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꿈과 환상 - 그리고 신비체험의 허와 실(3)

맑은바람청풍 2022. 6. 26. 08:53

[묵상] 꿈과 환상 - 그리고 신비체험의 허와 실(3)

 

꿈과 환상에 대해서는 앞의 2회로 마무리하고, 이번에는 범위를 조금 넓혀서 신비체험에 관한 포괄적 설명을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동일합니다.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입어 신비한 체험을 했다면 이는 특별하신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활동에 대해 말씀 하고 계십니다.

 

이때 성도가 겪는 체험은 제한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눈물을 흐르게 하는 감정의 고조현상을 물론이요 방언이나 넘어짐과 같은 외형적 증거까지 동반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가장 흔한 사례는 아마도 개인적인 신유체험일 것입니다. 불치병에서 치유받은 간증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성도는 환청과 환상과 흥분과 황홀경과 신유와 천국체험 등 제한받지 않는 영역까지 신비체험이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비체험 자체가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이의 자세에 있습니다. 신비체험은 어떠한 외형적 증거가 있더라도 매우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간과하기 쉬운, 다시 말해 평소에는 거의 유념하지 않는 측면에서의 위험성 3가지를 생각해 보고, 성도가 마땅히 지녀야 할 자세를 숙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잘 알려진 간증의 경우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을 수 없으므로 성도들의 신비체험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해나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누누이 강조하다시피, 타인의 체험에 지나친 점수를 부여하여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가볍게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인의 신비체험은 결코 듣는 순간에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반드시 오랜 시간을 두고 검증해야 합니다. 듣는 당시의 이야기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그럴듯한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과 유사한 것처럼 느껴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근한 예가 펄시 콜레 박사의 경우(내가 본 천국)임을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인간의 망각능력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잠시 잠간이 지나면 곧바로 잊어버립니다. 우리 주변의 신비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세대의 것들만 예로 들어 봅니다. 문선명 씨. 박태선 씨, 조희성 씨, 이재록 씨, 정명석 씨 등등의 신비체험담을 어찌 평가해야 할까요? 그들의 체험은 완전히 거짓이었을까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도 대단한 외형적 증가 있었습니다. 병자들도 많이 고침 받았고 신비한 현상들이 무수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는 가까운 시기의 일들이었으므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들이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이라 장담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심지어 본인들 스스로 하나님 편이 아니라 선전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신비체험은 부인할 수 없을지라도, 이들이 현재도 하나님 편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하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을 빙자하며 신비체험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주장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과연 그의 주장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인지를 증명 받아야 하는데, 그 증명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조건인 삶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설명은 다른 묵상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소위 전통진영에 속했다는 몇몇 생존해 있는 목사나 성도들의 간증 또한 이러한 검증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신비체험까지는 아닐지라도 일상적인 성령님의 인도 체험에 관한 미비점도 짚어야 될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 출석교회 개혁에 나섰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담임목사 반대 측에는 예수전도단에 열심을 지닌 성도님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이분들의 신앙은 매우 본받을 만한 수준이었고, 특히 매일성경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환상과 음성을 자주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개혁요구의 정당성에 강한 확신(음성과 환상)을 심어 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체험이 없는 저는 신기하고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아무튼 상당한 힘을 얻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편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들도 성령님의 인도임을 강조하면서 동일한 사안을 전혀 상이한 시각으로 설명하곤 했습니다.

 

헷갈렸습니다. 평소의 신앙자세와 삶의 모습으로 보아 전혀 의심받을 분들이 아닌데, 체험의 증명은 상반된다는 사실이 심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환상을 보았다."던 확신에 찬 주장이 어찌하여 올바르게 증명되지 않았는지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근간에도 수시로 환상 인도받는다는 분들과 깊이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분들도 많이 자제는 하지만 자주 체험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삶이 크게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대동소이한 그냥 평범한 죄인의 모습들 그대로 일뿐입니다.

