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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거짓말은 죄악인가?

맑은바람청풍 2015. 6. 30. 19:15

[묵상] 거짓말은 죄악인가?

 

 

[본문 = 삼상16: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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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육이오 동란 때 어떤 목사님이 국군 패잔병 한 명을 다락에 숨겼답니다. 곧이어 인민군이 와서 이곳에 국방군을 숨기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목사님은 성도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기에 고민하다가 마루 바닥을 발로 차며 여기에는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 ‘마루 밑에 없다는 뜻일 뿐 다른 곳에도 없다는 말은 아니므로 거짓말이 아니다라는 나름대로의 위안을 표현한 말입니다.

 

성도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참 말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20:16, 19:11). 그런데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성경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시고 상황은 거짓말이 절대 필요하니 말입니다. 판단이 용이치 않은 주제일 것입니다.

미리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예화에 나오는 목사님처럼 고민할 것도 없이 아주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직설적이고 그간 배운 바와 많이 달라 이상한 결론이지요? , 이제부터 성경을 상고하며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때, 다윗의 형들을 면접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은 본문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묵상하는 방법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거짓말의 사례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거짓말은 하와를 유혹한 사단입니다(3:1-5).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가인입니다(4:9). 이 부분은 오늘 묵상의 목적과 일치되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별도로 묵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두 번씩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12:10-20, 20:1-7). 사실상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에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20:12).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를 본받은 이삭도 그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입니다(26:6-11). 사실 리브가는 이삭의 5촌 여자조카이기 때문에 누이라고 한 것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현재의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한 것은 의도적인 거짓말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도 거짓말에는 재능이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이라는 용어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경 인물은 아마도 야곱일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의 인생 전체가 거짓말로 점철되었다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정도로 야곱은 거짓말의 대명사입니다.

 

때로는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속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굵직굵직한 것만 살펴봐도,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일(25:27-34),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챈 일(27), 외삼촌 라반의 양을 속임수로 자기 것으로 만든 일(30:25-43), 제일 사랑하는 라헬과 그의 아들 요셉은 뒤에 두고 다른 부인들과 하인들은 앞세운 일(33:1-2) 등등 이루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야곱의 일생 자체가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며 속임수가 중요한 생존수단의 일부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도 거짓말과 무관한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38장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윤리적으로도 비난받을 만한 사건이 나옵니다. 원래 유대민족은 형이 후사(후손)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죽은 형의 기업을 이어야 합니다. 이는 고엘제도의 일종으로서 형사취수법 또는 계대결혼이라 합니다.

 

유다는 아들 엘과 오난이 후사 없이 죽은 후 셋째 아들 셀라를 며느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혹시 셀라도 죽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말은 창녀처럼 꾸며서 시아버지를 속이고 그와 관계를 맺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를 낳습니다. 지극히 의도적이고 질이 나쁜 거짓을 행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레스는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되십니다(1:3). 뭐라 평할 수 없는 그런 사례라 하겠습니다.

 

1:15-22에 보면 애굽 왕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을 어기고 거짓말로 이스라엘 남자 신생아를 살리는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나옵니다. ‘왜 살렸느냐는 바로의 추궁에 대해, 산파들은 유대 여인들이 건강하여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출산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19).

 

분명 자기가 아이들을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이들의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됩니다(17-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여하튼 이들 산파도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2:1-7절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거짓말은 정말로 압권입니다. 용납할 수 없으리만큼 그 정도가 심합니다.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 2명을 자기 집에 숨겨놓고는 이미 떠나갔다고 거짓말 합니다.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족속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를 침공하려는 적입니다. 적군의 스파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나쁜 죄입니다. 라합은 이처럼 아주 질이 나쁜 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임진왜란 때 우리의 할머니 중 한 분이 라합처럼 했다면, 아마도 우리 역사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녀로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을 것입니다. 구한말의 매국노 이완용이와 똑같은 평가와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라합은 분명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녀입니다. 단순히 거짓말만 한 것이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은 여인, 그것도 손가락질 받는 기생을 이렇게 높게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라합은 예수님의 직계 조상 할머니가 됩니다(1:5).

 

사무엘 상 21장에 보면 위대한 왕 다윗의 파렴치한 속임수가 나옵니다.

