔의 의미는 단순히 육체적 고통의 회피가 아닌, 무언가 다른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저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몇몇 분들의 해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성일 장로(성경과의 만남) :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에 대한 애통함이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일한 고난을 당하지만 제자들의 고난은 영광의 고난이다. 제자들은 7년 대환란 전에 휴거되고 숫자도 많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거부한 대가로 수천 년 간 유리할 것이며 대환란 이후에나 구원된다. 그리고 그 숫자도 적다(144,000). 구원되는 숫자에 비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는 고통은 너무나 크고 처절하다. 이 사실이 너무나 슬프기에 이 잔’(이스라엘의 박해)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드렸다.

 

잭 하일스 목사님(기도탐구) :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이 순간에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갈보리에서 죽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동산에서 죽으시면 인류의 구원사역을 완수하실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이 가능한 갈보리에서의 죽음을 간구하셨던 것이다.

 

더치 쉬츠 목사님(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 : 하나님은 태초부터 이 땅에서 인간을 통해 일하시기로 작정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응답될 때까지 3시간 동안 피땀 흘리며 기도하셔야 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생각에 따른 일이 행해지려면 인내의 기도가 필요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위의 해석들은 모두 성경에 입각한 해석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잔의 전체 의미를 망라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부분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어느 누가 해석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 전부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비록 자격은 없지만,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말씀 해석의 권리에 근거하여, 저 나름대로의 해석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제 스스로 세워놓은 성경해석 원리를 소개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신학적으로 공인된 용어가 아니라 단지 개인적으로 만든 것임을 밝힙니다.

OT(Onion Theory ; 양파이론) : 어느 분의 한가지 해석이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 전부를 감당하지는 못한다는 이론입니다. 양파는 무수한 껍질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껍질 하나가 양파 전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껍질 하나 하나가 모이면 하나의 양파가 됩니다.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분의 해석만으로 성경의 온전한 의미가 망라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다양한 해석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원리가 됩니다.

 

GCT(God-Centered Truth ; 하나님 중심의 진리) : 성경의 한 단어, 한 문장, 한 단락, 한 권을 해석할 때는 언제나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풀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55:8). 인간은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9). 달리 말하면, 성경은 거꾸로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을 수 있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위의 OT 원리와 항상 짝을 이루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아무 해석이나 다 수용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명심해야 할 원리입니다.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잔은 제자들(오늘의 우리들 포함)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자들이 전부였으며 항상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한 사람의 몫을 감당할 수 있도록 양육하기 위해, 모델이 되셨고,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만의 십자가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10:38)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분명 십자가를 져야 함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당하신 동일한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의 희망대로 그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는 순종을 보이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모범이지요.

 

예수님의 교육방법 중에는 말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시는 모범도 있습니다. ‘이 잔이 지니는 의미 가운데에는 이 모범의 뜻도 포함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십자가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 면하기 위해 이 겟세마네 기도를 드리신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고난을 당하게 될 제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당신 혼자만의 고통을 면케 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구원천국은 언제나 함께입니다(천국을 구성하는 3 요소는 삼위 하나님과 교회와 천사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한 분만을 대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인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잔이라는 말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 한 분의 육체적 고통을 피하려고 개인 차원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묶어서, 전 인류의 고통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십사는 의미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길 외에는 인류를 구원할 또 다른 길이 결코 없음을 아시기에,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결론 내리신 것입니다. 온 인류가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었기에 이 험난한 고통의 길을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찢고 피를 다 쏟으시며 이루신 우리의 구원 - 우리에게도 우리의 십자가가 있음을 명심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쁨으로, 순종으로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맺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몇 분의 해석이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더 있습니다. 남아 있는 진리를 더 발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올바른 신앙으로 열심히 연구하여 또 하나의 양파껍질을 보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리는 모두가 계속 더 발견하여 더해야 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GCT & OT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만 성경을 조명 받아 해석해야 합니다. 이 길이 곧 복 받는 길인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지니는 의미를 재음미하면서,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참 복을 누리시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추가 해설 : 오늘 묵상은 단어를 중심한 것이었습니다. 금지된 방법은 아니지만 대표적 또는 유일한 방법만은 아닙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겟세마네 기도는 암담한 기도, 간구의 기도, 고통의 기도, 의문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소망의 기도, 중보의 기도, 생명의 기도, 확신의 기도였으며, 결국은 순종의 기도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