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개혁28) 신학 공부 중인 형제와의 논쟁(Ⅱ)
[단상](개혁28) 신학 공부 중인 형제와의 논쟁(Ⅱ)
이어지는 8건의 글은 NS교회에서 함께 고등부 교사생활을 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 중이던 어느 형제와 ‘공동목회 분란’에 대하여 논쟁을 폈던 내용입니다. 교회홈페이지 ‘소리방’에 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올리자 N형제가 격한 질책을 발했습니다. ‘소리방’에서 2번을 더 논박하다가, 설득이 여의치 못할 것 같아서, 개인 이메일로 전환하여 계속하였습니다(‘소리방’에 있던 논박은 스크랩해 두지 않았습니다). 초기에 N 형제는 ‘담임목사’ 편을 강력히 옹호하면서 개혁진영을 질타하는 논조였습니다. 글의 뉘앙스가 ‘나는 신학을 공부 중인데 일반성도가 뭘 아느냐?’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나마 나중에 다소 유화적인 논조로 변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 오고 간 이메일을 통하여, 교회운영과 개혁 사이의 진통에 대한 작은 통찰 정도는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논쟁의 진행과정과 논조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고간 이메일 날짜순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Ⅱ. <보낸 메일(1)> (2002.07.03.)
NSSoo 형제님,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쓴 글 아닙니다. 내게 그럴 자격 없어요. 또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도 않아요.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관점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군요. 어쩌면 공동의 이해에 이를 수 없을 정도인 것 같기도 합니다. 확실히 밝힐 것은, 형제님은 성경말씀을 위주로 하여 신학적/교리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고, 나는 인간본질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즉, 형제님은 성도 입장에서의 권위에 중점을 두었고 나는 목회자 입장에서의 권위에 관심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형제님이 강조하듯 NS교회가 기중 나은 교회인지는 몰라도 바람직한 상태에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곪은 것이 있어요. 이를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 문제점은 분명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부 지체들이 극도의 경계를 하고 있고 그 와중에서 이같은 글을 소리방에 올렸던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반론이라고 여기지는 마세요. 다른 분들도 나와 같은 생각 가지신 분들 많아요. 소리방에 아무 뜻도 없이 올렸던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뜻한 바를 얻었다고 생각되기에 소리방의 글을 완전 삭제하고 수정하였던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나의 견해는 첨부된 글을 참고하세요. 주님의 보호하심을 기도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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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한 첫 번째 편지] NSSoo 형제님
소리방에서 읽은 형제님의 글이 어찌 이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요. 옛날 고등부에서 함께 교사생활 할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오해인가요?) 수년의 세월이 많은 부분에서 서로의 생각을 다르게 만들었나 봅니다. 우선 나이 든 사람으로서, 또한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진중하지 못하였던 점을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의 설명이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글을 읽어 가다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단코 형제님에 대한 인신공격이 목적은 아니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게시판에 올라있는 형제님의 두 편의 글이 목회자들의 왜곡된 권위주의를 비호하는 것 같다고 느꼈고, 이것이 현재 우리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었기에, 교회 전체에 대한 경계로서 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형제님 답글을 보며, 각자의 생각과 판단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형제님은 NS교회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NS교회가 처음은 아닙니다. 많은 교회를 경험했어요. 다른 교회를 살펴보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많이 살펴보았답니다. 다른 교회가 안고 있는 아픔,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픔들은 성경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촉발되는 것이라는 것과,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목회자의 권위문제와 관련되고요. 동의하지요?
NS교회가 그런 교회에 비해 다소 나은 형편이라 할지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만족할만한 영적 상태는 결코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설명할까요? 형제님은 좋다, 나는 나쁘다, 누가 맞을까요? 맞고 안 맞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번 살펴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한가지만 이야기하지요. NS교회에서 너무 너무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일부 목회자에 대하여 평신도들이 영적인 눌림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모두 이를 시인하지 않으려 해요. 목회자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아픔을 안고 있는 지체들도 말을 하지 않으려 해요. 그러면서 속으로만 곪아가고 있어요. 이것이 NS교회의 현실입니다. 형제님은 NS교회 목회자들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처럼 확신합니까? 나는 반대로 NS교회의 문제점이 바로 일부 목회자의 권위의식에서 기인되고 있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견해차이겠지요? 그리고 서로 이해하거나 동의하기 어렵겠지요?
