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참 성도의 삶의 일면

맑은바람청풍 2016. 10. 18. 09:11


[묵상] 참 성도의 삶의 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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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38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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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형통복음(Prosperity Gospel) 내지 번영신학이라는 괴상한 이론을 마치 성경의 진리인양 떠벌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잘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거의 성경에 부합되는 진리인 것처럼 들리기 십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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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경은 결코 일부분으로 논리를 세워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전체를 보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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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성도의 삶 중에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전혀 형통이 아닌 고통의 삶, 나아가 때로는 저주의 삶처럼 보이는 그런 일면도 있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도 원치 않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신유사역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 38년 병자나 12년 혈루병 여인 등의 사례를 보고, 병에 걸린 모든 성도들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들이 비록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자신들의 믿음의 고백으로 고침받았지만, 예수님 당시의 모든 믿는 병자들의 공통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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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당시의 모든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역하실 때나 초대교회 시절의 모든 성도들의 질병사건들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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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신 바울의 경우를 통해, 성도라고해서 모두 신유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진실을 유추해 낼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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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참 성도일지라도 몸과 마음의 질병으로 고통받을 수 있고 때로는 치유를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유 체험 여부로써 참 성도 여부가 가려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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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편의상 질병을 예로 들었으나, 출세와 지식과 빈부 등 인간사 제반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편애를 입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월한 지위나 대우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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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유명해지고 부유하게 사는 것 즉 형통복음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은 성경이 지지하는 유일한 기독교적 가치가 전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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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할 나위없는 참 성도임에도 세상적으로 결코 형통한 삶을 살지 못했던 안나라는 여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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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주의를 끄는 부분은 대략 3가지 정도인 듯 한데, 2가지는 아주 간략히 살피고, 주제와 연계되는 1가지만 조금 상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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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안나가 선지자라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는 선지자들의 수를 남자 48, 여자 7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합니다. 남자의 명단은 차치하고 여자만 알아보면 사라, 미리암, 드보라, 아비가일, 훌다, 에스더 등 입니다. 사도 바울은 리브가를 한 명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9:12). (데이비드 해밀턴, Why Not Women?, 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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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약성경에 기록된 여선지자는 이곳의 안나와 빌립의 네 딸(21:9=예언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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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구약시대에 속하는 안나가 선지자였다면 그녀는 항상 성령께서 임재하고 계셨던 성도였음에도 불구하고(2:25절의 시므온 참조)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점만 지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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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38절의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40:2절과 연계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실 것처럼, 아기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세상 죄에서 구속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안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예언하는, 참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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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오늘의 주제와 연관된 나머지 부분에서의 안나의 불우한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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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선지자라니까 누구나 다 알아주는 유명한 여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 당시 안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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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은 예수님 승천 약 40-50년 후의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기록시점보다 약 70-80년 전의 사건입니다. 거의 1세기 후의 사람이 옛날을 회상하며 평가한 내용이 선지자였다는 것이지, 안나 생존 당시의 평가는 결코 아니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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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안나 당시의 여인들은 성전의 중요한 부분에는 들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겨우 여인의 이라는 제한된 곳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안나라고 해서 일반 여인들과 달리 특별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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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안나는 당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무명의 성도였습니다. 누가(그리고 누가에게 말해 준 모친 마리아와 베드로와 바울 등 일부 사도들 포함) 외에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런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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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겨우 7년 살고 사별하였습니다. 자식은 없었습니다. 아들 없는 여인의 서러움은 한나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삼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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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과부였다는 점입니다.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겠다며 황혼이혼도 불사하는 오늘날의 유복한 과부를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2천 년 전 유대 나라의 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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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과부에 대한 애틋한 관심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뜻은 불쌍히 여겨 보살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과부는, 고아 및 나그네와 더불어, ‘불쌍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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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애환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곳이 바로 룻기입니다. 보통은 룻의 시모에 대한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에 빗대어 이해하곤 하는 곳입니다만, 달리 보면 과부의 비참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기쁨)는 자신의 삶을 마라(=괴로움, 1:20)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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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매우 늙었다.”는 점입니다. 안나도 당시 유대인들의 평균 결혼 연령인 ‘15 ± α 고려한다면, 최소 15+7+84=106세의 초고령 과부였을 것입니다. 늙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충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입니다. 늙은 과부로서의 삶의 애환이 충분히 공감되겠기에 이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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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삶의 총정리입니다. 100여년 동안, 아들 하나 없이 과부로 살았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무명의 선지자가 바로 안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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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안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결코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묵묵히 하나님을 동행했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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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성도는 누구의 주목을 받지 못할지라도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안나처럼, 지극히 불행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과 처지가 어떠하든, 이들이야말로 참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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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초한 참 믿음을 지닌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얼토당토않은 형통복음 또는 번영신학이나 주절대는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어렵게 찾아낸 참 교사들의 모범을 본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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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스승들의 먼저 걸어간 길(=좁고 협착한 길)이 비록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다짐과 노력의 과정이 곧 오늘을 사는 참 성도의 가야할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