 

이 같은 주변의 사소한 경험들을 통해 저 나름대로의 신비체험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신비체험 - 우리가 생각하듯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깨우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다시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 신비체험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아주 쉽게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신비체험은 오직 성도들만의 고유 체험이 아닙니다! 세상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수시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파티마 이야기는 고전적인 예입니다. 불교인들의 치유 환상 체험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요가나 심령과학의 사례는 너무 흔한 경우에 속한 다 할 것입니다(불치병의 치유 사례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들마저 대단한 체험들을 자랑합니다. 그들이 개인의 과거를 정확히 맞추는 것을 보고 놀란 경험은 한두번씩은 있을 것입니다. 날이 새파랗게 선 작두 위에서 춤추는 광경도 보셨을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현상입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근거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서, 일말의 주의도 필요치 않는 순수성을 믿고 싶어 합니다. 무척 순수한 믿음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신비체험을 성령님의 역사로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한마디로, 신비체험은 오직 성도들만 체험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교도들도 무수히 경험하는 사실들이 인정되어야만 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대적인 사단에게 있습니다. 그는 성도를 공격할 때 결코 악마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오곤 합니다. 성경에도 사단의 신비 사역이 기록되어 있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는 현상임을 부인치 못합니다. 모든 신비체험이 성령님의 역사일 수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위에서 말씀드린 몇 가지 위험성을 전제하고 성경을 다시 읽는다면 성경은 비록 신비체험을 기록하고는 있으나 신비체험 자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이사를 검토할 때는 당연히 주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신비현상에 관한 태도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어느 곳에서도 이적 자체를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문둥병자와 벙어리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셨지만, 그러나 치유사역을 행하시던 장소에 있던 모든 병자들까지 전부 치유하시지는 않았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주님 당시 유대 땅에서 죽은 자는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2명만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도 그렇고 고창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극소수의 몇 명만이 고침을 받았을 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셔서 그러셨을까요? 말씀 한 마디로 온 유다 땅의 병자들을 고치실만한 능력과 긍휼하심이 없으셨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주님은 온 세상의 병자를 말씀 하나로 다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 모든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이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안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 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신비한 능력을 나타내고 주님 당신이 드러나는 것 자체에는 관심조차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온 마음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에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온 세상의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없애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연인 인간의 구원에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핵심 방편으로 삼으신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바로 말씀(기록된 신경)입니다. 기적과 이사(비록 성경에 기록된 것일지라도)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부가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기사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으셨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약간의 이적과 기사를 맛보기로 보여 주셨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적과 기사의 실질적 의미는 이적과 기사가 주님의 활동 목적의 주요 핵심 분야가 전혀 아니었다는 진실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은 드러내는 데에 필요한 수준으로 제한되었다는 진리를 발견하셔야 합니다!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주님의 깊은 뜻을 감지한 제자들도 결코 기사와 이적 자체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천국체험까지도 마지못해 기록할 정도로 자제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은밀한 체험 정도가 아니라 만천하에 공표된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이적을 직접 행한 사도들은 누구 하나 신비체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10장에서 보듯 환상을 세 번씩이나 숙고한 베드로의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신비체험 - 우리 신앙의 귀한 측면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감사하며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체험은 성도라면 누구나 체험해야 하는 성령세례와 같은 수준의 절대가치는 아닙니다. 체험할 수도 있고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것입니다.

 

아울러 매우 조심스레 접근해야 할 부분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교묘하게 악용하려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체험 - 성경과 교회사에 의하면 초대교회 때부터 우리를 심히 괴롭혀 온 신앙의 아킬레스건인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섣불리 부정할 수 없을 듯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묵상해 보면 신비체험에 관한 올바른 대처방법을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몇 번에 걸친 묵상에 일부 표현되어 있는 것인데, 이를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하겠습니다.

 

하나, 신비체험은 성령님의 능력에 속한 것으로서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입니다.

 

하나. 그러나 사단도 유사 신비체험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하나. 신비체험의 원인(성령님이나 사단이냐)을 확인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는 시간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하나, 성령님에 의한 신비체험은 근본적으로 인격의 변화를 수반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하나, 따라서 신비체험은, 성경과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고 인격과 삶의 변화라는 증거가 확보된 경우에 한하여, 성령님에 의한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체험은 드러내어 자랑하는 목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교를 위해 허락하시는 절제된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숙된 성도는 악의적인 목적으로 현혹하려는 시도에 결코 흔들리지 아니 할 것입니다.

 

튼실한 소가 쉬지 않고 되새김질 하듯이, 때를 따라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믿음을 찾아,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날이 주님 안으로 깊이 들어가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