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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목사 예복(예배복)(Ⅲ), 다른이의 견해들 본문
[묵상] 목사 예복(예배복)(Ⅲ), 다른이의 견해들 몇 편.
[스크랩] 대형교회 목사들이여, 이제 그만 가운을 벗읍시다!
[한국교회를 위한 도발적 제안] 허위와 교만의 탈 벗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출처 : http://cafe.daum.net/outsideletters/9muX/2 / 자유글방 )
(원출처 : Daily 서프라이즈 / 문한별 편집위원)
목사가 가운 입는 것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 웬만한 교회마다 가운 입고 설교하는 목사님들 모습을 많이 봤을 겁니다. 저도 이전에 목사안수 받을 때 잠깐 입어 봤습니다. 동기생 대표로 축도했거든요, 그거 입으면 속된 말로 폼이 납니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고, 강단 밑에 앉은 평신도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신분의 소유자라는 착각마저 들어요. 우스운 말이지만, 말하는 것도 그렇고, 몸짓도 괜히 우아해지더라니까요.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따위 가운은 하루라도 빨리 벗어 던지는 게 좋습니다. 이건 순전한 허위 덩어리입니다. 가식의 산물입니다. 교만의 결정체입니다.
목사가 가운을 입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거룩해 보이기 위해서. 위엄있게 보이기 위해서. 무게있게 보이기 위해서. 그래서 평신도들을 어줍잖은 권위로 누르고,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그거 아니라면 굳이 비싼 돈 들여 가운 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언제부터 교회에서 가운이 유행하기 시작했을까요? 예수도 걸친 적 없고 - 세례 요한은 거의 벗고 다녔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 베드로나, 바울, 요한... 기타 등등도 전혀 걸친 적 없는 이 낯설고 생소한 옷쪼가리가 주님의 교회에 언제 숨어들었을까요? 기록을 보면, 그건 바로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받아들인 시기와 일치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 중 하나로 공인하고 이어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주호 381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를 믿던 카타콤의 교회는 황제가 참예하고 로마의 권력가들이 줄줄이 참석하는 제국의 교회로 탈바꿈합니다. 기독교의 성격과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전환이 바로 이때 이루어진 거지요.
'제3제국'을 뒷받침한 히틀러의 제국교회나 '팍스 아메리카'를 떠받드는 미국의 극우기독교 & 오늘날 우리가 지탄해 마지않는 한국 대형교회들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이전에 교회는 사회불안을 야기하던 불순한 세력이었습니다(참조. 행 16:19~21). 그러나 제국의 종교로 옷을 갈아입은 순간부터 교회는 황제를 위해 조찬기도회 하고 체제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세력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도 비슷한 길을 걸었으니 그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전래 초기에 개신교가 얼마나 박해를 받았습니까? 당시에는 죽을 각오를 하고서야 교회 다닐 수 있었어요.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곧 권력입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무써븐' 권력~!
권력자의 교회는 더 이상 예수의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달고 성경을 보고 찬송을 불러보지만 거기에 정작 예수는 없습니다. 아다시피 미국 네오콘의 핵심멤버였던 부시와 럼스펠드, 체니는 다같이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이명박 정부 안에도 '독실한' 크리스챤들이 바글바글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농(弄)하는 예수가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와 같을까요?
성경의 예수는 밑바닥에서 섬기라고 했지 위에서 군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악의 축'들을 쓸어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Peace-maker'가 되라고 했지 'War-maker'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을 약속했지 부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카타콤의 교회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그릇되게 하는 모든 거품을 빼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성직자는 가운을 입지만 성도를 양육하는데 전념하는 목사는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개혁은 결코 거창하고 으리번쩍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가운 하나 벗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운을 벗음으로써 교회는 허위와 위선의 탈을 벗을 수 있습니다. 가운을 벗음으로써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정직해 질 수 있습니다. 가운을 벗음으로써 교회는 보다 더 낮아질 수 있습니다. 가운을 벗음으로써 교회는 예수께 더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가운을 벗음으로써 교회는 변혁의 파워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가운을 벗음으로써 교회는 성령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가운를 벗음으로써 교회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가운을 벗음으로써 교회는 비로소 교회다워 질 수 있습니다.
목사들이여, 이제 그만 가운을 벗읍시다.
[스크랩][이슈점검] 목회자 예복 4가지 오해
(출처 : http://www.kukinews.com/mission/article/view )
설교자는 양복만 입어야 한다(×) · 박사가운 예배복으로 괜찮다(×)
한국교회에서 예복의 의미가 크게 퇴색하고 있다. 지나친 형식주의는 곤란하지만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의식이기 때문에 구별된 복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예복 착용을 너무 소홀히 하거나 잘못된 인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예복과 관련한 4가지 대표적 오해를 살펴본다.
◇설교자는 양복만 입어야 한다?= 한국교회 상당수 목회자들은 강단에 오를 때 양복을 입는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살펴봤을 때 엄밀하게 말해 양복은 예복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알브나 스톨, 허리띠 등 예복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초기 선교사들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도와 교육, 봉사에 중점을 뒀지만 예전에 대해선 소홀했다.
