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바람소리
[묵상] 두 렙돈의 진실 본문
[묵상] 두 렙돈의 진실
♣ 막12: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NIV : But a poor widow came and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 worth only a fraction of a penny).
후손들은 조상들의 발자취인 역사 기록을 보고 선조들의 삶을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바른 역사해석의 관건은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과거는 오직 과거의 기준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들이 “우리 어릴 때는 먹을 게 없어 얼마나 배를 곯았는지!”라며 옛날을 회상합니다. 듣는 아이들은 “이상하다? 쌀이 없으면 라면이나 빵을 먹으면 될 텐데!”라며 고개 갸우뚱거립니다.
과거의 극한 가난을 체험치 못한 현대 아이들이 굶주림의 처참함을 모르는 것은 이해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해가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체험치 못했고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할지라도 옳은 판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체험 한계 내에서의 제한된 이해력으로써 체험 범위 밖의 현상을 규정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해석’하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위 역사해석의 유의점은 성경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문화적 해석).
일부 학자는 오늘 본문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과부는 어려운 중에서 모든 것을 넣었기 때문에 비례로 따지면 가장 많이 받쳤던 것이다. 과부는 희생적으로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리라고 신뢰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적인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과부의 예를 사용하셨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은 곧 시험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전적으로 죽음에 내어 주심을 예증하여 주는 것이다.】
매끄럽지만 올바른 설명이 아닐 수 있습니다. ‘희생적 헌금’이나 ‘인과응보적 기대’라는 이해는 성경 본래의 의미와 동떨어진 오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생겨납니다.
신학교 시절, 위와 비슷한 교수의 설명을 들은 것 같다는 불명확한 기억에 근거하여, 상당수의 목사들은 괴상한 설교를 하곤 합니다. ‘칭찬받은 과부처럼 우리도 몽땅 헌금하여 더 큰 칭찬받자.’는 내용입니다(이런 류의 설교는 차고 넘칩니다).
아마 설문조사를 한다면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본문=헌금 보증용 쐐기’ 구절로 인식하고 있음이 밝혀질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위의 주석이나 자주 듣던 목사들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당시 과부(성도)의 애환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어야만 바른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따라서 오늘은, 과부의 실상을 참작할 때, 왜 본문을 ‘헌금 보증용 쐐기’로 오용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에 앞서, 본문에 나오는 당시 화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렙돈” (lepton)은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입니다(눅12:59절은 ‘호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1/2 고드란트이고 고드란트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1 데나리온의 1/16입니다.
결국 1 렙돈 = 1/32 데나리온입니다(일부 학자는 1/64 데나리온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일당 10만원이라면 2 렙돈은 약 6,250원 정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가치 환산이야 어찌되었든, 실제적 가치는 100원짜리 동전 2개로 보면 될 것입니다(1991년 그리스 방문시 기념품으로 구해 두었던 렙돈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영락없는 10원짜리 동전입니다).
우선 2천 년 전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려야 합니다. 과부는 서민 중에서도 최하층민입니다. 과부에게 ‘돈’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돈의 진면목은 ‘교환가치’에 있습니다만, 이것이 다시 ‘구매력’으로 표현되고 결국은 ‘영향력’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최하층민 과부는 돈을 사용함으로써 구매력을 과시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할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과부는 돈으로 거래한 경험이 전무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세대의 경험으로도 설명됩니다. 50대 이상 되신 분들은 잘 아십니다.
어린 시절 돈 쌓아놓고 생활비 사용했던 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년 농사짓고 가을쯤 되어야 목돈 한번 만질 수 있었고, 평소 생활비는 항상 쪼들렸습니다. 책값이나 월사금 못 내서 쫓겨나며 눈물 흘리던 모습이 기억될 것입니다.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돈이란 언제든 쉽게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는 반증입니다.
현대사회는, 화폐 교환이 필요 없는 신용사회로까지 발전되었고, ‘화폐란 쉽게 만질 수 있는 물건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과부가 살았던 시대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과부 시대에는 돈이 늘상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최하층민들에게는 평생 한 번 만지기도 쉽지 않았다는 진실을 짚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과부는 항상 돈을 쌓아놓고 생활하다가 딸랑 두 렙돈만 남게 되자 부랴부랴 헌금했던 것이 아닙니다. 겨우 100원짜리 동전 2개에 불과했지만, 평생 처음 만져보는 돈이었고, 그것을 헌금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한 추정이라면 몇 가지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어쩌면 과부의 행위에는 말 못할 애달픈 사연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첫째, 과부는 성전에 올 때마다 두 렙돈씩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헌금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실로 각박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본문 기사는 과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헌금이었을는지 모릅니다.