논쟁의 주제인 권위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현재 NS교회에서 격한 발언을 하고 계시는 지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무조건 비난받아야 할 분들만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아픔을 형제님은 짐작이나 하고 있나요? 단순히 과격분자이고 분란주의자라고 생각하나요? 그리고 만약 그분들의 외침 한 가운데 목회자가 자리잡고 있다면 무슨 말로써 이를 합리화시키려나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평신도 주제에 감히 목회자 세분을 앉혀 놓고 열변을 토해가며 이해의 장을 마련하려고도 했지만 결국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요. 바로 견해차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인은 아니랍니다. 그리고 지체들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답니다. 그래서 불발에 그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단순히 NS교회를 떠난 것뿐이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를 힘겨워 하시는 분들마저 있습니다. 이런 분들 누가 책임지죠? 아세요? 이런 아픔을???
권위에 대해 살펴보지요. 전제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하나님 이해는 제한된다는 점과, 둘째 따라서 어느 신학자 또는 목회자의 성경해석이 성경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권위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깨우쳐야 할 것은 우리의 정체성일 것입니다. 성경이 밝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흙이요 벌레며 지렁이요 구더기라는 사실입니다. 권위를 내세울 존재가 전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목회자든 평신도든 이 정체성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죄인이니까요.
이런 우리이지만, 성경은 또한 우리의 신분을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친구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요. 모두 의인이니까요.
어느 것이 맞지요? 물론 다 맞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예수님의 은혜 때문이지요. 쓸모없는 구더기가 창조주의 친구로 바뀌어졌기 때문이지요. 이를 다른 말로는 구원이라고도 하지요?
초보적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권위의 근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의 상태로 있는 한, 세상사람들이야 무어라 하든, 우리에게는 권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우리는 비로소 권위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권위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구원받았다해도 불완전한 우리는 이 권위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이해력의 부족에 기인하는 현상이지요. 기껏해야 남의 위에 서서 다른 사람을 주장하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교회 내의 권위도 이런 류로 오해를 해 버리지요.
심지어 어떤 목회자는 성경이 목회자의 군림권(君臨權)을 보장이나 해 주는 것처럼 왜곡시키기까지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일부 목회자는 민수기 12장이나 16장까지 들먹이며 성도들을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성도들을 두려움에 꼼짝 못하도록 만들지요(형제님은 그런 설교 들어본 적 없나요?).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고 연구해도 이런 목회자들이 말하는 그런 권위는 찾아지지 않더군요. 형제님의 권위에 대한 해석도 처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이지요.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앞에서 전제했던 사항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전통적 해석이 상당히 타당하다하더라도, 이는 군림 개념을 제법 내포하고 있답니다. 성경은 목회자의 군림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권위의 출발점을 군림이 아니라 섬김에서 찾고 계심을 알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위에서 살펴본 우리의 정체성(구더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런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섬기라는, 예수님의 진정한 마음을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진정한 권위가 나옵니다. 무슨 권위일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받는(또는 누리는) 권위가 아니라 섬기는 권위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섬김의 이행주체가 평신도로 국한되는 것으로 오도하기 일쑤입니다. 목회자는 순종과 섬김의 이행주체에 해당되지 않는 듯한 표현들을 씁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평신도는, 주님이 세우신 권위인 목회자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따르고 섬겨야 한다고 마무리하지요. 목회자는 평신도의 섬김과 순종의 대상입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적 해석의 전부일까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요? 주님은 목회자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모두 몸의 한 지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목회자를 인체의 가장 중요한 심장에 비겨 봅시다(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므로 목회자를 감히 두뇌에 비유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 나와 같은 평신도는요? 아마 새끼발가락 정도 되겠지요. 누가 더 중요합니까? 당연히 심장이 발가락보다 더 중요하겠지요. 이게 우리 인간의 생각입니다.
헌데 성경은 모두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요도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놀랍게도 더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성경적 지체의 원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피차 복종”하라고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 안에서 각 지체간의 의무는 ‘상호 복종’이라는 말씀입니다. 평신도로부터 목회자에게로 이르는 일방적 순종과 섬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목회자도 평신도에게 순종하고 섬겨야 할 경우가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시 목회자의 엄중함에 대해 살펴볼까요? 목회자는 많이 맡은 자입니다. 장성한 자이기도 하구요. 어린 평신도들을 보살피고 돌보아야 할 맏이의 직분입니다. 힘든 직분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임이기도 하구요.
이런 목회자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지 이야기할까요? 목회자에게 가장 두려운 말씀은 “실족의 경계”(마18:6)입니다. 맡겨진 양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려 애쓰는 평신도들의 길이나 막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목회자 자신을 성찰하라고도 하십니다(마23:13).
