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좌로나 우로나
[묵상] 좌로나 우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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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5:32(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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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여러 원칙들 가운데 중립의 지혜도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는데, 공자는 이를 중용지도(中庸之道)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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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관점 즉 사관(史觀)에도 적용되는 듯합니다.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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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선생의 혜지(慧智)를 높이 평가합니다.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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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 전말을 다 아는 후손들에게는 지극히 타당한 결론이지만, 당시를 살았던 선조들에게는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매우 재미있는 설명이 가능하겠기에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실제 십만양병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선비의 공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국력과 정세를 전혀 감안하지 못한 허망한 방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가상 상황을 통해 접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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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양국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미묘합니다. 언제 악화될지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앞으로 독도 영유권 문제가 언제 어떤 방향으로 비화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향후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된다고 가정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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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국수주의 학자(‘저율곡’이라 하겠습니다)가 이런 주장을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에 한일 간 전쟁이 발발한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육군 50만, 해군 30만, 공군 20만의 규모로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 백만양병설(百萬養兵說)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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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율곡’의 이 주장에 귀 기울일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며 나아가 이를 정책으로 채택할 정당이나 정부도 없을 것입니다. 그냥 일개 외골수 학자의 넋두리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한국의 현 능력상 불가능한 일이요 둘째는 확실성을 보증할 수 없는 개인의 미래추측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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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율곡’의 십만양병설과 21세기 ‘저율곡’의 백만양병설은 판박이입니다! 똑같이 엉터리 주장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공통점(취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3가지 측면에서 조금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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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국제정세 판단의 미묘성입니다. 흔히들 정치란 마치 생물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예측과 판단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국제정치는 국내정치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정세판단에 골머리를 싸 맬 수밖에 없고, 만약 오판했을 경우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합니다. 19세기말 대원군의 국제정세 판단실패(쇄국정책)에 따른 대가를 지금까지 후손들이 고스란히 지불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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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직전 조선 정부도 시세의 미묘함을 눈치 채고 통신사를 파견하여 왜국의 정세를 정탐합니다.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판단)는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후손)는 쉽게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고한 측을 나무랍니다만, 그들도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쟁발발 가능성을 함부로 발표했을 때 예상되는 혼란을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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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왜국의 침공 여부에 대한 정세판단이 모호한 가운데, 나라의 안정을 희구하는 세력이, 불안을 조성하는 율곡을 반대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당시 조정 입장에서 율곡의 주장은 선뜻 선택하기 힘들었다는 현실을 짚어 내어야 합니다.
○ 둘째, 병력수의 문제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개병제로서 누구나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합니다. 4500만 인구에서 60만 병력을 염출해 내고 있습니다. 약 1.3% 수준입니다. 가장 활동력이 왕성한 20대 초반의 국민 1.3%를 현역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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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의 인구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거는 없지만 약 1000만 명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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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집약적이며 저효율적인 산업구조였던 임진왜란 당시 인구 1000만 명으로써, 10만 명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인원 염출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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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재정 측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력이 세계 10위권을 넘나든다지만, 60만 병력 유지가 만만치 않으며, 하물며 100만 군사력 건설 및 유지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재정을 감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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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60만 병력유지를 위한 정부재정 대비 국방비 규모는 약 15% 수준인 것으로 압니다(한때 35%에 이르렀던 국방비가 이 수준으로 낮아진 데에는, 율곡을 반대했던 자들의 논리와 동일한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어느 시대든 국방비 감축 주장은 훨씬 더 애국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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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100만 군사력을 유지하려 한다면 현 국가재정의 40-50% 이상을 지속적으로 쏟아 부어야 한다는 계산입니다. 경제/문화/교육/사회보장 등에 소요되는 긴요한 재정소요들은 어찌하고, 발발 여부를 알지도 못하는 미래 전쟁에 대비하여, 국가예산의 절반 이상을 투자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됩니다. 