 

먼저 1-9절에서는, 다윗이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거짓말로 속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는 다윗이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해 목숨을 구걸하던 시기였습니다. 제사장이 놀라서 묻습니다. “왕의 장군이 왜 혼자 다니느냐?”(1). 다윗은 버젓이 거짓말을 합니다. “특수임무를 명받아 부하들은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뭐든 달라”(2). 제사장은 일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항용떡은 없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뿐이지만 군사들이 여인과 함께 하지만 않았다면 진설병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거룩한 떡을 가지고 가서 먹습니다. 거짓말로 제사장을 속인 것이지요. 물론 이로 인해 얼마 후 제사장과 그 가족은 사울 왕에게 전멸을 당하고 맙니다. 거짓말의 대가치고는 참으로 엄청난 대가를 다른 사람이 치릅니다.

 

곧 이어 가드로 도망간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짓을 하여 그들을 또 속입니다(10-15). 훌륭한 장군인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아기스의 신하들이 주장하자 다윗은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체 합니다. 죽음을 초월한 장군으로서, 그것도 이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의 처신이라고 믿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체면을 사정없이 구겨버렸지만 이로 인해 다윗은 목숨만은 건집니다. 그래도 치사한 것 같지요? 아무튼 다윗이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9:3-27절에는 기브온 거민들의 거짓말이 나옵니다. 이들은 진멸을 당해야 할 가나안 족속이지만 아주 슬기로운 기지로써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속이고 그 결과 목숨을 건집니다. 거짓말로써 살아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신 예수님께서, 미래를 대비할 줄 아는 슬기로운 청지기의 교훈을 우리에게 재차 강조하신 것으로 압니다(16:1-8). 청지기는 불의했고 또 거짓으로 빚을 조작했으나(아주 악의적인 이중장부를 만든 것입니다), 주인으로부터(예수님으로부터) ‘지혜롭게 행했다고 칭찬’(16:8)을 받았던 것입니다. 깊은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만 여하간 겉보기에는 역시 거짓말과 거짓 행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건들입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례도 있습니다. 인간이야 아무리 위대하다해도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이라고 이해할 여지라도 있다하겠으나,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까지 거짓말과 연루된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도 있기 때문입니다. 송구스럽지만 몇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더 묵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23:3절에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진군을 방해한 죄에 대한 추상같은 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3:19절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라는 말씀처럼 거짓말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에 비추어 본다면,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교회)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룻기를 보면 황당해집니다. 유대 여인 나오미의 며느리는 분명 모압 여자입니다(1:4). 게다가 룻이 그냥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지만, 룻은 보통 여인이 아니라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며(4:17) 이는 바로 예수님의 할머니가 된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400여 년 전에 하신 말씀(23:3)을 까맣게 잊으시고 룻을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게 하셨을까요? 문자적으로,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신 것이라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그런 예가 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욥의 경우입니다(1-2). 하나님께서 공연히 욥의 믿음을 자랑하시다가 사단과 내기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기에 그렇다는 사단의 거짓말에 하나님은 그대로 속아 넘어가십니다(표현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게 되지요. 욥의 경우를 꼭 거짓의 사례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하나님께서 괜히 사단과 내기를 하시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욥을 속인 것이나 진배없는 사례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왕상22:19-23절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 아합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의 입에 보내십니다. 거짓말하는 영을 통해 거짓말을 믿게 함으로써 아합을 죽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이중으로 활용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과 거짓이 연계되어 있다?’ 참으로 민망한 생각입니다만, 성경이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하겠습니까?

 

7:1-10절은 예수님도 거짓말을 하신 것처럼 보이는 아주 민망한 구절입니다.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님의 친동생들(후일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기록한 동생들 포함)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들어 내놓고 사역을 하라며 예수님을 비방하며 비웃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며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가서는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10). 조금 전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시고는 바로 이어 가만히 올라가셨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든 거짓말의 사례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친동생들에게는 분명 거짓말 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정말 민망한 구절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조수현 목사님의 설교(별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대하는 성도의 기준

 

성경의 특성 가운데 한 가지는, 성경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난처한 사례들도 무척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성적인 잘못, 배신행위, 실패 등등은 물론이려니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짓말에 대해서도 때로는 묵인한 것도 같고 때로는 조장한 것도 같은 사례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제 성도로써 거짓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예화에 나오는 목사님처럼 무조건 거짓말은 안돼!’라는 생각으로 상황은 고려치도 않고 참 말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르게 나타나야만 할까요?(국군 패잔병의 죽음).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다르게 말씀하신다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두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먼저는, 거짓말이란 누구와 관련된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냐 아니면 사단과 관련된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8:44절은 이에 관해 확정적으로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단(마귀)이 곧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처음부터거짓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거짓말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도 없으신 분이십니다!(6:18) 심지어 욥이나 아합의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거짓을 이용하여 사단을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잘 보십시오. 욥이나 아합의 경우, 모든 것은 사단의 단독적인 판단과 처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생각에 동의하시거나 묵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뛰어 넘을 수 없었습니다. 부처 손바닥 안에서 재주부리는 손오공 같다고나 할 것입니다.

