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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동성애에 대한 이해(주제 본문 : 롬1:26-27)

맑은바람청풍 2015. 6. 29. 22:50

 

[단상] 동성애에 대한 이해(주제 본문 : 1:26-27)

 

 

들어가기

 

수년 전, 남자 배우 한 명이 소위 커밍아웃(coming-out: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을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또 남자가 싫어 여자로 성전환수술을 하여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여배우(?)도 있습니다.

 

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당시의 여론은 있을 수 있다는 긍정론과 이해하기 어렵다는 부정론과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이 안됐다는 동정론 등 다양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실 성은 삶의 주요 국면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성욕은 식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강력한 기본욕구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도 성에 대하여 최고의 긍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28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라는 말씀 안에는 성적인 축복까지 포함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을 만드시고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이지요.

 

결국 성이란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이며 인간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은 아름답고 고상하며 즐거운 것입니다.

 

문제는, 이토록 좋은 성이 본질을 벗어나 왜곡되는 일에 있습니다. 남녀 간의 행복을 위해(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아름답게 사용되어야 할 성이, 지나친 욕망으로 말미암아 오용되는 현실에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의 성은 당연히 이성(異性) 간의 활동입니다. 더욱이 이성간의 행위도 그 대상을 엄격히 제한해야 하는 등 극도의 절제가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동성(同性) 간에 적용하는 것을 동성애라 합니다. 동성애는, 의학적으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의심받고 있을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인간창조 목적에 반하는 잘못된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심리적/유전적/생리학적/사회적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연약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이 묵상의 주제가 아니므로 이 정도로 마치고, 성도로써 성의 한가지 왜곡현상인 동성애에 대해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추세 및 주장

 

미국/영국 등 서구에서는 동성끼리의 결혼이 허용되고 있으며(자녀입양까지 허용하고 있음), 심지어 성공회에서는 게이(동성애자)를 주교로 지명 및 인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서도 동성애자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19월에는 교회의 동성애 입장을 다룬 동성애 - 한국교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학술발표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제기된 주요한 주장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시카고 신학대 동성애학 교수 테드 제닝스 : 보수 기독교계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며, 성경의 수천 구절 중 동성애를 언급하는 구절은 5개이고 이 중 2구절만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있다. 성경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면과 양모로 된 옷도 입지 말 것을 명시하는 구절도 있지만 아무도 이 구절에 연연하지 않는다. 유독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구절에만 집착하는 오류는 지적받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가족제도와 사회안정을 강화하는 수단이 됐기 때문에 동성애를 더욱 금기시하는 것 같다.

 

감리교 신학대 강사 홍순원 : 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성애든 동성애든 지금의 인간세계는 타락한 세계이며 동성애라고 더 타락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동성애를 특별히 차별할 권리가 없다.

 

동두천 동성애자 교회 목사 전우섭 : 자신의 성적지향성이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성적지향성은 인간 의지의 문제가 아닌 신의 범위이다. 따라서 특정 성적지향성의 옳고 그름을 인간 세계에서 논의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접근보다 인권적인 접근이 더 필요하다.

 

감리교 신학대 교수 박충구 : 서구는 이미 70년대에 활발한 논의 끝에 정신병리학회와 심리학회 등에서 동성애가 병리현상도 사법처리 대상도 아니라고 결정했다. 민주 시민사회가 동성애자를 동일한 시민으로 인정하는데 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모순이다.

 

보수 기독교계는 이러한 논의 자체를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동성애자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은 참으로 뻔뻔스럽다. 사슴을 말이라 우기는 것 같고(指鹿爲馬) 마치 선악과 이론을 접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억지 주장이지만, 그들의 애로와 논리는 동정심을 불러 일으킬 만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성경은 동성애를 포함한 성문제에 대해 어떤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어떻게 교훈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성과 관련된 부정적 사건과 표현들.