예복 착용을 강조하는 측은 양복은 예복이 아니라 일상복이며, 집례자가 예복을 착용해 예배의 거룩함을 성도들에게 인식시켜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측은 예수님도 평상복을 입고 사역했으며, 초기 기독교 목회자들은 일반 신자와 구별 없이 성만찬과 예배를 인도했다고 주장한다. 박성완(전 루터대 교수) 목사는 “예복을 입은 사람은 예배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좋은 상징”이라며 “예절을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예복 착용이나 성만찬을 소홀히 하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박사가운도 괜찮다?=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큰 실수는 박사가운을 예배복으로 혼동하는 것이다. 박사 가운은 팔에 3개의 굵은 줄이 들어가 있는 옷으로 학문적 권위를 담고 있지만 종교적 상징성은 전혀 없다. 이것은 한국교회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기과시나 학위 콤플렉스 외엔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마치 머슴이 되겠다는 사람이 권위주의로 가득찬 주인의 옷을 입는 꼴과 같다는 지적이다. 주승중 장신대(실천신학) 교수는 “집례자는 특권이나 권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종으로 철저히 멍에를 지겠다는 자세로 예복을 착용한다”면서 “영광을 상징하는 박사가운은 예배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단언했다.
◇로만 칼라는 천주교용이다?= 한국에서 가톨릭 신부들이 착용하는 옷으로 인식되고 있는 로만 칼라 셔츠(클러지 셔츠·Clergy shirt)는 사실 18세기 이후 독일 루터교회를 중심으로 등장했던 옷이다. 따라서 천주교만의 점유물로만 보긴 힘들다. 독일이나 미국에선 개신교 목회자 상당수가 이 셔츠를 착용하고 있다.
정철범 성공회대(실천신학) 교수는 “클러지 셔츠는 성직자를 나타내는 평상복으로 외국에서는 개신교 목회자들도 많이 착용하고 있다”며 “천주교 것이라고 무조건 거부할 만한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박성완 목사도 “가톨릭 전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성서적인가, 비성서적인가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배 땐 스웨터도 상관없다?= 신학자들은 한국교회가 예배와 집회의 개념을 혼동하면서 복장문제마저도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비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감성적 대중 집회에선 스웨터나 티셔츠 등 복장을 자유롭게 할 수도 있지만 예배는 예복을 갖춰 입고 거룩성과 엄숙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
정일웅 총신대(실천신학) 교수는 “초기교회의 경우 하나님을 섬겨 드리는 예전의 핵심은 설교가 아니라 성찬이었다”면서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성만찬이나 예복 등 예전의 요소보다는 설교 중심의 대중 전도 집회에 치중하다 보니 예배전통의 참 가치를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예배가 점차 설교만으론 감동을 줄 수 없게 되다 보니 감각적인 찬송이 강조되고 있다”면서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예복착용과 성찬 실시 등 예배에서 상징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Key Word 예복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출 28:3)는 말씀에 따라 회막에 들어갈 때나 제단에 가까이 할 때 제의(祭衣)를 입어야 했다. 출애굽기 28∼29장에는 제사장이 입어야 했던 청색 예복과 에봇, 띠, 판결흉패에 관한 예복 지시가 자세히 나와 있다.
한국 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교회 예배의식을 강화하자'며 1965년 펼친 예전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의 영향을 받아 예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장통합은 93년 총회에서, 기감은 94년 총회에서 각각 교단 예복을 채택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신학자나 목회자들에게 목사예복에 대해 물으면, 위 글처럼 몽중취언과 같은 답변밖에 듣지 못합니다. 이들은 기득권에 취해 성경을 바로 살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헛소리들만 인용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항변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헛소리도 하는구나!’라는 경계의 예로서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목사) 목사가 가운 입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신 분 같습니다.
(출처:http://cafe.daum.net/soongsari 개혁관련펌글)
구약적인 의미나 인간적으로 권위를 세우고자 입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할 일 또한 아닙니다. 님께서 생각하고 인식하는 차원에서 바라보시니 무작정 비판조로만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스스로를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목사의 일의 신중함 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귀중한 사역을 귀하게 사용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사가운 걸치고 잘못행하는 목사들만 보셨는지요? 차분히 조목조목 나눌 일이지 단정적으로 던지고 말일이 아닙니다. 재판장에서 판사들이 왜 가운을 입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인 만큼 엄중하고 신중히 그 직분을 귀중하게 다루겠다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독립개신교회 목사님들께 직접 들어보셨는지요? 직접 들어보지 않고 추측이나 구약적인 개념으로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독립개신교회 목사님 가운데에는 님께서 비판하실 정도로 잘못된 의식을 가지고 가운을 입으시는 분은 안 계십니다. 가운을 입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자세를 가졌는가가 더 중요하고 그 정신이나 의도가 바르다면 무작정 타부시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혹은 가운을 안 입고 양복을 입고 강단에 설 지라도...
가운을 안 걸치고, 잘못된 설교를 하거나 교회 운영을 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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