 

욥은 의인이었기에 결국 그 의가 증명되었고(42), 아합은 불의한 자이었기에 불의가 나타난 것뿐입니다(왕상22:35).

 

하나님께서 거짓말에 속으시거나 묵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하실 뿐입니다. 단지 사람이 그 안에서 허우적댈 뿐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22:11).

 

한 마디로, 거짓말은 하나님과 연계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단과 연계된 것이며 이것이 사람에게까지 영향(죄의 형태로)을 미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성도로써 불가피하게 거짓말이 필요하다면 신앙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 괴상한 결론이지요? 비록 평소 생각과 다른 결론이지만 이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대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하나님은 과연 내가 어떻게 말하기를 바라시는가?’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에 부합되는 것을 말하면 이는 거짓말이 아니라 참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원칙은 다소 막연하므로, 실제 적용상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천요령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내 욕심/이익을 위한 거짓말은 일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 잘못하면 구원을 상실할는지도 모릅니다.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때로는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해야만 합니다. 라합처럼, 룻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의도적으로라도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이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 이들의 거짓말로 인하여 성도의 목숨이 건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일에 쓰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성도의 목숨이나 우리 믿음의 궁극을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 의무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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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성도로써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은 나쁜 죄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펴본 바와 같이, 때로는 거짓말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절대적으로 거짓말을 입에 올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해야만 합니다. 그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성도라 했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뜻(심정)’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다른 성도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벗어난 잘못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짓말에 관한 하나님의 본심은 근본적으로 거짓된 사람들의 계획과 말에 얽매여 참된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는 것을 옳다 하지 않으시며, 인간적인 시각에서의 거짓말의 기준을 뛰어 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존하는 것을 우선하신다.’는 것입니다!

 

, 거짓말은 사람들(궁극적으로는 사단)과 관련된 것이지 결코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사람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으시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마음 중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비록 겉보기에는 거짓말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른 성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 가슴을 찢으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성도의 아픈 선택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 이것이 성도의 마음 중심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마음껏 거짓말을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인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했고 이것이 오히려 그녀의 놀라운 하늘나라의 상급이 되었던 것입니다(사실 라합은 신명나게 거짓말을 했으며 만약 그녀가 인간적인 판단으로 말 했더라면 그녀도 여리고와 함께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산파도 다윗도 라합도 모두 모두 거짓말쟁이거나 매국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심(本心)을 읽을 줄 알았던 하늘나라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주제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충분한 묵상은 아니었을 지라도 약간의 의미는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조그만 깨우침이었으나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전진해 나간다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리라 믿으며 줄입니다. 샬롬.

 

 

 

 

 

 

 

 

별지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셨는가?(7:1-10)

(출처 : 조수현 목사 / http//biblestudy.co.kr / 바이블스터디 27)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때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올 터인데 "자신을 나타내려면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십시오" 라고 하면서 초막절 지키러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7:8-9)

 

주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만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 10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참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옵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조금 전에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라고 말씀하셨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금방 비밀리에 올라가셨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도 일구이언하시는 것이 아닌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도 이 대목에서 갸우뚱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그러나 여기 보면 분명 형제들을 속인 것으로 되어 버렸으니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6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라고 하시며 예수님의 때가 아직 안 되었으므로 초막절에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30절입니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여기 30절에서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33"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예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다는 말씀의 뜻은 예수님의 때가 되면 잡히셔서 죽으신 다음에 그 다음에 하늘의 아버지께로 승천해서 올라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참 초막절 = 하늘나라의 초막 = 천국의 집"으로 올라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의 뉘앙스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거짓말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참 초막절을 이야기 하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으므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이 땅에 있는 저 예루살렘에 안 올라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뜻으로 하신 말씀임이 분명해 졌습니다.

 

초막절은 하늘나라 아버지의 장막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원래 초막절이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장막 생활을 하였던 조상들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였습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 집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의 처소라 할 수 있는 장막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은 하늘나라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소망하는 절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초막절을 지키면서도 초막절의 참 의미는 생각지 않고 그저 명절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입니다.