 

하나님께서 아담(남성)과 하와(여성)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남녀 간의 기본적인 성행위는 이성 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조차 이성 간의 성행위가 왜곡된 경우도 많았고(근친상간), 동성 간의 성행위는 물론이요 심지어 동물과의 성행위(수간)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편적인 성관념상 언뜻 수용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아담의 1대 후손들(아들과 딸)은 불가불 근친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꼭 부정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근친결혼은 필연적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친남매(이복 여동생)였습니다. 또 이삭과 야곱도 근친과 결혼했습니다(이삭과 리브가는 5촌 당숙질 사이이며, 야곱과 레아/라헬은 외사촌이면서 7촌간 입니다). 신앙정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지만 여하튼 근친결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19:30-38절에 나오는 롯의 경우는 용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딸들과 육체관계를 맺어 모압족속 및 암몬족속을 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또 롯이 살았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당시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롯을 찾아온 천사와 성관계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때문에 두 도시는 멸망되었습니다.

 

성경은 남성간의 동성애를 남색(男色)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호모(homo) 또는 게이(gay)라고 하지만 소도미(sodomy)라고도 합니다. 소도미는 바로 소돔에서 파생된 말입니다(여성간의 동성애는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합니다).

 

38장에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유다는 과부 며느리인 다말과 성관계를 가져 쌍둥이(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베레스의 족보는 예수님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자위행위라는 용어의 시초가 된 사건도 있습니다. 자위행위를 오나니즘(onanism)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다의 둘째 아들인 오난이 형 엘의 후사를 잇기 싫어서 형수에게 직접 사정하지 않은데서 유래된 말입니다(이는 고엘제도의 한 종류로서 형사취수법 또는 계대결혼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사건의 영적인 의미 이전에, 인간적으로 보면 상당히 부정적인 사례임에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구약 전반적으로(특히 모세오경) 근친상간을 금하는 조항이 무척 많이 나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 이모/고모/남매 사이의 근친상간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어기면 사형입니다).

 

신약은 롬1:26-26이 대표적이며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신구약 전반에 걸쳐 아래와 같은 용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상관(know carnally) = 19:5 (공동번역) 재미보다.

남자와 교합(lie with a male) = 18:22, 20:13 가증한일, 망측한 일.

미동(美童)(the male prostitute) = 23:17-28 미동은 개 같은 자(28).

남창(男娼)(the perverted person) = 36:14

남색(男色)하는 자(the perverted person) = 왕상14:24, 15:12, 22:46.

탐색하는 자(homosexuals) = 고전6:9

남색하는 자(sodomites) = 고전6:9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함.

 

 

성경전문가의 견해

 

1:26-27절은 동성애자들과 반대자들 간의 논쟁의 대표적 구절입니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 목사는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로마서 강해’ pp.91-94 참조).

 

26절은 여성 간의 동성애를, 27절은 남성 간의 동성애를 말하고 있으며 성경은 부끄러운 욕심(rile passion)’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이 밝히는 현대 동성애론자들의 논증과 변론은 이렇습니다.

 

본문의 목적은 성윤리를 가르치려는 것도 악을 드러내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를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를 정죄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변론 : 사실이지만 어떤 성적 행위를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바울은 단지 소년과의 남색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 및 로마 세계에서는 다른 형태의 남성 동성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관련된 소년들이 겪는 수치와 그들에 대한 착취 때문에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다.

 

변론 : 본문 자체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암시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의문이 있다. 어떤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관계를 부자연스러운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러한 관계가 그들에게는 전적으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변론 : ‘자연이라는 명사를 나의자연(천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또한 자연스러운’(kata physin)이라는 형용사를 나에게 자연스러운이라는 의미로 멋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와 반대로 자연스러운’(physin)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의미한다. ‘자연에 거슬러행동하는 것이란 하나님이 설정하신 질서를 위반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 자연에 따라행동하는 것은 창조주의 의도에 따라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성애를 보는 바람직한 성도의 시각.

