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상](30) 여호수아 이후 왜 특별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을까?
[목자상](30) 여호수아 이후 왜 특별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을까?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모세와 여호수아의 위대성에 관한 면면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사사 시대 이후)에는 그들에 비견할 만한 지도자들이 세워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나 삼손 같은 사사들이 유명하지만 모세나 여호수아에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왕정시대로 접어들어 다윗만 제법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는 나머지 왕들은 다윗에게도 비교하지 못할 수준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이 신약의 그림자(예표)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몇몇 위인들이 과연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는 직책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임을 앞에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왕/제사장/선지자의 3가지 직분을 동시에 예표하며 이는 예수님의 직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임도 알아보았습니다.
※ 모세의 ‘제사장’ 직임을 의심하기 쉬우나 실제 모세는 무시로 성막 출입했었음에 유념해야 합니다. 당시의 시종(侍從) 여호수아는 성막에 들어가지 못하여 출입구 앞에서 대기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 제도가 확립된 이후에도 모세는 여전히 제1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아론과 미리암이 시샘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아무튼 아론은 그 중에서 특별히 제사장을 강조하여 예표하고 있습니다. 또 여호수아는 왕의 직분을 예표합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제사장 직분이 아론 자손에게로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민27:21절의 “그는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라는 말씀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위상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줍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지만 여호수아는 겨우 인간 제사장인 엘르아살 앞에 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윗도 왕권에 대해서만 예표합니다(다윗 시대에는 제사장뿐 아니라 선지자 직분도 완전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여하튼 구약의 지도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예수님의 모형입니다(유다도 그렇고 요셉도 그렇고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3가지 직분(비록 여러 사람이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나)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 한 분께로 모아졌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유일하신 왕이요 대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시지요.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왜 여호수아 이후 특별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사사인 웃니엘을 포함한 이후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영적 권위를 부여하실만한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먼 훗날 예수님께 구약의 모든 지도자들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부여하신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특별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신 데에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제는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영웅을 통해 역사하실 단계가 지났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비교할 수 없는 못난 사사들과 왕들이지만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시겠다는 의지였습니다.
모세도 그렇지만 사사 및 왕들을 보세요. 정말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특출한 영웅이 아니라 보통 사람을 사용하셔서 천국을 이루시겠다는 표현입니다.
결국 여호수아 이후 특별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신 가장 큰 이유는 이제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과 같은 특정 상황이 종료되고 이제 가나안은 하나님과 보통 사람들이 함께 천국을 이루어나가야 할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세대주의적 해석이 아닙니다. 그냥 성경을 큰 시각으로 읽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밑그림입니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신약을 역시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모든 것이 예수님 한 분께 집약됨을 알 수 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이 모두 집중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천국(하늘나라)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놀랍게도 12 사도를 택하시고 이들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된 교회(천국)를 시작하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12사도들 개개인입니다. 12명 중에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랑할만한 자가 있었나요? 모세나 여호수아 아니면 구약의 아주 작은 선지자에게라도 비견할 정도의 가치와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나요?
참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12사도는 몽땅 ‘무지렁이’였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 속하기도 버거운 그런 인물들이었지요.
어떤 분이, 사도들 중에서 현시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도들의 성격과 자질과 능력을 컴퓨터에 넣고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모든 사도들이 불합격되고 오직 가룟 유다 한 사람만 합격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들 모두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택함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비록 형편없는 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비교적 욕심 없는 마음 중심을 보시고 택하셨고 그리고 그 속마음을 다듬기 위해 3년 동안 무던히도 애쓰며 양육하셨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도들이든 오늘날의 성도들이든 하나님께서는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위인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을 대신할 위인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헛다리짚는 천주교가 자랑하는 성모 마리아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몸을 이루는 눈과 코와 입과 팔과 다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 개개인을 오직 몸의 일부분 즉 지체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누구의 우열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신약이 밝히 강조하게 계시는 참 진리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간략하나마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거시적 관점의 ‘인재상(人材像)’을 살펴봤습니다. 이쯤에서 이 긴 묵상의 주제인 [목사]에게 적용해야 할 필요가 대두됩니다.
신약의 증거로 볼 때, 여러 지체 중의 하나임에 분명한(지나지 않는) [목사]는 어떤 직임일까요? 수없이 반복 강조한 것처럼 ‘그냥 지체’입니다.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지체’인 것입니다!
앞에서 살핀 그대로 하나님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위대한 위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반대로 베드로 등 사도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질문이 다시 대두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현대 [목사]들에게 모세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영적 권위를 부여하실 필요가 있는가?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살핀 그대로 하나님은 오늘날 모세와 같은 무소불위의 권위를 지닌 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면 이는 제2의 예수님이 요구된다는 뜻이며 이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 불완전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묵상을 관통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목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괜스레 모세나 다윗과 같은 위인들을 앞세워 [목사]의 권위를 강요하지 말아라. 그래봐야 그것으로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일을 그냥 주님께 맡겨라. 권위 의식도 버려라.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모범을 보이며 앞에서 이끄는(먼저 고생하는) 일에만 전념해라. 이것이 성경적 올바른 목회자상이다.”라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했을 때 영적으로 부족한 일반성도들이 [목사]를 본(거울)으로 삼아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강조점인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닮은 [목사]가 있다면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표가 납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입니다. 일반성도들은 이런 참 [목사]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게 [목사]의 참 자유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자유를 깨닫고 정말로 아무런 욕심도 없이 묵묵히 목회의 길을 가는 이를 만난다면 일반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쉬우면서 참에 가까이 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호수아 이후 특별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신 이유는 ‘다 함께 이루어나가는 교회’를 지향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사]에게만 무소불위의 권위(때로는 성경의 증거마저 뛰어 넘는 성경해석권/설교권/축복권/저주권/안수권/재정집행권 등등의 막강 권력 = 교주가 되는 첩경)를 부여하셔서는 ‘다 함께 이루는 교회’가 성립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