 

초막절에 사람들은 이 땅위에 있는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지만 , 주님은 곧 참 초막절을 지키게 되어 있었습니다. 곧 진정한 하늘나라 아버지 집에 있는 하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올라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늘 하늘의 일, 모형 속에 들어 있는 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참 초막절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마치시고 하늘나라 장막으로 올라가시는, 하늘나라 거룩한 성으로 올라가시는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이러한 깊은 뜻을 가지고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 때문에 오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항상 이런 식으로 조금 어렵게 말씀하십니까? 그 답은 요한복음 1026절 이하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아무리 어렵게 말씀을 해도 목자의 양들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 되어서 살과 피를 나누어준다는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던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여기 예수님의 형제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참 초막절의 뜻처럼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간다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7:35-36)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초막절 기간인데도 이 초막절의 참 뜻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의 모습들 -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참된 것, 영적인 것들을 항상 말씀하심

 

성전 - 참 성전이신 예수님 육체

 

요한복음 21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참 뜻을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태로부터의 태어남 - 참 거듭남(영적 출생)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3) 그러자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 없어서 "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4) 라고 하면서 되물었습니다.

 

우물물 - 영생의 생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에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4:10)

 

그러자 그 여인은 말을 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4:11)

 

그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주신다는 물을 그냥 이 땅의 우물물을 주신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다는 생수는 이 땅의 우물물과는 전혀 다른 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먹는 떡 - 참 양식인 영생하는 떡

 

요한복음 651절에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하면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떡을 이야기하시는데 사람들은 이처럼 그것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강물 - 성령

 

요한복음 737절에서도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주님께서 사람들이 많은 그곳에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은 아마 배꼽을 잡고 웃었을 것입니다. 생수 통을 앞에 갖다가 놓고 외치신 것도 아니요, 아무 물통도 가져다 놓지 않은 채로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게다가 내게로 와서 마신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을 하시니 사람들이 더더욱 웃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을 이상한 말을 하는 미친 사람이라고도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정말로 이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는 구나' 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과연 이 세상에 오셔서 생수의 강을 주시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가 되십니다.

 

왜 영적인 예수님의 언어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들을 귀 없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예수님의 그러한 말씀들은 귀에 거슬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말씀으로 들릴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한 차원 높으신 말씀들을 그 당시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 장면 한곳을 살펴보십시다.

 

요한복음 823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또 요한복음 837절에서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라고 하시면서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깨닫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3절에서는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라고 하시면서 아직 거듭나지 아니한 그들을 마귀에 속한 자라고 하시면서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여서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7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026절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고 말씀하시며 내 양이 아니므로 음성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진단하셨습니다.

 

전혀 못 알아듣는 이유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육에서 난 상태로 그대로 있지, 아직 거듭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 아버지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러한 영적인 말씀들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당연히 배척하며 거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듣다가도 나중에 다 깨닫게 됩니다. 깨달아 집니다. 니고데모나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중에 다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절대로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한 차원 높은 영적인 말씀들이 우리 귀에 들려서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가를 보십시다.

 

요한복음 737절에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며 사방으로 충만하게 흘러내리는 강물의 모습과 연결이 되는 것이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물 때문에 그 주위에 각종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자라는 모습과도 연결되지 않습니까?

 

요한 계시록 22장의 하늘나라 천국의 중앙을 흘러가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강물과도 연결되지 않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천국의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어린 양 성자 예수님의 보좌가 계시는데 그러면 성령은 어디 계십니까?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강물 그것이 곧 성령인 것입니다.

 

초막절에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셨는데 그것이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임이 깨달아지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조금은 어려운 성경말씀들이 깨달아집니까? 우리는 이해가 됩니까? 우리는 믿어집니까? 그러면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우리 속에 말씀이 거할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 일서 46절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영적인 말씀들이 깨달아지고 믿어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은 자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려고 주님께서는 감추어진 말씀으로 늘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40절에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 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이렇게 영적 이야기를 하여도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므로 목자의 음성이므로 이렇게 영적인 어려운 말씀으로 하셔도 결국 알아듣게 됩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려고 이렇게 어려운 말씀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조금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들이 잘 이해가 되며 믿어지며 귀에 들려오시는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신분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하신 한 차원 높은 영적인 말씀들이 거부감 없이 믿어지며 깨달아지며 귀에 잘 들려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자각하고 우리는 세상과는 다르게 이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신분을 망각하고 그냥 세상과 어울려서 어둠의 자녀처럼 살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