 

사실상 동성애란 도덕적/의학적으로는 물론 성경적으로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성 개념입니다. 특히, 세상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 내에서조차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문제이며, 나아가 신앙지도자인 신부나 목사로 인준(안수)하는 것은 오히려 비판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분명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연약성을 생각할 때,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성도는 동성애자 및 동성애 목사 안수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성애는 성경이 금하고 있는 죄악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동성애론자들이 어떠한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이는 성경을 곡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 동성애를 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동성애에 대하여 용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 소결론 :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가 성행하고 있는 현실을 마냥 부정만 하기 어렵습니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동성애의 원인을 유전설, 신체적 결함설, 유혹설, 성적 격리설, 호르몬 비조화설, 결손가정환경, 사회적인 환경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연약성이라고 봅니다. 왜곡된 성의 쾌락과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동성애자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절대적인 유혹이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일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배치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동의해서는 안 되지만 불쌍히 여기고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최선의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만약 동성애자가 교회에 등록한다면 우리는 최대한의 사랑과 인내로써 선도하도록 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 소결론 : 성도가 재판관의 입장에서 정죄할 수는 없으며 선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편, 동성애자를 신앙 지도자(신부/목사)로 세우는 문제입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신앙 지도자는 신앙과 인격과 행동 등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 세상적으로도 정상이라 하기 어려운 동성애자를 지도자로 받아 들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 소결론 : 동성애자를 신앙 지도자로 임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로 당사자 위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성애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중의 한 가지는, 동성애 커플에게 입양권을 줬을 때, 그 입양된 아이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입양아들이 부모(?)인 동성애자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느끼는 도덕적 모멸감과 수치심은 누가 보상을 할까요? 어른들의 자유만 주장하고 아이들의 권익은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요?

 

아닐 것입니다. 힘 있는 어른들의 편의주의적 생각일 뿐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자녀 입양권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허용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 소결론 : 동성애자의 자녀 입양은 허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나가기

 

그렇습니다. 인간의 성문제는 현대는 물론이고 고대에도 늘 골칫거리였습니다. 참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다루기 어려운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더 타락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동성애자들의 주장은 잘 소화해야 할 논제입니다. 이해될 듯한 면이 있는 항변이지만, 그러나 잘못을 잘못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타락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도는 동성애를 기본적으로 인정해서는 안 되지만, 인간의 연약성을 고려하여 때론 이해하고 선도하는 유연한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다만, 신앙 지도자로 세우는 문제와 자녀 입양의 문제 등은 반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 성 문제 - 성경의 조명을 받고 깊이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각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마치겠습니다. 나름대로 더 깊은 묵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자료> 동성연애(同性戀愛 ; 男色 ; Sodomy)

(출처 : 존 스토트 로마서 강해’ pp.91-94)

 

 

어휘

 

남색하는 자(the perverted person) ; 왕상14:24, 15:12, 22:46.

 

남창(男娼) (the perverted person) ; 36:14.

 

남색하는 자(sodomites) ; 고전6:9, 딤전1:20.

 

상관(相關)(know carnally) ; 19:5 후일 sodomy라는 말이 파생됨

 

 

동성애 논쟁의 대표적 근거 구절 = 1:26-27

 

여성간의 동성애(26) 및 남성간의 동성애(27)

 

동성애는 부끄러운 욕심(rile passions)

 

순리대로 : () 피시코스(physikos)

역리로 : () 파라 피신(para physin)

 

현대 동성애론자들의 논증과 변론

 

본문의 목적은 성 윤리를 가르치려는 것도 악을 드러내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를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를 정죄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 변론 : 사실이지만 어떤 성적 행위를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바울은 단지 소년과의 남색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로마세계에서는 다른 형태의 남성 동성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관련된 소년들이 겪는 수치와 그들에 대한 착취 때문에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다.

 

* 변론 : 본문 자체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암시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의문이 있다. 어떤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관계를 부자연스러운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러한 관계가 그들에게는 전적으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 변론 : ‘자연이라는 명사를 나의자연(천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또한 자연스러운’(kata physin)이라는 형용사를 나에게 자연스러운이라는 의미로 멋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와 반대로 자연스러운’(physis)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의미한다. ‘자연에 거슬러행동하는 것이란 하나님이 설정하신 질서를 위반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 자연에 따라행동하는 것은 창조주의 의도에 따라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무리

 

동성애론자들의 주장의 근거는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동성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동성애론자들은 성경을 엉뚱하게 왜곡할 뿐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동성애’, 한국교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 참조). 그러나 이는 상실한 마음(1:28)이요 죄악에 대한 묵인(1:32)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밝히는 바 그대로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느끼지 못하는 현상인 것이다.


