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상](28) 하나님 입장에서 [목사]로 세우신 목적은 무엇일까?
[목자상](28) 하나님 입장에서 [목사]로 세우신 목적은 무엇일까?
일부 [목사성직론]이라는 해괴한 이론에 함몰된 자들은 “[목사]는 ‘주님의 종’일 뿐 교회의 종은 아니다.”라는 벼락 맞을 소리를 합니다. 속뜻은 ‘예수님께는 할 수 없이 항복하지만 까짓 일반성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을 왜 읽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번도 언급하시지 않는 이러한 우월주의적 사고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요?
정확한 출발점은 사단이라는 것이 성경의 보증입니다. 예수님께 꾸중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온통 성경말씀으로 포장되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무지를 광고하는 것과 진배없는 짓입니다.
성경은 [목사]가 일반성도의 종이 될 수도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두 곳만 인용하겠습니다.
왕상12:7절은 “~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늙은 신하들이 르호보암에게 권고하는 말입니다. 왕이 백성을 주인처럼 생각하며 섬겨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이니까 그렇지 신약은 다르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을 위해 신약도 인용해 드립니다.
고후4: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같은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 우리는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이며 “너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입니다. 사도 신분인 바울은 자기가 ‘성도들의 종’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바울의 진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교회)는 누가 높으냐를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모두 형제(지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일반성도가 [목사]의 종이 될 수 있듯이 [목사]도 일반성도의 종이 될 수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목사] 뿐 아니라 일반성도까지 모두 예수님의 종이 되어 서로를 섬겨야 하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목사성직론]은 잘못된 이론입니다. 성경을 넓게 그리고 깊이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이런 구절들을 들이대고 싶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레21:4).
이 말씀을 ‘[목사]는 제사장을 이은 신분이므로 당연히 일반성도의 어른이 된다. 그러니 일반성도는 무조건 [목사]에게 어른 대접 잘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을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풀면 망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위의 레위기 말씀은 이렇게 풀어야 합니다. 맥은 “스스로”에 있습니다. ‘제사장 스스로의 자기 성찰’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제사장의 신분에 맞도록 신중하고 거룩한 언행을 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본”이라는 단어로 대체 사용되고 있음도 유념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를 엉뚱하게 ‘제사장 존경’의 근거 구절로 변절시켜 버린다면 이는 벌 받을 일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철저히 세상적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이었습니다(눅22:25).
대하35:3b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마땅히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그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
레위인들의 임무는 성막을 메는 것이었는데 성전이 건축됨으로써 그 임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임무를 주신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레위인의 임무는 ‘하나님과 성도를 섬기는 것’이랍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일 뿐 성도의 종은 될 수 없다고요? 그렇다면 위의 말씀들은 무엇입니까?
물론 여기서 말씀하시는 섬김은 장자로서의 섬김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맏형이 막내 동생을 돌보는 것과 같은 섬김 말입니다. 그렇지만 세상 임금들처럼 군림하라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잘 새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일 뿐이다.’라고 한다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런 구절을 찾지 못하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성이 낮아서 못 찾는 것일 수 있겠으나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욥33:7). 엘리후가 욥을 나무라며 한 말입니다.
사람의 위엄과 권세로는 누구도 누르지 못합니다. 비록 막강한 세상권세라 해도 말입니다. [목사]도 자신의 위엄과 권세로 일반성도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말씀이 더 있습니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찌니라.”(욥40:10). 자신의 무죄를 강변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욥은 정말로 의로웠고 실제 죄가 없었습니다. 스스로의 위엄과 존귀를 자랑할 정도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정치를 않으시는 것입니다.
[목사]도 스스로의 위엄과 존귀를 아무리 입어도(주장해도) 일반성도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수긍이 어렵다면 고전9:19절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목사]도 성도의 종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구절이며 사실상 이것을 이해하고 또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누리는 직분이 아니라 섬기는 직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정인에게 [목사]의 은사를 주시어 [목사]로 세우시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사도들의 사례를 보고 배우면 됩니다. 사도들의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로 한 자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출세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래서 야보고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예수님께 고단수 로비를 펼쳤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출세가 물 건너갔다면 오는 세상에서라도 한 자리 주십사’ 부탁했습니다(마20:21; 막10:37).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읍소작전마저 냉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자리는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가 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세상 원리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엉뚱한 요구를 하십니다.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느니라.”(마20:26-27).
제자들은 국무총리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는데 예수님은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되라고 하셨으니 종은 제법 맵시 나는 종이려니 기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되라하신 종은 보통 종이 아니라 종 중의 종, 진짜 종, 가장 비천한 말단 종을 의미합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비교하기조차 쉽지 않는 아주 형편없는 종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사도보다는 한 단계 아래일 수밖에 없는 [목사]는 어떤 종이어야 된다고 생각되십니까? [목사]는 거룩한 직분이니까 총리는 안 되더라도 장관쯤은 되어야겠다고 생각되십니까?
꿈은 빨리 깨는 것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목사]에게 돌아갈 장관 자리는 없습니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의 보좌는 결단코 하나도 없음을 일찍 깨우쳐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럴싸한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 [목사]로 불러 세우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불쌍한 양 떼(일반성도 무리)를 돌보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양의 임무가 강대상에서 목소리 높이고 [목사] 존경하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 직분의 본질은 성육신 정신에서 찾아야 합니다. [목사]는 존경받으려 해서는 안 되는 직분입니다. [목사]는 끊임없이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더 낮아져야만(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처럼 = 예수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수준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겨우 수행할 수 있는 직분인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는 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맡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눅17:10).
일부 [목사]들이 함부로 ‘무익한 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립니다만(그것도 [목사]들만 이 단어를 쓸 수 있다고 억지 부리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나 ‘무익한 종’이 아닙니다. 이 단어를 쓸 수 있는 분은 예수님처럼, 아니면 적어도 바울처럼, 자기 자신 다 비우고 자신의 임무 다 행하고 그러고도 임무 완수를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진짜 겸손한 자만이 쓸 수 있는 엄청난 용어인 것입니다.
너무 심각하므로 분위기를 바꿀 겸 우스갯소리 하나 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목사]가 ‘무익한 종’이면 일반성도는 무엇이 됩니까?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말로 ‘따따블 무익한 종’이 되지 않을까요? 뉘앙스가 참 묘해서 ‘따따블 무익한 종’이 그냥 ‘무익한 종’보다 두 배 더 좋은 종처럼 느껴지는데 이렇게 말하면 [목사]들이 무척 기분나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종이나 따따블 종이나 다 같이 종은 종일 뿐입니다. 종에게 급수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강조하며 마치겠습니다.
‘무익한 종’이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신비가 녹아져 있는 하나님의 경륜으로서 곧 [목사]가 [목사]되는 목적이고 성도가 성도되는 목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입장에서 [목사]로 세우신 목적은 ‘잘 모르는 일반성도들에게 무익한 종이 어떤 것인지 본으로 알려주는 책임’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 막중한 사역을 무릎 꿇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