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교파/교단은 필수인가?(Ⅲ)

맑은바람청풍 2022. 2. 1. 10:17

[묵상] 교파/교단은 필수인가?()

< 본문 = 고전3:1-9>

 

 

교파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교회 구성원은 없는가?

 

성경은 오직 예수교파만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수많은 교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현상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고려할 때, 이해될 수 있고 때로는 수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불가피한 현상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다는 데에 성도들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 부류가 바로 기득권을 보유한 목사들이라는 생각입니다. 현란한 이론으로 강변하는 저의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마치 암세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암세포의 병리적 특성은 무엇일까요? 영양분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결코 세포 자신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순환(循環)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점점 부유해집니다. 때론 이웃 세포의 몫까지 흡수해 버립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이지요.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나와 너의 공멸이 최종 모습입니다.

 

현대교회에도 암세포와 유사한 직분이 존재합니다. 바로 목사입니다. 목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됩니다. 설교권, 치리권, 축복권, 저주권, 안수권, 세례권, 재정권, 인사권, 기타 교회의 모든 운영권 등이 모두 목사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목사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이러한 목사의 모습은 무엇을 연상시킵니까? 전지전능한 존재(수퍼맨)입니다! 목사에게 한 마디라도 해 보십시오. 목사와 주변 측근들로부터 곧바로 견제가 들어옵니다. 심하면 사단의 주구로 몰릴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비판하지 말고 오직 순종함으로써 덕을 세워야 하느니라!!!” 이분들이 써 먹는 전가의 보도입니다. 반발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옳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기에 속아 넘어가면 결론은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목사 말에도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목사 직분은 너무 과대평가되어 버렸습니다. 정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대의 목사 이미지는 마치 300kg의 몸무게로 고통당하고 있는 비만환자의 이미지와 같습니다. 암세포처럼 자기 자신만 욕심내지 말고 일반성도에게 돌려줄 것은 돌려주어야 합니다. 목사성직론이라는 비만증에서 벗어나 성경적인 살빼기 작업이 바로 교회 지도자인 목사 그룹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목사뿐 아니라 일반성도까지 모두가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암세포처럼.....

 

이것을 달리 말하면 돌출의 유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됨을 해치는 근본원인은 특정요소의 돌출입니다. 성경이 밝혀주시는 교회라는 유기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목사라는 특정직분을 지나치게 돌출(격상)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블랙홀 효과와 비슷합니다. 목사의 권한(사명)을 과도하게 확대시키다보니 주위의 장로나 안수집사 등 일반성도들의 사명은 자동적으로 축소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현대교회에 있어서 장로와 집사는 담임목사의 비서로 전락되었습니다. 목사의 말이라면, 성경적이든 비성경적이든 따지지 말고, 무조건 추종하는 것이 장로와 집사의 덕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역교회에서의 목사의 위상은 교황과 같습니다. 막강합니다. 이것은 조직을 유연하게 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직시키고 결국에는 질식시키게 됩니다.

 

그렇다고 목사무용론으로 빠지면 이것도 철저히 실패하는 것입니다. 목사 직분이 크게 왜곡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사 직분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니, 가장 중요한 지체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별도로 다루어야 하기에 이 묵상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나가기

 

신약성경에서 서로또는 피차라는 단어가 약 132회가 사용된 것으로 검색됩니다. “서로 사랑, 서로 사귐, 서로 기도, 서로 대접, 서로 용납. 피차 복종등등입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수없이 서로라는 말을 강조하고 계실까요? 성도들의 진정한 위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성도는 직분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청지기 또는 지체로서 서로 협력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대표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무에서 목사는 제외되고 장로 이하의 일반성도들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서로의 이행주체는 목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다 포함됩니다. 목사도 교회를 이루는 일개 지체에 불과할 뿐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 인정하고 욕심(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것입니다!

 

총정리 하겠습니다.

 

성경은 결코 교파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직 단일교파(예수교파)만 허락하실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단일교파 형식을 취했던 천주교는, 아시다시피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 원인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성령님)의 자리를 교황과 신부들이 차지했던 것에서 찾아집니다.