결혼(가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성한 제도이다. 그리고 이는 남성과 여성 즉, 이성간의 연합으로 제정되었다(2:24, 19:4). 하나님은 오직 이성간의 한 몸을 의도하셨으며 동성끼리 짝을 맺는 일은(아무리 애정이 깊고 헌신된 관계라 주장한다 할지라도) ‘자연에 반하는것이며 절대로 결혼에 대한 타당한 대안으로 간주될 수 없다.

 

 

 

 

 

 

 

<자료> [안티]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야

(출처:미기록)

 

누누이 말하는 얘기지만 성경은 인간에 의해 계획된 단발적인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과 경륜 아래, 인간로 편집된, 그분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여느 문서와 같이 한사람이나 한팀에 의해, 한때에, 일관성있게, 잘 편집되어 좀더 정돈되어 그럴싸하게 꾸며졌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분의 책은 아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아주 아주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 의해, 아주 아주 다른 사건과 경우들을 배경으로, 아주 아주 다른 문체와 형식을 빌어 작성된, 그야말로 그 편집된 사실 자체가 신기할 만큼 경이로운 책이 바로 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같은 사건 같은 경우가 등장 인물만 바뀌어 나오는 것도 같고, 혹은, 동일 인물에 대해 묘사한 글인데도 앞뒤가 좀 안맞는 것같기도 하고, 그야말로 취약하기 그지 없지만, 어떠한 가감도 없는 이런 미숙한 편집이야말로 각 진술의 신뢰도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부여하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진위 가치는 너무도 명쾌하기만 합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무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유가 바로 예 있으니, '편집의 내츄럴' 인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그것도,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여러 사람이, 존재하던 공간도 다르고 시간도 다른 여러 사람이, 각각 진술서를 써놨는데 세부 묘사에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그 뜻은 다 똑같애 ! 신기하지 않은가 !

 

사무엘권과 권은 그러한 미비함이 돋보이는 문서 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이 수금타는 직무로 출근 하다가(삼상16:23) 골리앗과의 싸운 시기는 분명 '소년'때인 것처럼 보이는데 금세 군대의 높은 직급이 되고-소년이 영웅은 될수 있다치더라도 고급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음- 그런가하면 왕의 수금타는 일을 했다면 왕이 그를 모를리 없을텐데 골리앗과 싸워 이긴 후에 '제가 누구냐, 누구네 집 애냐???'라고 하기도 하고...(삼상17:55)

 

게다가 싸움에서 이긴 직후에 왕 앞에 섰을 때, 웬 난데없는 요나단과 마음이 교통??

 

, 바로 요부분입니다. Anti-Christian들이나 동성애자들이 붙들고 싶어하는 부분이 바로 요부분 입니다. 우선 성경 본문을 나열해보겠습니다.

 

18:1 After David had finished talking with Saul, Jonathan became one in spirit with David, and he loved him as himself. (1Samuel18:1,NIV,thePowerBible)

 

18:1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聯絡되어 요나단이 그를 自己 生命 같이 사랑하니라 (사무엘상18:1,CMV,thePowerBible)

 

18:1 And it came to pass, when he had made an end of speaking unto Saul, that the soul of Jonathan was knit with the soul of David, and Jonathan loved him as his own soul. (1Samuel18:1,KJV,thePowerBible)

 

사울에게 사령보고가 끝난 후에 난데없이 마음이 연락되었다니...이 문장만 놓고보면 눈이 맞은 것처럼 보일만도 하죠? -_-;;

 

위의 3개의 역본에서 보시면 알겠지만, NIV와 한글개역 성경은 그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리만큼 문장이 축약 되었습니다. 단지, 그저, '죠나단과 데이빗이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요나단이) 자기 자신처럼 (다윗을)사랑했다(?)' 라고만 되어 있으니 문법적으로는 쉽게 번역된 것이지만 그 진의(眞意) 자체가 축약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겁니다.

