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칭찬 받을 만한 이유(2)
[묵상] 칭찬 받을 만한 이유(2)
♣ 막14:3-9(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3절>)
묵상을 진행하는 내내, 성령께서는 “기념”이라는 단어를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더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9절).
(헬) ‘므네모쉬논’이 기억(memory) 또는 회상(recollection)을 뜻한다고 합니다만, 무엇을 기억하거나 회상하라는 말씀일까요?
먼저 “이 여자의 행한 일”을 고려해야 할 텐데, 이 문제는 앞에서 이미 살펴봤던 것처럼, ‘주님께는 장사를 예비한 것이요 제자들(무리)에게는 그냥 허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주님께 요긴한 것이 제자들(무리=교회)에게는 허비’라는 아주 묘한 원리를 도출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중심재물원리’(The principle of Jesus-Centered Material=JCM)라고 이름 붙여 봅니다.
이 원리의 특징은 ‘주님께 드려지는 재물은 무조건 사라져야 한다.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되면, 아무리 고르반이라 명명해도, 이는 결코 주님께 드려진 것이 아니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 향유사건 이후 2천 년이 흐른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기념”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리라 여겨집니다.
오늘날 십일조니 일천번제 헌금이니 신약성경에 털끝만한 근거도 없는 인간제도를 신앙의 진수인양 떠벌이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만, 이렇게 모인 재물은 하나님과 일체의 연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어마어마한 돈다발들은 전부 무리(교회)를 위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사례비니 성전(?) 건축비니 각종 운영비니 하는 데에 거의 다 소비해 버리고, 이웃을 위한 용처에는 겨우 생색만 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은 돈의 덕을 몽땅 교회 내 사람들이 다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인간이 재미보는 것이지요.
이제 여기서 구약의 바른 원리를 재적용해야 합니다. 구약 제사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만, 번제와 속죄제와 화제와 소제와 화목제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제사에 사용되는 희생제물은 흠 없고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인간이 맛보거나 손을 대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대부분 태워서 드렸으며 일부 나머지 제물을 제사장들만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가 도래되어 주님께서 구약의 모든 제물을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모든 제사를 완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제사는 필요가 없어졌고 응당 제물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제물 필요’라는 구약 원리가 ‘제물 불필요’라는 신약 원리로 변경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육체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신 이후부터는 더 이상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재물)은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일체의 고르반이 없습니다! 그 누가 무어라 강변해도 이 성경의 진리는 변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다양한 헌금과 헌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간 남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시대에도 ‘남은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당연히 신약시대에는 믿는 자 모두가 제사장들이므로 모든 성도들이 골고루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앞에서 살펴본 7절(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에 근거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소출(수입)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연보를 하게 됩니다. 응당 연보는 전부 이웃에게 사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의 “기념”이라는 단어는, ‘무명의 여인이 깨뜨린 옥합은 주님께만 가치가 있었고 제자들에게는 국물도 남겨지지 않았다.’는 진실을 참작할 때, ‘회상’으로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회상이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현재의 ‘실행’을 수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념하라.”는 명령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는 이 여인의 행동을 항상 회상하며 살아야 한다. 그 의미는 내게 드려진 것은 너희에게 국물도 없다는 것이다. 내게 드려진 재물은 전부 허비된다. 너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내게 드려진 재물에는 너희가 결코 손을 댈 수가 없단다. 이 여인의 행동이 이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이후로 이 여인의 향유 외에 내게 필요한 재물이 없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난 너희들의 재물 따위에 걸신들리지 않았다. 내게 재물 드리겠다며 고생하지 말거라. 다만 너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서로 연보하며 나누어라. 이것이 이 여인이 행한 일의 영적 의미이다. 잊지 말고 회상하거라!』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기념하라.”고 명하신 말씀의 진짜 뜻일 것입니다!
엉뚱한 종교적 망상에 빠져 허둥댈 것이 아니라 바르게 “기념”하는 슬기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