 

천주교의 실패를 딛고 새로이 시작된 개혁교회의 출발은 좋았습니다(성경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주교의 실패를 답습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교황 대신 목사라는 직분을 예수님 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예수님(성령님)은 증발되고 교단과 목사가 지성소의 보좌에 앉아 버린 것입니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실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지도자들(교황/교단/목사)이 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황/교단/목사는 교회의 일부인 것은 인정하지만 결코 교회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지 인간지도자가 아닙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말로는 인정하면서 행동으로는 불인정 하는 것이 실패의 근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교단의 난립=분파)를 해결할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 교파와 거기에 소속된 목사 개개인들을 지나치게 중시하지 않으면 됩니다. 교단과 목사는 교회를 대표할 위치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만 인식하면 됩니다.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성경 해석은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서로서로 용납하면서, 자신이 소속된 교파만이 유일한 진리의 대변자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입니다. 교단도 교회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면 교단간의 알력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입니다. 목사도 교회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면 목사성직론 따위는 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성경이 말씀하시는 초대교회와 같은 참 교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베드로나 바울이나 아볼로나 사도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기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3:12; 10:26; 14:15 ). 현대교회의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 중의 일부이며 그 은혜로 가르침의 직분을 허락받은 지체일 뿐입니다. 온 교회와 성도들의 존경과 대접을 독식해야 할 유일한 거룩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끝으로 일반성도들이 취할 자세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파는 성도들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성경적 기준은 아닙니다. 원론적으로는 단일교파가 옳지만, 인간의 한계에 비추어 볼 때 다수의 교파를 무작정 거부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마음 편하게 여러 교파를 인정하고 수용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이 교단이든 저 교단이든 대동소이하며(이단은 제외) 모든 교파가 성경의 일부를 담당할 뿐이라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성도가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은, 지도자들인 목사들이 자신의 소속 교파 입장을 강조하는 설득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일반성도도 목사에 버금가는 지식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함으로써 목사가 허망한 것에 눈독들이지 못하고 오직 성경이 밝혀주시는 것처럼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토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목사들이 자율적으로 욕심을 자제하지 못한다면, 일반성도들에 의해 타율적으로라도 욕심 부리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교파 문제도 목사들의 설명에 모든 것을 의지하지 말고 일반성도 스스로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추기

 

이러한 생각이 일반성도의 형편없는 기우에 불과할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직접 경험했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경우를 말씀드리지요.

 

교회개혁에 참여했다가 역부족으로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에 접어들자 어느 목사가 강대상에서 큰 소리쳤습니다. “목사는 끝까지 목사 편이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당연한 주장이지요? 목사가 목사편을 들어야지 대드는 일반성도 편을 들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이점이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목사는 목사 편을 들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목사가 편들어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입니다(실제는 목사가 예수님 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목사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이기에 무조건 목사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지몽매한 짓입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어느 목사님 한분이 분연히 목사들이 잘못했다. 개혁을 요구하는 일반성도들의 주장이 옳다.”고 바른 말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몇 달 후 집중적인 견제에 견디지 못하고 추방당했지만 말입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실제 경험입니다.

 

다음에는 논쟁의 경험입니다. 어느 싸이트에서 칼빈의 예정론과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론은 어느 것도 완벽한 신학이 아니며 일반성도는 오히려 2가지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었습니다. 곧바로 칼빈주의 목사님 한분이 강력한 태클을 걸어왔습니다. 오직 예정론만이 옳다는 것이었지요. 즉시 물러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정론과 예지예정론의 논쟁은 결코 끝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로교만 옳으냐 감리교만 옳으냐로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도 결론 내리지 못한 난제를 일반성도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얼른 꼬리 내리고 말았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예정론만이 성경을 100% 반영하는 신학이론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지요. 아마 흠정역(KJV)만 영감받은 성경이고 다른 역본들은 모두 사단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므로 부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일부 침례교파 교회 및 목회자들이 강변하는 주장이지요. 여러 역본마다 다소의 번역상 오류와 미비점을 부인할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흠정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은 흠정역만 완전하다고 외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역본들을 비교하며 서로의 미비점을 보완하며 이해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입니다. 흠정역 역자들만이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목사들의 사고의 폭이 일반성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성도의 생각이 오히려 성경적입니다. 목사들의 사고는 완전히 쪼그라 들어 있습니다. 자기파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고 반대파에게는 절제되지 않은 적대심을 나타냅니다. 목사들의 사고력 자체가 좁고 경직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여기에다 목사들의 영성마저 부족하다면, 목사들이 교회의 지도자라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성의 부족을 느끼는 일부 목사들 중에는, 자유주의나 혼합주의 사상으로 그 부족분을 은근슬쩍 위장하려는 한심한 이들마저 있습니다. 참 목사 멸종의 시대이자 현대교회의 최대 위기의 시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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