 

KJV는 히브리 원문에 매우 충실히 번역되어 '요다단의 ()혼과 다윗의 ()혼이 knit 되었다'고 각구()의 생략없이 다 써줬습니다. , 그리고 너무도 중요한 키워드가 하나 발견 됩니다. 바로 knit라는 단어 입니다. 한글개역에서는 '연락(聯絡)'이라고 해석된 was knit의 용법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knit의 뜻은 '(실을) 뜨다, 짜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쓰인 was knit와 같은 용법은 구약에서 약 44번이 나오는데 원래 히브리 원어와 더 가까운 낱말은 bind together(함께 묶였다)입니다. 그러나, KJV의 번역자는 더욱 풍부한 영감과 영문학 실력을 바탕으로 knit라는 단어를 채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 용법들 중 특이한 것을 몇개만 우선 골라보겠습니다.

 

창세기 4430절의 유다가 말하는 부분입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붙잡아 두려고 하자 유다가 나서서 말하는 부분 말입니다.

 

44:30아비의 生命과 아이의 生命이 서로 結託되었거늘 이제 내가 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창세기44:30,CMV,thePowerBible)

 

44:30 Now therefore when I come to thy servant my father, and the lad be not with us; seeing that his life is bound up in the lad's life; (Genesis44:30,KJV,thePowerBIble)

 

사무엘18:1'was knit(연락)' 'is bound up(결탁)'은 분명 다른 어휘지만 히브리 원어에서는 둘다 똑같은 어휘를 어근으로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구체적인 해설은 좀 있다가 하기로 하고 또다른 표현 하나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15:31이 다윗에게 하되 `압살롬과 함께 謀叛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컨대 아히도벨의 謀略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사무엘하15:31,CMV,thePowerBible)

 

15:31 And one told David, saying, Ahithophel is among the conspirators with Absalom. And David said, O LORD, I pray thee, turn the counsel of Ahithophel into foolishness. (2Samuel15:31,KJV,thePowerBible)

 

압살롬의 쿠테타에 아히도멜이 포함되어 있다고 다윗에 고하는 장면입니다. 처음에 나왔던 'was knit' 가 이번엔 'is among the conspirators(모반한 자들 가운데)'라는 표현으로 씌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히브리 원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찾아보면 아래의 요나단에게 퍼붓는 아버지 사울의 분노찬 대사 속에서도 같은 어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22:8너희가 다 共謀하여 나를 對敵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盟約하였으되 내게 告發하는 가 하나도 없고 나를 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臣下煽動하여 오늘이라도 埋伏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告發하는 가 하나도 없도다'

 

22:8 That all of you have conspired against me, and there is none that sheweth me that my son hath made a league with the son of Jesse, and there is none of you that is sorry for me, or sheweth unto me that my son hath stirred up my servant against me, to lie in wait, as at this day?

 

정리해보면, NIV와 한글 성경에서는 요나단과 다윗이 특별한 감정으로 '연락(聯絡)'된 것같은 뉘앙스로 누명을 씌울 경우 진의를 설명해 줄 길이 없지만 히브리음으로 '-'라고도 하는 이 어휘의 사용범위는 주로 '동맹'인 마음의 결탁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전혀 적인 마음의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하면, 앞의 인용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엄마 얼굴도 모르는 어린 베냐민을 향한 늙은 야곱의 강한 연정의 결탁' 혹은 '쿠테타 일으키는 사람들의 동맹된 마음' 처럼 어떤 강한 결속력의 심상을 표현할 때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히브리어로 ' [kaw-shar]'라고 하는 이 단어는, bind together(=knit)로서 '함께 묶다, 짜다'의 뜻도 되지만 conspire 와 같은 '공모,모반'의 뜻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성이나 동성간의 性的 마음의 교통이나 결속이라는 것은 너무 허무맹랑한 상상인거죠. 문학적인 관점의 해석을 추가 하자면 사무엘上下권의 저자는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에 대해 모반된 마음이라는 것을 애써 미리부터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Anti나 동성애자들이 붙드는 또 한 구절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바로, 다윗의 시() 부분입니다.

