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오지(五知)의 ‘비밀 그물’ - 그 서글픔이여!
[단상] 오지(五知)의 ‘비밀 그물’ - 그 서글픔이여!
♣ 시31:4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불현듯 옛일 서너 가지에 대한 상념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십팔사략 후한 양진(十八史略 後漢 楊震) 편에 나오는 사지(四知)입니다.
왕밀(王密)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추천해 준 상사 양진에게 금 10근의 뇌물을 바치며 ‘밤이 깊어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暮夜無知者).’라고 말하자 양진이 답한 말입니다.
『천지 지지 아지 자지 하위무지(天知 地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 고사(故事)는 ‘청렴’을 교훈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는 의미도 함께 깨우치고 있습니다.
둘째는 절영지연(絶纓之宴)입니다.
초나라 장왕이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갑자기 촛불이 꺼지고 어느 장군이 왕의 애첩을 희롱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애첩은 “나를 희롱한 자의 갓끈을 끊었으니 죄를 물으십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왕은 불을 켜지 못하게 한 후 모든 신하들에게 ‘즉각 갓 끈을 끊도록 명령’ 했습니다. 죄 지은 장군을 살리기 위한 기지였던 것입니다.
후일 전장에서 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 장군은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왕을 구출함으로써 전날의 은혜에 보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용서받기 힘든 불법을 범한 부하를 살린 왕의 큰 배포야말로 왕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함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 고사(故事)의 의미는 ‘지도자로서의 진정한 참 배포’입니다.
셋째는 주역(周易)의 한 구절입니다.
“덕이 모자란 사람이 지위가 높고 지혜가 적은 사람이 큰일을 꾀하면 화를 입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다.”(德微而位尊 智小而謀大 無禍者鮮矣)
덕이란 ‘인격’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지위나 계급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볼 때마다 덕은 눈 비비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소인배들이 높은 지위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것과 이로 인한 폐해가 오롯이 아랫사람들에게 미치는 부조리를 수시로 목도하게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소인배가 출세하면 국가와 사회에 막심한 손해’라는 뜻입니다.
절친하게 지내는 교회 친구 A가 회사에서 겪었던 실화(實話) 이야기입니다.
평범하지만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였던 A의 직급은 ‘이사 대우 부장급’이었으며 한 부서의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해 그룹의 승진심사위원으로 위촉받았답니다. 대상자를 추려서 승진시키는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마침 그룹 회장의 친척이 승진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 능력이 무척 부족한 자로서 심사대상 범위 밖의 서열이었음에도 편법으로 무리하게 포함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이 승진 후 수행해야 할 직무에 합당하지 못한 ‘그 사람’의 승진 선발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승진 이후 함께 일을 해야 할 해당 부서장(그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음)마저 “차라리 공석으로 운용하는 것이 낫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합니다.
‘그 사람’에 관한 모든 정황과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A 역시 지지하지 않았고(왜냐하면 같은 회사의 바로 옆 부서 근무),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습니다.
일단 그 일은 그냥 지나갔고 모두가 잊고 지냈다 합니다.
그런데 A가 근무하는 계열사에 사장이 새로 부임하면서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변하더랍니다. 신임 사장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방식으로 압박해 오더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임하기 전까지 A는 사장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다고 합니다. 직급이 높은 사장도 당연히 A를 몰랐답니다. 회사원이 수만 명에 이르고 계열사도 수십에 이르는 전국 규모의 대기업이었기에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인격모독적인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고 합니다.
【부임하기 이전까지 서로가 서로를 몰랐다. 생면부지와 마찬가지인 사장이 아무리 인격불비의 사람일지라도 이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사장의 독단적 판단으로 여기고 괴로워하며 고민하던 A의 처음 속마음이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혹시 사장도 어떤 영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혹시 그룹 회장???”
【친척의 승진을 성사시키지 못한 회장으로서는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승진선발에 힘을 보태지 않은 것에 대한 심기가 불편했을 수 있다.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퇴출시키고 싶었을는지 모른다!】
“오호라, 그룹 회장이여!!!”
어느 순간 눈꺼풀이 확 벗겨지는 것처럼 선후 정황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지더랍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용납되어서도 안 되는 사장의 도를 넘는 억압」이 오히려 모든 사실을 방증하는 단초가 되더랍니다.
사장은 회장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위치’입니다. 이런 사장을 요리하는 것쯤이야 회장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사장은 ‘회장이 시켰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습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극비사항이었을 것입니다. 사장이 함구하고 있는 한 누구도 회장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완벽한 ‘비밀 그물’입니다!
이처럼 정황이 정리되자 A는 심한 정신적 상실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합니다.
‘완벽한 비밀’이기를 바랐던 그룹 회장의 썩어빠진 속내는, 사지(四知)는 물론이요 오지(五知 = 하늘, 땅, 회장, 사장, A)마저 넘어서, 주변의 눈치 빠른 몇몇 사람들까지 알아버린 ‘공지사항’이 되고 말았다 합니다. ‘무척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절영지연(絶纓之宴)을 명령한 왕의 배포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그룹 회장의 배포를 비교하자 토하고 싶을 만큼 역겹더랍니다.
덕과 지혜가 없는 소인배(그룹 회장)의 출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선량한 회사원들에게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뼈저린 교훈이 아프게 와 닿더랍니다. |
그룹 회장과 사장의 추잡하기 짝이 없는 행동거지를 통하여 ‘세상 요지경 세태’의 더러운 짓거리에 넌더리나고 정나미 떨어진 A는, 저들과 함께 계속 일하고픈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결국 회사를 그만 두기로 했답니다.
마음을 정리하고 난 후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지극히 평안한 마음으로 회사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짠한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A의 행동을 어떻게 평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떠올랐고 ‘어쩌면 바른 평가가 필요할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히 행하는 자세가 곧 덕(인격)의 한 국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당신이 승리자입니다!”라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은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