형제님이 인용한 말씀들은 목회자들의 권위의식을 정당화시켜 주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말씀들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이 권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미는 목회자들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형제님도 잘 알잖아요. 목회자 직분이 얼마나 힘들고 피 말리는 직분입니까? 적당히 존경이나 받으며 대충대충 해 나갈 수 없는 막중한 직임 아닙니까? 요21장에서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목회자의 임무를 깊이 묵상해 보았나요? 이게 쉬운 일이라고 여겨집니까? 맡겨진 양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게 쉽나요? 목회자가 무슨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지식으로? 재능으로? 권위로? 돈으로?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한 일 아닌가요? 오직 무릎꿇고 기도하며 위로부터의 능력이 입히우기를 간구할 때라야 가능한 일 아닌가요?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에의 집착이 아니라 직분에 대한 엄위한 인식입니다.
딤전5:17 말씀도 오해되기 쉬운 부분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는 말씀을 목회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목회자를 존경하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지는 않는지요?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이 목회서신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가 시무하는 교회를 공동 수신인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주 수신인은 디모데로 보아야 합니다. 디모데의 직임은 오늘날의 목회자로 보아야 하구요. 그렇다면, 본문의 전통적인 해석에 이견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 견해입니다만, 본문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로들은 흔히들 생각하듯 목회자+장로의 개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장로를 의미한다. 본문에 생략된 주어를 누구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발생되는데, 주어를 디모데로 받는다면 전통적 해석과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즉 목회자인 디모데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존경하라는 뜻이다>라고 말입니다. 만약 이 해석이 맞는다면, 존경의 행위를 행하는 주체와 대상이 지금까지 들어온 것과는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헬라어를 모르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해석도 앞서 이야기한 ‘상호 복종’이라는 원리와 연계시킨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어찌되었든, 목회자의 임무 중에는 성도를 존경하고 섬겨야 하는 부분도 포함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설교(경건서적 포함)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좀더 연구해 보아야겠지요.
그렇다고 너무 오버하여 장로(평신도)가 목회자보다 더 존경받아야 하는 높은 직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목회자든 장로든 주 안에서 성도들의 직위의 높고 낮음은 없습니다. 목회자도 성도요 평신도도 성도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섬겨야할 대상들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자세는 ‘나 이외의 모든 성도는 존경과 섬김을 드려야 할 대상이다’라는 것인데, 왜 이 사실을 깨우치지 못할까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감히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서 ‘목회자만 존경의 대상’인 것처럼 오해하는 오류를 범하기 십상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에 못지 않게 평신도도 목회자로부터 마땅히 존경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초기단계에는 수동성이 강조되지만(양육받아야 하기에), 중반 이후에는 능동성이 강조됩니다. 장성한 자가 되어 어린 성도를 돌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그 정점에 바로 목회자가 있습니다. 이를 장자권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은 바로 이 장자권의 실패 역사를 숨김없이 기록해 놓은 것임을 알잖아요? 가인과 에서와 루으벤과 유다백성들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모두가 실패한 장자권자들임도 알잖아요? 그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권위에 있다고 봅니다. 그들 모두 장자로서의 권위만 생각했습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장자로서의 책무 즉, 동생을 돌보는 일은 등한시했던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모두 목에 힘 줄줄만 알았지, 힘없고 가여운 동생들을 돌보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섬기는 자를 강조하셨을까요? 평신도가 목회자를 하늘처럼 떠받들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을까요? 목회자는 큰 자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가장 큰 책임은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그런데 이 막중한 임무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엉뚱한 권위 타령이나 하려는 것이 온당합니까?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권위를 내세워 뭐 하렵니까? 또 권위가 목회자들이 원한다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까?
굳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말합니다만, 권위는 강요에 의해 얻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보증하시는 진정한 권위는, 말씀 위에 기초하여, 오직 올바른 섬김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권위를 얻는 방법은 바울이 너무도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본(本)입니다.
본! 본! 본! 그렇습니다. 이 본이 없이는 권위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본 외에 다른 것이 더 있습니까?
한국교계는 그렇다하더라도 NS교회 목회자분들, 정말로 본이 되고 있습니까?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이르기까지 본이 됩니까? 목회자의 완전성을 의미하느냐고 묻겠지요? 아니요, 게시판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목회자의 완전성을 믿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부족하고 모자라지요. 목회자라고 뭐 특별한 사람인가요?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수했을 때는 솔직히 인정하고, 모르는 것은 상의하고, 함께 이루어나가는 교회의 진리를 굳건히 붙잡고 사역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본을 보이고 있는데 웬 상처들입니까? 평신도들이 제 풀에 상처받은 것입니까?
