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거룩한 의문들

[의문 034] 성도에게는 목사를 호강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맑은바람청풍 2016. 10. 19. 09:58


[의문 034] 성도에게는 목사를 호강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 --> 

) --> 

6: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 

) --> 

교회에서 듣는 권면 중에 목사를 잘 섬기고 대접하라.”는 말이 으뜸을 차지할 것입니다. 특히 부흥회 초청강사들의 단골 멘트입니다.

) --> 

맛난 것 있으면 먼저 드시게 하고, 좋은 것 있으면 먼저 쓰시게 하라. 책도 사드리고, 옷도 사드리고, 자동차도 사드리고, 그 무엇이든 좋은 것은 몽땅 갖다 드려라. 대접한 것의 갑절로 되돌아온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 --> 

그러면서 들이대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 --> 

순수하고 순진한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니 진짜다!’라며 지극정성으로 준행합니다. 자기는 못 먹고 못 입어도, 목사에게는 때마다 철마다 가져다 바칩니다.

) --> 

약간 깐깐한 성도들은 좀 이상하다. 그러나 문자적 의미는 부정할 도리가 없을 듯하다.’며 찜찜해 합니다.

) --> 

보다 신중한 성도들은 잘못된 설명일 수 있다.’며 나름대로 연구합니다. 원어도 살펴보고, 주석도 찾아보고, 이런저런 자료도 참고해 봅니다.

) --> 

그러나 대부분의 자료가 좋은 것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이는 성도들이 목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근거로 유추될 수 있을 듯하여, 의기소침하게 됩니다.

) --> 

특히 잘 알려진 매튜 헨리 주석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 -->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치도록 임명된 사람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하사 내리신 좋은 것들로 가르치는 자들이 넉넉히 생활할 수 있도록 관대하고 기꺼이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 

 

전문 학자들의 주장이므로 반박하기가 여의치 않고, 그렇다고 동의하고 싶지도 않아 끙끙대다가, 겨우 조금 나은 설명을 발견했습니다.

호크마 주석인데, 대충 이런 설명입니다.

) --> 

가르침을 받는 자’(호 카테쿠메노스)그리스도의 교훈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 --> 

말씀을 가르치는 자’(호 카테쿤티)는 다른 서신서에서 교사로 번역된 디다스칼로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지는 불명확하다. 역시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 --> 

가르치는 자’(카테쿤티)교사’(디다스칼로이)의 구분에 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 --> 

(1) 목회자적 신분을 가진 동일 신분이라는 견해 : 갈라디아서가 다른 서신들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카테쿤티가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 --> 

(2) ‘카테쿤티는 보다 초기의 직분자들로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바나바와 디도 같은 사역자들과 교회가 임명한 장로들(14:33)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다스칼로이와는 달리 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전도 여행자를 뜻하는 것 같다.

) --> 

결국 (2)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 --> 

 

한편 본문에 사용된 나머지 3 단어의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매튜 헨리 주석 참조).

) --> 

모든 : 파스(pas) = 온갖, 각각의(all, every)

) --> 

좋은 것 : 아가도스(agathos) = 형용사와 실명사로 사용되며 사물이나 인격의 탁월이나 중요성을 표현. 헬라 철학에서는 도덕적 영적 고결, 헬레니즘과 성경에서는 구원을 의미하기도 함.

) --> 

함께 하라 : 코이노네오(koinoneo) = 나누어주다. 참여하다.

) --> 

) -->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아주 짧은 본문은 목사 호강시키는 것이 성도의 의무라는 코뚜레 구절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습니다. 각종 자료의 설명이 그렇고, 수시로 듣는 설명이 또한 그렇습니다.

) --> 

이제 아주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좋은 것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으로 한정되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 --> 

만약 성경이 좋은 것=물질을 의미한다면 이는 결국 부귀영화로 귀착됩니다. 5복이 되었든 7복이 되었든, 물질만능주의일 뿐입니다.

) --> 

좋은 것물질과 연관시킨다면 함께 하라.’는 말은 나누어 주다.’로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설명들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 --> 

하지만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시도해 봐야 합니다. ‘좋은 것물질과 연계시키지 말자는 것입니다.

) --> 

위에서 매튜 헨리 주석도 일면 좋은 것이 구원을 의미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좋은 것=구원이 성립된다면, ‘함께 하라는 단어는 참여하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좋은 것을 함께 하라.=구원에 참여하라.

) --> 

무슨 뜻이냐 하면, 성도들을 목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의무자로 볼 것이 아니라, 구원에 동참하는 동료로 보자는 의미입니다.

) --> 

 

성도=목사 생계부양자의 사고는 백성=(귀족)의 납세의무자의 아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저차원적 윤리(세상 제도)는 유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통치자 입장에서 유교사상보다 더 좋은 통치원리는 없습니다.

) --> 

나아가 주님께서 겨우 이런 현세적 윤리를 보장하기 위해, 성육신과 부활이라는 극한 고통을 통과하셨다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 --> 

보다 깊이 그리고 정확히 이해하신 분들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 

) --> 

) --> 

의문 : 성도들을 목사 생계부양 의무자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면 비성경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