둘째, 그렇다면 과부에게는 어떤 절박함이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본문을 대할 때마다 오버랩되는 사건은 사르밧 과부입니다(왕상17:12).
마지막 밀가루로 최후의 떡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던 비장한 자살계획은 엘리야의 매우 철면피한 요구(찢어 붙일 것도 없는 소량의 밀가루를 자기가 먼저 빼앗아 먹겠다는)로 인해 좌절되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애처로운 순종이 목숨을 부지하는 은혜로 바뀌어 3년 기근 극복의 동인으로 작용되었습니다만, 사르밧 과부에게는 죽음과 대면할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본문의 과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두 렙돈이 과부의 마지막 남은 생활비였다면 과부는 그날 저녁부터 굶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비오스, bios) 같은 생활비(비오스, bios)를 투척했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절박함의 표출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그리고, 비록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데리고 가셔서 저녁을 대접하셨는지 모릅니다).
셋째, 찢어지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소유를 헌금했다는 사실은 ‘생명의 포기에 버금가는 아픔’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경우라면 본문을 가지고, 위의 주석처럼 ‘희생적 헌금이나 인과응보적 기대’로 해석하거나, 일부 목사들처럼 ‘헌금 보증용 쐐기 구절’로 곡해하는 것은, 어설픈 겉멋일 수 있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희생이나 보험 차원이 아닌 ‘전 생명’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부유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2천 년 전 각박했던 과부의 행위를 판정해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를 살았던 과부 입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과부의 입장과 처지에서 본다면, 본문의 행위는 처절함의 극치일 수 있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성경이 명백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본문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전 소유(생전 처음 만져보는 전 재산)를 헌금하지 않을 수 없는 과부의 처절한 상황과 심정을 아시는 주님께서, 과부의 그 애통하는 심령을 칭찬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아픈 위로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본문은 흔히 듣는 바와 같이 편의주의적 ‘헌금 보증용 쐐기’ 구절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보다 깊이 깨우치신 지체들의 바른 이해를 기대해 봅니다. ♣
※ 작성 후 발견한 유사 및 반대 설교 3편을 함께 올리니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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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설교(유사)>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 강조용인가?(눅 21: 1~ 4)
(출처 : http://blog.empas.com/krjohn316/ 전북 중앙 연재칼럼)
본문의 말씀을 묵상 하면서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하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분들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일까요?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예수가 성전에서 두 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해 말했는데,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누가복음에서는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막 12:41~44)에도 기록돼 있는데, 예수가 누구에게 말했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막 12:43)” 말했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쳤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 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치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할 리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예수가 이 말씀을 할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건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 해 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 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잘 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개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 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가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해석한다면, 예수를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돼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 마디로 예수를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20장 45~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절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해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돼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돼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장 41~44절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는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해 말씀 하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 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 합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란 충격적인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 돼 있습니다.
20장 45~47절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 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장 6절 성전 무너짐 등.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에 율법 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하고, 21장 5절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이루어지고,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 돼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 학자들에게 경고함으로 시작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라고 해석 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 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는 것이 아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는 교회를 향한 경고 메시지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 되는데,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뚝 떼어 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세용 목사(수병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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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설교(유사)> 두 렙돈과 성전의 비밀
(출처 : http://pray119.ohpy.com/main)