 

1:26요나단이여 ! 내가 그대를 哀痛함은 그대는 내게 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寄異하여 女人의 사랑보다 하였도다 (사무엘하1:26,CMV,thePowerBible)

 

1:26 I am distressed for thee, my brother Jonathan: very pleasant hast thou been unto me: thy love to me was wonderful, passing the love of women. (2Samuel1:26,KJV,thePowerBible)

 

, 한글성경을 요것만 떼어놓고 보니까 어떠세요? 진짜, 심각하죠? ^^

 

다윗은 정치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하나님께 시와 찬양으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가 무엇인지는 굳이 그 쟝르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로 읽어줘야 합니다. 그것을 단어와 단어, 주어와 동사를 따져가면서, 이러 이러하니 이런게 아니냐는 식의 관찰을 하려드는 것은 참으로 딱한 것이지요. 그래도 문제를 제기 하니 한번 따져보도록 하죠.

 

시편을 보면 다윗의 詩語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는데 평소에 그가 사용하는 부드럽고도 강한 필체를 감안하면 사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내용입니다. 다만, 개역성경의 번역에 있어서 '기이하다'는 부분이 조금 모호한데 그것은 '이상스럽다'는 뜻의 '기이함'이 아니라, 놀랍다,경이롭다(wonderful)는 뜻의 옛 구어일 뿐, 예수님을 '기묘자(Wonderful;9:6)' 로 표현한 경우가 'Wonderful'의 마땅한 한글 명사형이 없어서 중국식 한자 용어를 골라 쓴 말인 것처럼 여기서도 한자식 표현에 너무 집착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은 이런말을 안쓰지요. (보수적인 개역성경은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중국식 한자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pleasant'아름아움'이 아니라, 기쁜/유쾌한 등의 뜻으로 바꿔야 더 정확할 것같구요. 어차피 히브리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한글로 걸어나온 다윗의 詩語이기 때문에 정답을 운운할 수 없지만 정확한 것을 굳이 따지자니 하는 말입니다.(이런 이유땜에 출판사들이 번역서 장사는 안하는 겁니다 ^^)

 

는 다른 산문과 달라서 그 나라, 그 민족적 감성이 없이는 100% 느낄 수도 없고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아래와 같이 바꿀랍니다. ^^

 

1:26요나단이여 ! 내가 그대를 哀痛함은 그대는 내게 아름다움이라 기쁨이었고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奇異하여경이로워 女人의 사랑보다 하였도다 (사무엘하1:26,CMV,thePowerBible)

 

그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다는 사실 때문에 '기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은 경이로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여인들의 이성의 사랑보다도 '더 초월적이다'라는 뜻인거지요. 다른 시편의 들과 마찬가지로 그 영감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男子에게 있어서 女性으로부터 받는 사랑보다 더 초월적인게 뭐가 있습니까? 父母? 그럼 장가들 가지 말아야쥐~^^ 바로 그런 방향의 일 뿐인 것입니다.

 

, 이것으로써 그들의 우정이 어떤 종류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nti나 동성애자들이 이부분들만 오려내어 자기네 맘대로 봤던 이유는 ???

 

뭐 눈에는 뭐 밖에 안보인다더니...-_-;;

 

가끔, 성경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부류들을 보면 '말씀'의 거대한 덩어리를 보지 못하고 대부분이 이와같은 '역본'의 쪼가리(?)들에 매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끼는 거죠.

 

다윗은 정권에 잡는데 성공한 이후 요나단의 혈육을 찾습니다. 불구자가 된 그의 혈육 므비보셋을 높여 자기 아들과 같은 위치로까지 격상시켜 줍니다.

 

동성애를 그리워서 그렇게 보상한 것일까요? Anti와 동성애자들의 상상처럼 정말로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율법에서도 금기하는 마당에 오히려 숨기고, 감추고, 지우려고, 애쓰는게 인지상정 아닐까요? 게다가 당시 그는 이미 정권도 다 잡은, 아주 높은 위치의 이었기에 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돌본 것은 '동성애'가 아닌 '동지애(was knit; [kaw-shar])'로 말미암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