이런 계획은 발표되자마자 거국적인 반대에 직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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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대 후반부의 조선의 경제상황은 10만 병력을 유지하는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참으로 가난한 시기에, 십만양병설은 실행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일지라도 100만 군대를 유지할 수 없는 것과 전혀 동일한 논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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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은, 역사적 정답을 알고 있는 후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당시를 살고 있던 조상들의 입장에서 판단 및 평가해야 합니다. 당시의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 10만의 병력 염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특히 막대한 재정소요를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선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의 정치지도력(국제정세판단력)도 형편없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를 종합평가해야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실현 가능성 영(zero)에 가까운 엉터리 정책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해석이 바로 역사를 보는 중용의 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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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됩니다. 병자호란의 처절한 체험을 근거로, 북벌정책을 추진했던 효종의 실패가 율곡의 십만양병설의 허구성을 그대로 증명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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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벌정책의 관건은 병력증원과 재원조달이었습니다. 일차적으로 어영군 7천을 2만 1천 명으로 보강하고, 순차적으로 10만 양성을 도모했습니다. 이때 인원확충이 여의치 않아 도망 노비 색출 작업까지 전개했습니다(노비추쇄도감). 그러나 이 정책은 재원이 확보되지 않아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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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의 강력한 추진력이 뒷받침된 북벌정책의 실패를 통해, 선조와 집권층의 지지도 없었던 십만양병설의 당연한 실패 가능성을 짚어내지 못한다면 학자의 면모에 커다란 흠이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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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반세기 정도의 시차밖에 나지 않는 선조 및 효종 시대는, 공히 10만 군대양성에 필요한 인원과 재원 염출이 결코 쉽지 않았던 시대였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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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인 우리가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머문다면, 위와 같이 당시를 고려치 않은 엉뚱한 오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율곡의 애국심과 예지만 높일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한 역사 이해를 도모해야 합니다. 율곡을 과도히 미화하는 역사해석(우리가 배워온 것)은 매우 부정확한 것입니다. 냉정하게 중립의 자세에서 새로이 검토(해석)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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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도 이와 유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중용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을 통해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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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여호와의 명령’은 당연히 율법을 가리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모세오경의 초안을 의미합니다. 비록 이 시기가 광야생활의 막바지이기는 하지만, 신명기가 완성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고, 내용 또한 조금 더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삼가 행하라.’는 것은 율법을 준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율법의 범위 안에서의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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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을, ‘기독교와 세상 사이의 긴장관계’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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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은 세상 사람까지 포괄하지만, 일차적(어떤 의미에서는 궁극적)으로는 교회 내의 성도가 우선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좌로나 우로나”의 뜻은, 세상 가치와 성경 가치 사이의 선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경 가치 내에서의 옳고 그름에 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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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가치 내에서, 좌우(左右)의 예 중의 하나가 바로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성경은 시종일관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시면서, 동시에 마음을 드릴 것도 요구하십니다. 머리(이성)로 하나님을 알고, 가슴(감성)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인 기독신앙의 요체는, 머리와 가슴을 넘어, 사지백체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즉, 삶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진실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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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은 물론이요 신약의 기독교 역사 역시 끊임없는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의 격돌의 발자취입니다. 어떤 이는 오직 성경의 문자적 의미만을 추구합니다. 또 다른 이는 오직 감성적인 체험만을 추구합니다. 모두가 한 편으로 치우친 잘못된 현상임을 모르는 체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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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경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를 동시에 경계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경계하시듯, 어느 한 쪽에 경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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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신앙의 편당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율법주의나 신비주의입니다. 비록 부분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 할지라도, 지나치게 어느 한쪽에 심취하는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으로서, 엄히 경계하며 중용의 길을 가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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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신앙에 있어서 율법주의나 신비주의 등 일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후손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무비판적으로 극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균형감을 잃은 무모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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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신앙은 항상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힘입어 건실하게 성장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