예수께서 성전을 가리키며 그 웅장함과 아름다운 미석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무서운 재앙의 말씀을 하신 장면을 기독교 신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공동으로 기록한 기록 중에 한가지 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기자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이유라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낀 생각이 유독 강열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또 한가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모아진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 될 일에 대하여 더 이상의 변개함도 없이 확실하게 뜻을 이루신다는 확실성을 들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이루셨고 이루어 졌으며 이루실 것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재림하실 것만 남은 것이므로 사실 구약 성경에 예언한 선지자의 선포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들은 이제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신분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는 이유라면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은 성결한 삶을 살도록 소금과 빛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죄악에 빠져서 죄를 씻지 못한 채로 죄와 함께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며 믿으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즉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것입니다만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은 넘쳐 나지만 정작 영적인 생명이 살아있지 않은 채 세상의 모임과 친목 단채이상을 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려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가 그대로 교회라는 이름만 바꿨을 뿐 구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들은 많으나 성도들의 모습이 삶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슬픈 현실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종교적인 종교인들이 많고 교회에 소속한 교인들은 많지만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양 들이 있기는 한데 정작 영적인 생명인 예수의 영으로 사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현재 제도권 속에 있는 교회 구조적으로는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며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종교인들만 무성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일지기 종교 개혁자들이 소리높이 외친 성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고의 나팔소리를 전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 것처럼 불행한 시대는 없습니다. 오늘 이시대의 교회는 정말로 성경의 소리를 정확하고 진실하게 가르치고 있는지요? 성도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지요?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라면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로서 모르면 모르겠다하고 아는 것은 솔직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돌들이 말을 할 것이며 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하는지 이제 부터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대부분 이 본문은 헌금 강조용이나 당위성을 강조해서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과부의 헌금행위를 높이 평가한 것처럼 성도들 역시 생활비 전부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헌금하자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읽어가는 성도라면 그의 신학적인 배경 없이도 충분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듯해서 좀 답답합니다. 오늘날은 예전처럼 신학자들이나 전문 목회학 박사 아니어도 일반 성도들의 눈과 귀가 훨씬 성능이 좋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중세 교회사 때처럼 특정 사제단이나 읽을 수 있는 감춰진 성경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어와 각종 주석서들을 참고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가 열려진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은듯하니 성경 본문을 똑 때어서 그 부분만으로 설교를 하시니 그럴듯한 헌금 강조용으로 둔갑할 수밖에 없고 일부 성경을 읽기를 싫어하는 교인들에게는 그저 아멘으로 은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배후에는 사단의 교묘한 전략이 적중을 한 것일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교회의 권위주의로 인하여 감히 기름받은 주의 종을 거역하거나 대적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 억압해서 저주 설교까지 하는 강단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만 알만하고 지혜가 있으시고 능력 있으신 몇몇 목회자들 역시나 자리 지키기 위해서 교단과 노회의 눈치 보느라 함구하고 피해가거나 적극적으로는 동의하는 과감한 모습까지도 보이니 암담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지금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처신 해야 할까는 분명해 질 것입니다.
먼저 본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헌금을 내야하는 적용인지 말입니다.
주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과 또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이 모든 사람은 그들의 풍족한 데서 하나님께 연보로 넣었지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계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시더라.(눅21:1-4)
이 부분만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 기록자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충분한 단서들을 곳곳에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과 문화를 이해하고 앞뒤의 연결 구절들을 함께 살펴야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보물을 찾거나 퀴즈를 푸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특정인들에게만 보여지는 신기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에게 누구나 열려진 책입니다. 구원 얻은 성도라면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백성이 듣고 있을 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좋아하고 또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니,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시더라.(눅20:45-47)
여기서 부터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과부의 집을 집어 삼키는 위선적인 서기관들을 조심하며 경계하며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기관들은 종교적인 기득권자들은 더 큰 저주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주님께서 과연 과부의 헌금 행위를 칭찬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난한 과부들이 헌금을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셨겠습니까?
주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주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과 또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이 모든 사람은 그들의 풍족한 데서 하나님께 연보로 넣었지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계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시더라.(눅21:1-4)
제자들에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계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신 말씀의 본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생활비를 다 넣었으니 저 과부의 내일 생활은 어찌 될 것인가?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 어찌 할까요? 하고 질문할까요? 여러분들이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제자라면 즉시로 몰래 과부의 뒤를 따라가서 왼손 오른손이 모르게 그 집 마당에나 문 앞에 먹거리라도 혹은 밀가루라도 놓고 오지 않았을까요? 너무 작위적인 생각인가요?
여기 과부는 사실은 그 당시의 수많은 과부들의 대표입니다. 가장 소외 되고 연약한 소자들 중 과부인데 성전 안에는 많은 부자들이 있었고 그 풍족한 중에 헌금을 하면서 유희를 만족을 종교적인 행위로 위안을 누리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봐야할 의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특히나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런 서기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좋아하고 또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니"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해야 함을 누누이 강조 했을 것이며 말라기서를 인용해서 하나님의 것을 십일조를 유난히도 강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경고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이 부분을 갖고 또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억지 주장을 하시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고집을 합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박하와 아니스와 커민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 더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이라. 너희는 이것들도 마땅히 행하고 또 저것들도 저버리지 말아야 하리라. 너희 눈먼 안내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마23:23-24)
어느 분의 글을 잠시 인용합니다.