형제님이 인용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말씀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결코 권위가 생길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 맡은 것, 매우 귀중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로 목회자로서의 본이 필요합니다. 목회자가 본을 보일 때, 성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목회자를 영적 지도자요 아버지로 알아 진심으로 존경하고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 아무나 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소명)이 있어야 하고 또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는 직임입니다. 뭐가 고통입니까? 목회자들이 말로써 잘 하는 ‘자기부정,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아닙니까?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쉽게 됩니까? 그 의미는 또 무엇이고요? ‘나는 지렁이다’ 이것 아닙니까? 지렁이가 무슨 자존심이 있고 무슨 권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등등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이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들어 쓰신 것 아닙니까? 이분들이 목을 꼿꼿이 쳐들고 ‘나는 위대한 권위의 사람이다’라고 할 때 쓰셨나요? 모세가 그런 생각했다가 괜스레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만 했지요. 하나님은 들어 쓰실만한 바로 그때에 들어 쓰십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바로 자기포기 자기부인 여부에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분들, 믿음을 얻어 구원받고 거기다 목회자로 안수까지 받은 목적이,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며 평신도들이 찍 소리 못하게 하고 존경받으며 권위나 누리려는 것이었습니까? 불신자를 생명으로 인도하고, 어린 지체를 돌보며 섬기려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속된 말로 직업을 얻기 위해서였나요? 모두 모두 아닐 것입니다. 자, 권위의 진정한 의미를 전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권위는 전 목적이 아니라(얻으려 애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또는 완수했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순전히 주님이 주시는) 부수적인 상급입니다!!! 결단코 미리 구걸하거나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전의식(Coram Deo) 잘 아시죠? 예수님 앞에서 목에 깁스하고 힘 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목이 곧은 자’라고 야단만 실컷 맞습니다.
성경의 의미와 다른 잘못된 권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어떻게 하면 맡겨주신 양떼를 잘 보살필 것인가에 만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목회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권위를 내세우는 자치고 주님의 참 제자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계속 실패했던 제자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우리의 오해는 권위를 큰 자와 높은 자에 연결시키려는데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권위란 오히려 작은 자, 섬기는 자와 관계된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앞에서 권위를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라 했는데, 바로를 축복한 야곱의 예를 묵상하면 다소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완전히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누구를 축복합니까? 바로가 야곱을 축복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에 합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의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권위입니다.
권위란 군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서 오는 것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님도 훌륭한 목회자를 꿈꾸며 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권위나 누리겠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그 어려운 목회자의 길을 택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믿습니다.
형제님이 잘 아시다시피 목회자의 길, 얼마나 힘들고 험합니까? 목회자의 길이 힘든 이유는, 목회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때나 사용하는 ‘종’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종! -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어버리고 비운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종인데요. 여기에 어떻게 성도들의 존경이나 바라고 권위나 요구하는 가벼운 생각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권위를 바라는 목회자라면,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성도의 존경과 권위를 강권할 것이 아니라, 이것마저 훌훌 털어 버리고 정말로 주님 한 분만 의지하며 인내하며(끙끙거리며) 나아갈 때에, 주님이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권위를 덤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회자적인 삶으로 본을 보임으로써 성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장자의 직분을 감사함으로 감당하겠다는 엄위한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권위가 목회자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긴 글 읽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공부에 바쁠 텐데, 답 안 해도 괜찮습니다. 이 글 하나로 나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나의 이 같은 다른 견해에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 마음에 안 들면,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지체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넘어가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게시판에 올려 있듯이, 촌스러운 믿음을 좋아하는 자도 있다는 점은 잊지 말아 줬으면 합니다. 현재 NS교회에서 일고 있는 분란의 밑바닦에는 나의 이런 어리석음도 일조를 하고 있다고만 알고 계세요.
성령님의 확실한 조명하심이 형제님께 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 추신 : 평소 개인적 경구로 여기는 말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아프게 하는 평신도보다 더욱 나쁜 것은 평신도를 아프게 하는 목회자이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영향력이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그 범위가 작지만 후자는 너무 큽니다. 목회자의 왜곡된 권위의식으로 인하여 평신도가 상처받는다면 이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 직분의 엄위함을 반증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