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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040] 예수님은 십일조를 부정하셨다?!

맑은바람청풍 2016. 11. 22. 20:50

[의문 040] 예수님은 십일조를 부정하셨다?!

 

 

23:23-24(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무척 도전적인 제목입니다만,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십일조 논쟁을 재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 어떤 논리를 펼지라도, 오직 성도 개개인이 자신의 신앙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행위인 십일조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민감한 주제를 다시 거론하는 이유는, 가끔 방문하는 개혁성향(당연히 십일조 반대) 카페에서, 아주 재미있는 견해를 발견했고 얼핏 읽을 때 동의되는 바가 있는 듯하여,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출처는 http://cafe.daum.net/outsideletters / 십일조와 헌금 십일조-해석오류와 왜곡번역의 결정판(23:23)”입니다(별지 참조).

 

 

오늘 본문은 십일조옹호론자들이 예수님께서 신약 십일조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신 쐐기 구절 중의 하나로 즐겨 인용하는 곳입니다.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라(행하라).”라고 해석합니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요.

 

반면, 위 카페의 글은 정반대의 견해를 주장합니다. 읽고 이해한 요지는 이렇습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메 아피메나이)아피에미버려두다, 두다.’의 뜻이지만 용서하다, 사하다.’라는 뜻도 있다.

 

바로 앞의 버리다.”와 동일한 단어이므로 뒤의 아피에미도 무심코 버리다.”로 번역하는 오류를 범했다.

 

신약에서 70% 이상은 사하다.”로 사용되는 바(:주기도문) 여기서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로 번역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문맥상 정황을 고려할 경우, 하루살이는 하찮은 것약대는 중요한 동물이다. 박하 등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호들갑 떠는 외식은 용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울러 화 있을찐저……용서하지 말라.”가 자연스러운 문맥이다.

 

결론적으로 23절은 이것(의와 인과 신)은 행하고 저것(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은 용서하지 말라.”로 번역해야 한다.

 

 

신약성경에 143회 나오는 아피에미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 가게하다. 보내버리다.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 버리다. 버려두다. ~하게 하다. 용납하다.

 

문자적 의미에서 아피에미버리다.’용서/용납하다.’ 중 어느 것으로 번역하더라도, 일차적으로 잘못은 아닙니다. 모두 가능한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맥을 검토할 수밖에 없습니다(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문맥 검토를 할 경우, 위 글의 필자 견해가 훨씬 타당할 것입니다. 중복되겠지만 다시 한번 반복해 봅니다(위 필자의 견해에 대한 동의를 확인하는 과정이 되겠지요).

 

먼저, 잠시 이것’(the later)은 앞 문장의 가까운 것을, ‘저것’(the former)은 먼 것을 받는다는 영문법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까운 의와 인과 신을 지칭하고 저것은 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지칭합니다. 아주 명백한 문법입니다. 일차적으로 이것=의인신, 저것=십일조로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24절과 연계해 봅니다. “하루살이이것이요 약대저것인가 아니면 하루살이저것이요 약대이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하루살이는 하찮은 것, 별 것 아닌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약대는 사막에서 아주 중요한 동물입니다. 하루살이와 약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결국 이것=의인신=약대, 저것=십일조=하루살이로 정리하는 것이 필연일 듯싶습니다.

 

걸러내다”(디윌리조)철저히 걸러내다.’의 뜻으로서 철저하게 지키다.’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확대해석한다면, 외부적으로 보이기 위해 아주 철저히 시행한다는 의미라 할 것입니다.

 

한편 신약에 7회 나오는 삼키다.”(카타피노)삼켜 버리다. 취해 곤드라지게 하다.’는 뜻으로서, 거의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벧전5:8; 고후2:7; 고후5:4; 11:29; 12:16 ). 이 또한 확대해석한다면, 내부적으로 감추어 버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화를 당할 외식의 천재요 소경된 인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저주)으로서, 이런 뜻이지 싶습니다.

 

<‘저것’(=십일조=하루살이)은 외부적으로 보이기 위해 철저히 걸러내고(이행하고), ‘이것’(=의인신=약대)은 내부적으로 보이지 않게 감추어 버리는(이행치 않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것’(=의인신=약대)은 행하고 저것’(=십일조=하루살이)은 용납하지 말아야 할찌니라.>

 

결론적으로, “이것(의와 인과 신)은 행하고 저것(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은 용서하지 말라.”는 위 필자의 주장에 공감되는 바 크며 따라서 동의하고 싶습니다.

 

 

이의 : 신약의 십일조 쐐기 구절인 마23:23절을 위와 같이 이해해도 무방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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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십일조-해석오류와 왜곡번역의 결정판(23:23)

(출처 : http://cafe.daum.net/outsideletters / 십일조와 헌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위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 헬라어 '메 아피에나이'. '아피에미''버려두다. 두다'의 의미도 있지만, '용서하다. 사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할 때의 '사하여'에 해당한다. 신약성경의 70% 이상은 이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증거는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다. 물론 '버려두다'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앞에 있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할 때의 '버렸다'가 동일한 '아피에미'이다. 앞에서 '버렸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해서 뒤에도 동일한 의미로 쓰였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번역한 것이 결정적 오류를 일으켰다고 본다.

 

거기에 영어의 not에 해당하는 부정어 ''가 앞에 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버리지 말라'로 해석하고 번역한 것이다.

 

~ 이 치명적인 오류를 어찌 수정할 것인가. 근본주의 기독교는 철저히 자기 구미에 맞게 성경의 왜곡을 지속해 왔다. 물론 의도적인 왜곡이라기 보다는 무지의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는 것이 문맥을 통해서도 정당한 까닭은, 그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대표적인 외식이기 때문이다. 2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유를 살펴보라. 하루살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며, 약대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비유에서 하루살이는 '하찮은 것, 별것 아닌 것'에 해당한다. 하루살이를 만나본 경험이 있는가. 그것은 정말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저 귀찮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에 비하면 약대는 사막을 끼고 있는 중동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동물이다.

 

이 성구가 강조하려는 것은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이 외식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버려두고 별 것 아닌 하루살이같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노라고 호들갑을 떠는 그 같은 외식에 대해서는 결단코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 마 23:23이 강조하고자 하는 대의다. '화 있을진저..........용서하지 말라' 는 게 자연스러운 문맥이다.

화 있을진저 해놓고서 그렇지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얼버무리는게 자연스러운 문맥이라고 보는가. 화 있을진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가. 그렇게 엉거주춤한 표현은 마태복음 23장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23장은 매우 단호하고 엄격하다. 한문장 한문장 속에 회칠한 무덤과 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질책하고 있는 언설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비춰보더라도 '~용서하지 말라' 의미가 더욱 정당하다.

 

이 구절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해석하고 번역하면서 예수께서 물질()의 십일조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았다고 줄곧 가르쳐 온 교회.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무색케 한다. 말씀대로(?) 행하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박하, 회향, 근채같은 아주 작은 것 까지 철저히 계량화해서 십일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같은 외식과 종교적 자부심에 대해 질타하고 계신 것이다. 본질과 그림자가, 주객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여! 그대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강조하면서 더 중한바 공평(크리신)과 긍휼(엘레오스)과 믿음(피스틴)은 내팽게 치는구나. 사람에 대해 동일하게 대하려는 크리신이 없고, 인간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려는 긍휼이 없고, 더더구나 믿음은.............

 

이것(의와 인과 신)은 행하고 저것(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은 용서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