그리고 23절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면, 먼저 예수께선 그들이 하고 있었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계신데 -누가복음에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 도대체 박하와 회향이니 운향과 근채니 이런 게 무언지나 아십니까? 사전을 찾거나 영어 단어와 비교해 보시면 이것들이 민트, 허브 등의 향신료 종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품목들은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논쟁하던 바로 그 품목들인데, 하나같이 개인의 밭에서 정성 들여 김매고 키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씨만 뿌려 놓거나 아니면 들에서나 산에서도 구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파, 마늘, 깻잎, 들깨 뭐 이런 양념 종류들과 심지어 들풀에 대한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까지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것을 예수께서 기특하게 여기셔서 황당한 '양념'의 십일조를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주장도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이것들도 버리지 말고 저것들도 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십일조를 지지하셨으니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황당하다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할 구실을 찾긴 찾아야 할텐데... 고민하다 결국 찾아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기에 앞 뒤 가리지도 않고, 게다가 가장 권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니 더욱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래서 냅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해라 하셨다고 소리 지른 게 분명합니다.
원글 보기 참고: 출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 포커스
이런 식으로 성전이나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가르쳤으니 아마도 노이로제가 걸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작은 물질마저도 하나님께 바쳐야만 한다는 강조를 오랫동안 들어 왔었던 과부들에게는 정말 모처럼 일한 품삯을 렙돈으로 만졌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내가 그동안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는데 이거라도 갚아야 하겠구나 하며 연보궤에 넣었을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돈을 손에 쥐어본 일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과부가 살아가면서 돈을 번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대사회에서는 어린아이와 노인과 여자는 숫자에도 들지 않잖아요? 일을 해도 물물교환식으로 농작물이나 소출의 얼마를 때어서 삯으로 받아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과부의 두 렙돈은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며 처음이자 마지막 헌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부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공동체를 꾸려야 할까를 미리 제시해준 교육현장인 것입니다. 그 일례로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교회의 특징이 그 중에 핍절한 자가 없었다 이며 서로 나누어서 공용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과부들을 위한 매일 구제의 일도 활발했었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집사들을 세운 이유는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들의 구제에 차별이 생기는 불상사가 나타났고 그것 때문에 공동체 안에 원망과 불평이 나오자 긴급대안을 제시한 것이 집사를 세워서 구제를 하게하고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것에 집중하자고 한 것이지요.
이러한 주님의 의중을 모르는 사람들이 따라 나와서 하는 소리가 뭔줄 아시는지요?
몇 사람이 성전이 얼마나 우아한 돌들과 예물로 단장되었는가 성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그 날이 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눅21:5-6)
주님 보시지요. 이 건물들과 성전을 건축하는데 돈 없이 되었겠어요? 우리들이 낸 풍부한 헌금으로 지은 이 건물들을 보시지요. 과부의 두 렙돈으로는 어림도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도 돈이 있어야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성전도 멋지게 건축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성전을 보세요? 어마 어마한 돈이 들어서 건축했고 저희들은 그 돈을 모으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자꾸 저희들이 낸 돈을 가치 없게 취급하시니 섭섭합니다.
제가 스토리를 써 봤지만 어쩌면 성전을 자랑하는 서기관들이나 부자들이 주님께 하고 싶은 말이 이런 거 아닐까요? 마치 사울왕이 사무엘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고자 남겨놓았다고 말입니다. 분명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하셨는데도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최고로 좋은 제사를 드리려고 진멸하지 않았으니 자기는 어김없이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꾸만 자기들을 위선자라고 질책하시는 것에 대하여 항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만 왜 욕을 먹는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저 시기하고 샘이 나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사회에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선교도 하고 행사도 하는데 돈이 없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라며 구구한 변명을 합니다. 이 건물을 보십시오. 주님. 하나님의 교회는 최고가 되어야 하나님도 높아지지 어떻게 천막이나 지하 컴컴한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좋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길러야 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가 되어야 교회가 무시를 당하지 않겠답니다. 그래서 깨끗한 부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나타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요?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그 날이 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이것이 두 렙돈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면 너무 억지일까요? 제가 유명해 지고 싶어서 억지로 지어낸 것일까요? 