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정제되지 못한 간증의 위험(3)

맑은바람청풍 2015. 7. 1. 11:05

[단상] 정제되지 못한 간증의 위험(3)

 

 

간증의 역기능에 관한 세 번째 글입니다. 오늘은 몇몇 간증(또는 예화)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평소 지니고 있던 이해의 피상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서,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집사의 경우입니다. 지금은 신학을 하고 있어 전도사입니다만 제가 매우 아쉬워하는 부분입니다.

 

, 그분의 받은 은사로 볼 때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보다 평신도로서 섬기는 것이 나을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 특이한 체험을 했다하면 무조건 목회자의 길을 가려는 현실을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대단한 전도의 은사를 받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간증을 듣고 너도 나도 전도왕이 되겠다고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분이 고구마를 특허 냈으므로, ‘나는 더 열심히 하여 좁쌀 전도왕 타이틀을 따겠다.’거나, ‘아무래도 그 양반보다야 못할 테니 호박 전도왕 정도로 만족하자.’고 와글와글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극단적인 교통사고를 통한 고구마 전도왕 체험은 그분의 고유 경험일 뿐입니다.

 

두 번째로는, 부인할 수 없는 외견상 표징이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베니 힌 목사라든지 김종필 목사처럼, 손 한 번 들면 사람들이 넘어지고 자빠지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판단은 제 능력을 넘기에 그만 두겠습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관심가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분들의 집회에서 수십 명이 넘어지고 자빠지더라도, 나도 그런 능력 배워서 해 보겠다고 다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넘어져도 그만 자빠져도 그만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런 목사들을 통한 개인적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요즘 기승을 부리고 있는 천국체험에 관한 것입니다. 원조격인 펄시 콜레 박사의 내가 본 천국을 필두로, 토마스 주남 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 이현숙 전도사의 아가선교회등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주남 여사와 이현숙 전도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난리법석입니다. 저는 한번씩 방문만 했을 뿐, 회원가입을 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흘러나오는 글들을 보면 정말 굉장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 천국체험 주장들이 지나칠 정도로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들 주장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도 [묵상] “천국체험 주장들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나?”를 참조바랍니다.

 

별도 묵상의 요지는 천국체험자들의 주장을 종합하여 살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각자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고유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강변하지만, 그 내용들이 사람마다 다 달랐습니다. 천국 묘사 내용도 제 각각이고, 공통된 주님의 명령도 없습니다. 각자 각자가 자기 맘대로 일 뿐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정화하려면 수 만 명의 천국체험자가 필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천국체험에 관한 한, 사도 바울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그는 정말로 천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자랑은커녕 어쩔 수 없어 한번 말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명확한 지시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가 주님의 명령을 빙자하여 자신을 나타내려 한 적이 없습니다.

 

천국체험자의 기억이 아무리 생생하고 사실인 것처럼 느껴져도, 성경은 이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제발 알아달라고, 그래서 나를 좀 대접해 달라고 강요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 지금까지 세 가지의 경우를 들어, 간증 내지 예화(예화는 개인의 체험을 기초로 한 경험담이 대부분이므로 간증과 유사한 부류로 취급해도 무방할 것입니다)가 지니는 정확한 위상을 생각해 봤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 무슨 간증일지라도 개인에게 국한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긍정적 현상이냐 또는 미심쩍은 현상이냐에 상관없이, 고구마 전도왕도, 넘어뜨리고 쓰러뜨리는 신비능력도, 천국방문 체험도, 모두가 성도 개개인에게 한정된 경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다 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이러한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고구마는커녕 호박 전도도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기는커녕 비틀거린 경험도 없을 수 있습니다. 천국 문지방 앞에도 가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특별한 간증이 없는 성도들이라고 모두 멸망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성경이 시종일관 부르짖는 바에 의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할 뿐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예로 든 간증을 포함한 모든 체험들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자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개개인의 독특한 체험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특하다는 이유만으로 간증의 가치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간증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냥 한 번 듣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영광 돌리고 감사만 하면 될 것입니다. 두 번 세 번 수도 없이 울궈먹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근래, 개인적으로 간증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하나, 간증의 유형(범위)은 순수 개인영역으로서, 환상과 환청과 황홀경과 신비체험과 심리적 변화 등이 주를 이루지만, 그 객관적 증명은 불가능하다.

 

하나, 간증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구구절절 옳아 보이는 말을 하며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삶으로 증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 청취자는 간증자를 대단한 사람, 놀라운 사람, 신기한 사람, 부러운 사람, 구름만 밟고 살 것 같은 사람처럼 느끼게 되고,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기 십상이다.

 

하나, 따라서 간증은 볼록렌즈다. 모든 초점이 간증자=에게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를 뒷받침하는 조연배우처럼 묘사되기까지 한다.

 

 

간증 - 정말로 단 한번만 간략하게 증거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한정된 특수한 체험을 근거로, 자신의 우월성을 내세우려 한다면(현실에서 자주 마주치듯), 이러한 간증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간증은 필수불가결한 신앙요소는 아닙니다.

 

 

별지 : 기도에 관한 예화

 

기도에 관한 권면을 들을 때면 빠지지 않고 듣게 되는 예화가 있습니다. 5만 번 이상 기도응답 받았다는 죠지 뮬러 목사님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뮬러 목사님의 향년은 93세였으며(1805-1898), 회심 후 약 66(일부 자료는 63) 간 고아원 운영에 전념하셨습니다. 이 기간 중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5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수입니다. 목사님께서 고아원을 운영했던 약 66년 동안 매일 2번 이상씩 응답받았다는 계산입니다.

 

하루 2번 응답받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3초 이내에 금방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즉시, 어떤 것은 수 일, 어떤 것은 수 년, 어떤 것은 수십 년의 기다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의 기도 원리는 5가지라고 합니다. 그 중에는 응답해 주실 때까지 계속 기도한다.”는 원리도 있는데, 52년 이상 기도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기도응답이 어렵다는 측면도 고려되어야 하지만, 숫자의 허구에 대해서도 유념해야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목사님께서 기도할 때마다 그리고 응답될 때마다, 횟수를 기록했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5만 번의 기도응답의 정확한 근거가 무엇이든, 기록에 의한 숫자는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18:22)490번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5만 번의 기도응답도 단순히 많은 응답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5만 번의 기도응답이라는 권면을 들을 때, 6만 번 응답받으면 더 훌륭하고, 4만 번 이하 응답받으면 조금 부족하다는 식으로 판단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기를 쓰며 기도에만 매 달리려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떤 목사님이 하루 5시간 이상 기도한다고 하면서, 직장을 가진 평신도들도 이처럼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설교를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기도는 호흡과 같으므로 쉬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루 몇 시간의 기도나 몇 번의 기도응답과 같은 숫자의 허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상 기도응답은 많을수록 좋지만, 몇 만 번씩 체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오는 일 년도 기도의 응답과 불응을 따지지 않도록 하옵소서. 응답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은 가장 좋게 응답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기도 응답 여부는 인간 인식 이상일 수 있다는 뜻이며, 이는 하나님의 실존과 은혜가 기도응답 여부를 뛰어넘는 범위임을 아는 바른 영성인 것입니다. 숫자를 헤아리거나 응답/불응답을 따질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뮬러 목사님의 예화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체험일 뿐이며, 모든 성도들이 경험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간증 또한 개인경험이지 모든 성도들의 공통경험일 수는 없습니다.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