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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모세의 위대성 Ⅱ (말기)

맑은바람청풍 2015. 6. 30. 13:02

[묵상] 모세의 위대성 (말기)

[ 본문 = 34: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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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모세가 부름받던 초기의 위대성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철저한 자기부정과 포기(비움)가 쓰임 받게 된 비결이었음을 알았습니다(다른 말로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모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즉 인생 말기에서 보여준 모세의 또 다른 위대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안면 몰수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태도에 무언가 이상함이 발견됩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모세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31장부터 옛날 잘못(20:11)을 들춰내시며 가나안 땅 입성 불가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겨우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만 허락하시고는 그리고 34장에 와서 결국 모세를 죽게 하십니다.

 

이때 모세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7절을 보시지요. 비록 고령이지만 해발 수 천 미터에 이르는 험준한 산을 펄펄 날며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눈도 흐리지 않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죽음으로 몰아가십니다. 아무튼 모세는 죽습니다.

 

모세가 죽자마자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지요. 어떤 역본에는 ‘He was buried'라고 되어 있으나, KJVNIV’He buried him'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He'는 하나님으로, ‘him'은 모세로 받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모세를 직접 매장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죽의 자의 장사는 모두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장사지낸 사람은 모세 한사람뿐입니다. 그 무덤을 아는 자가 없다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손수 매장하신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쫓기시듯 급하게 처리하시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대목입니다.

 

모세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은 다음 계획을 서두르십니다. 1:2절에는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제'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바라고 기다리셨던 것 같다는 감이 느껴지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마음은 사실이었습니다. 조금 뒤로 가서 수5:6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라는 말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본문의 시기는 광야생활 막바지에 해당되는 때입니다. 광야생활을 한 1세대 중, 가나안 입성이 허락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이때 살아있는 1세대는 오직 모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묘한 상황입니다. 그토록 위대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기이한 현상인 것입니다. 완벽한 아이러니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결정은 너무나 냉정하고 무정한 것 같습니다. 기력이 왕성하여 펄펄 날고 있는 모세를 아주 부드럽게 부르십니다. 모세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경험상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늘 엄청나게 좋은 것을 주셨으므로, 이때에도 무언가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모세야, 너 빨리 죽어다오” - 이것이 본문에 담겨있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모세는 죽음에 임해서도 위대했다.

 

잘 아시다시피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후부터 광야생활을 거쳐 여리고 건너편에 이르기까지의 장장 40년간의 대장정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는 책입니다. 이제 그 막바지 33장에 이르러 각 지파에 대한 축복을 선언함으로써 모세의 장엄한 유언은 끝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는 분위기가 싹 바뀌어 오늘 본문인 34장으로 넘어갑니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이르렀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하나님의 죽음 명령에 접한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성경은 단지 빠른 템포의 사실적 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 모세의 심리상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건전한 추론을 통해 추측해 볼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모세였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에 대하여, 역시 건전한 상상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사실은 하나님께 애원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었습니다. = 3:23-28).

 

하나님, 왜 제가 죽어야 합니까? 아직 기력도 왕성하고 할 일도 많고 후계자도 변변치 못한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이 하라고 저더러 죽으라 하십니까?’ 자신의 임무를 내세워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제가 반석을 두 번 친 잘못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저의 공로는 대단한 것 아닙니까? 공로와 과오를 상계하더라도 제가 지금 죽어야 할 이유는 안 되지 않습니까?’ 타협안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이 백성을 사랑하시듯 저도 이 민족을 사랑합니다. 저는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멀리서나마 이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애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러한 상상은, 오늘날 성도들이 만류한다.’는 어설프기 짝이 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핑계를 내세우며, 응당 사임해야 할 담임목사직을 신주단지처럼 붙잡고 있는 분들의 궤변과 궤를 같이 하는, 철저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아무 조건 없이 순순히 응하는 모세의 모습이 그려질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단지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바로 여기에 모세의 숨겨진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정확히 깨우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무언가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니 그게 바로 모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훈련이 끝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이 실현될 수 있는데,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다음 계획이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하나님의 막중한 사역을 감당했던 하나님의 종이었으나, 오늘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자신의 위상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깨어있는 자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그 혜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는 각자의 맡은 사명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 한계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우리 신앙 요건 중의 하나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성의 한 국면입니다.

 

둘째,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꺼워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하나님의 죽으라는 명령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긍휼, 즉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모세는 감사하며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성의 또 다른 국면입니다.

 

모세의 위인다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죽음을 감지한 모세는 모압 평지 느보산에 오릅니다. 그리고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까지 걸어갑니다(느보 산과 비스가 산은 같은 산맥에 속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봉우리들입니다).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 모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보고 또 바라봅니다. 한발자국 내딛고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쉐필라 평지와 그 뒤로는 블레셋 다섯 성읍이 보입니다. 모세는 감탄합니다. ‘오메! 좋은 거!’.

 

또 한발자국 걷고는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헤브론 산지와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대해의 반짝이는 물결이 보입니다. 또 감탄합니다.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로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보이고, 저 멀리에는 에발산/그리심산/갈멜산도 보이고, 북쪽에는 단까지 보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백향목도 보입니다. 또다시 감탄합니다. ‘, 저 백향목을 베어내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고 그 옆에 작은 오두막을 하나 지어 내가 살면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구나!’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음도 잊은 체, 모세는 연방 감탄만 합니다. 그가 지금 옮겨놓고 있는 발자국 하나하나는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와 같은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감탄, 감사뿐입니다!

 

느보산에서 비스가산에 이르는 죽음의 길을 순종으로 가고 있는 모세의 모습에서 깨우친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 위대한 모세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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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2회에 걸쳐 부름 받은 초기와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나타났던 모세의 인간적인 위대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위대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에 따른 위대함이라기보다, 모세 자신의 순수한 위대함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성경은 그의 모습을 그와 같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진정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모세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된 교훈을 이제는 오늘을 사는 나의 삶에 적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의 무익함을 알고(자기부정 내지 포기), 그 후에는 자신의 위상을 정확히 인식하여 죽음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 이것이 모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붙잡고 있는 것은 없는지요? 담임목사직이든 재물이든 아니면 목숨까지라도, 주님께서 내 놓으시라면 모세처럼 아무 말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지요? 나 자신에게서는 결코 모세와 같이 큰 믿음, 아니 진정한 위대성이 발견되지 않기에 마음이 울적하지는 않은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계시다면, 먼저는 욕심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위대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아주 작은 부분에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것이 곧 큰 것입니다. 이에 감사하며 감당하는 믿음은 결코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적용으로까지 이어질 때, 모세의 삶을 통한 묵상은 은혜가 된다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보고 기뻐하실 주님을 기대하면서 감사 가운데 믿음의 길을 가시는 은혜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