사실 과부의 두 렙돈의 기사는 결국 오늘날에도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유대인들처럼 세상 부귀와 가치관을 추구하게 되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처럼 쓸모없는 폐기처분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로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자선사업이나 구제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초대교회처럼 불상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구속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처럼 그 한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갖고 성경적인 복음과 구원에 대하여 가르쳐서 주님 앞에 세워야 하는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단지 교인수만 늘이려고 종교적인 만족감을 고취시켜서 행위로 만족하며 많은 헌금과 십일조 생활로 의무를 다하면 믿음에 합격점을 주는 식으로만 간다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의 제도적인 교회의 전통이 좋고 편안해 보여도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의 구원자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예수께서 사도들을 통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들의 전한 복음은 십자가 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전통이나 규례나 관습이 아닙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으며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과 영생이 주어짐을 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와서 그 십자가의 구속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죄를 씻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누리는데 돈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거치는 것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목적과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날마다 가르치고 떡을 때며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뿐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 너희 목마른 자들은 누구든지 물들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으라. 정녕, 와서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쓰며 배부르지 않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열심히 경청하고 좋은 것을 먹으라. 그리하여 너희 혼이 풍요함 속에서 스스로 기뻐하게 하라.(사55:1-2)
그 명절의 가장 큰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하시니 (이것은 주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직 성령을 주지 아니하셨음이라.)(요7:37-3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마11:28-30)
그들이 성전에서나 각 집안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쉬지 않더라.(행5;42)
오늘 우리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뒤로한 채 사람들을 끌기위하여 그들의 관심에 눈을 맞추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로 모을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들어야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전하지 않는다면 다 헛수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를 통해서 헌금 강조만 하고 있다가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버림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교회들인 성도들 각각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값을 주고 사신 주님의 성도들이 꼭 명심하고 잘 알아서 더 이상 속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 세운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과 직분자들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직분이나 공로나 명예가 아무런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가르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크냐 하고 비교할 건덕지도 없습니다. 내가 뭔가를 했노라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며 과연 성경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고 듣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도 성전 자랑하는 것에서 머무른다면 주님의 마지막 경고마저도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008-09-19. 나그네 칼럼-제 2 호 -
http://cafe.naver.com/pray153/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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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설교(반대)> : 어처구니없는 대다수의 설교의 예
주님이 칭찬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막 12:41-44; 눅 21:1-4)
(출처:http://cafe.daum.net/ilmak / 자료-난해 알고싶은성경)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진심일까, 아니면 재물일까? 복음서에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봉헌합니다.(눅21,1-4) 그 가치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6,21) 누구나 재물은 귀중하며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여인은 기쁨으로 아낌없이 바쳤기에 예수님께서 그 정성에 칭찬 하십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은 가끔 헌금을 강조 할때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소개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그런 뜻에서 여인에게 칭찬을 하셨을까요?
<성경 배경>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면 이방인의 뜰이 있고, 이어서 문으로 들어가면 여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 미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고 가르치신 후 여인의 뜰로 가셨습니다. 여인의 뜰에는 13개의 헌금궤가 있었습니다. 헌금궤 중에 7개는 성전세를 내는 헌금궤입니다. 그리고 6개는 낙헌제의 예물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것들은 나팔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윗부분은 넓고 아랫부분은 좁아서 마치 나팔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이 헌금궤들은 각각 다른 목적을 위해 헌납하도록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물을 위한 곡물, 포도주, 기름 등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희생 제물을 태우는데 사용되는 나무, 제단위의 번제로 드려질 향료, 금그릇 들의 유지비 등을 위한 헌금궤입니다.
헌금궤 중 7개는 성전세를 내도록 한 것이고, 6개는 자유롭게 봉헌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돈을 넣기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팔궤 옆에 앉아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산헤드린과 사두개인, 서기관들과 논쟁하고 질책하신 후 피곤함을 느껴 고개를 떨어뜨리고 계셨습니다.
눅21장 1-2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고 이어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연보궤는 카조퓔라키온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물, 금고라고 번역되면, 헌금궤를 의미합니다. 렙돈은 그리스의 최소 화폐 동전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들은 옷차림으로 구별이 되었을 것입니다.
눅21장 3-4절,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헌금 액수가 아니라 전체 소유 가운데 바친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를 기준으로 가난한 여인의 헌금을 판단하셨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많은 헌금을 바쳤지만 그들의 풍족한 재산에 비하면 적은 양에 지나지 않았고 많은 재산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부를 바쳤기 때문에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입니다. 금전상으로 볼 때 그녀의 헌금은 성전의 재정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헌금을 평가할 때 물질주의나 황금만능주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이 아니고 순수한 신앙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헌금 문제로 상처를 받은 성도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것은 많은 것을 배우게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소재로 풍족한 형식적인 희생과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특히, 이 이야기는 앞 장에서 다룬 바 있는(눅20:45-47) 서기관들의 위선적 경건을 비판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1)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심
성전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명목의 모금함에 헌금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부자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란 뜻으로 도라(dw'ra)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도론(dwvron 은사, 예물, 헌금, 선물) 목적격 복수로 사용된 것으로, 부자의 헌금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연히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보시고'라는 말을 막12:41에서는 에데오레이(ejqewvrei)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의도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누가는 에이덴(eiden)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 예수께서 우연히 과부의 헌금 행위를 접하고 알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서기관들의 자기 자랑과 허영심에 의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것에 비하면, 항상 구제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는 비록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 가난한 과부의 헌금
성경에서 '과부'(chvran 케란)는 가난한 사람으로, 흔히 구제의 대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penicra;n 페니크란)이라는 말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페니크란(penicra;n) 이란 말은 '굽실거리는, 거지 같이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 광범한 의미에서의 가난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과부의 형편이 그만큼 초라하고 옹색하였다는 뜻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금액은 두 렙돈(lepta; duvo 렙타 뒤오)입니다. 이 금액의 가치는 1페니의 1/16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 '빈약한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렙돈' 1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렙돈 1개는 허락하지를 않아 2개를 드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연보 궤는 헌금함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은 많이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의 동전은 아마 요란하게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이때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과부인 그녀는 빈민이었습니다.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는 화폐 중의 가장 작은 단위였습니다. 두 렙돈은 1/64 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입니다.
마가복음서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로마의 화폐단위를 같이 설명한 것입니다. 고드란트는 로마의 화폐단위입니다. 이 여인은 한 렙돈을 내면 되었지만 두 렙돈을 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의 눈에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심지어 그녀는 많이 연보한 부자보다 많이 넣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그녀가 드린 예물은 금전적인 가치는 적었지만 희생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큰 것입니다. 예물의 가치는 그 액수가 아니라 그것을 낸 사람의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의 작은 두 렙돈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한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44절) 부자들의 예물은 풍족한 가운데 낸 것이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서기관의 외식을 설명하시고 이어서 바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설명하셨습니다. 과부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의 부정적인 예를 설명하시고 가난한 과부를 긍정적인 모델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 중에 예배당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는 형식과 습관에 얽매여 예배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일상에서도 윗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외모도 정갈히 하고 의복도 귀중한 것으로 골라 입고 가거늘 하물며 우리를 주관하시는 주님을 예배하러 갈 때에는 어떠한 복장과 어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 삼척동자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할려고 예배당에 가면서까지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가슴에 품고 가면서 주님께 그 무엇을 내어 드리고 무엇을 감사하다고 에배당을 찾는지 한심하다 못해 측은한 마음마저 들 때가 한두 번은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배 자들이 예배에 몰두하는 순간에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전화 벨 소리로 마음이 흩어지게 하는 행위는 어떠한 변명으로 용서가 될는지요? 헌금은 감사한 마음에 주님께 올리는 정성의 표시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은 감사는 물론이며 기쁨과 슬픔 그리고 생명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예물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마음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습관처럼 몇천 원 몇만 원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해방감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예배당 문을 박차고 나가지는 않는지요? 많고 적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한 마음인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은 부자는 나쁘고 과부는 착하는 것이 아니고, 가진 것의 전부가 아니며, 많고 적음이 아니고, 어떤 마음 가짐이냐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의 소유를 전부 바치라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마음가짐이 하나님께 전부를 드릴 수 있느냐? 와 모든 물질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아느냐입니다. 무작정 가난한 과부를 미화 하거나 부자를 배척하려는 뜻이 아니며, 당시에 가진자의 휭포를 지적하면서 많이 가진 자들이 어려운 자들을 괴롭혀서 착취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http://cafe.daum.net/ilmak
마태복음18장 23정-35절에 보면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시대의 헌금도 하나님께 드림으로 복 달라고 거래하는 물질이 아니고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가진 자들은 율법이 정한 자유와 해방을 베풀어야 하였음에도 겉으로만 지키는 척하였고 과부와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야할 물질은 오히려 움켜지고 베풀지 않았고 그 물질로 하나님께 드렸을때 하나님께서는 대노하시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말라기 1장 6절-10절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고후9 :7]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헌금은 기쁨과 감사로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나 자랑으로 내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리는 행동을 하였기에 예수님은 책망하시고 작은 것을 드린 여인이 성경에 기록되며 칭찬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중에는 가난한 자의 몫이 포함되어 있는데 다 내것이라고 하면 주님께서 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물질 안에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할 인금과 구제의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되시길 원합니다.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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