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성도의 주초(酒草)문제(3)

맑은바람청풍 2016. 9. 9. 09:20


[단상] 성도의 주초(酒草)문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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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금지론의 오해 - 비논리적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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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구절 =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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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관한 제반 견해 중에는 전혀 비논리적인 주장이 많습니다. 주초문제를 검토하다보면 수시로 접하게 되는 잘 알려진 주장 3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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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술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라는 글(출처:http://cafe.daum.net/Jesus1004you/기독자료) 중의 2. 성경에서 술을 뭐라고 하나? 1) 어원적 고찰도 그 일례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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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에서 제일 쟁점이 되는 음주 문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실 때 포도주를 썼느냐, 포도즙을 썼느냐 하는 문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만드신 것은 감즙류(甘汁類)인 포도즙이다. 주류 전체의 일반적 명칭은 구약에서는 야인이라 하고, 신약에서는 오이노스라고 하는데 발효성 술과 비 발효성 즙을 포함한 뜻을 가지고 있다. 옛 유대인들은 혼인잔치에 순 포도송이와 포도즙만을 사용했고, 알콜 성분의 주류는 사용치 않았다. 그들은 효소가 부패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여겨 새 출발하는 혼인잔치에는 사용치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만드신 것은 알콜 성분이 없는 맛 좋은 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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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설명은 전형적인 속단의 일례입니다. ‘어찌하든 금주가 옳다는 주장을 증명받고 싶다.’는 무모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반지성적 논리라는 사실마저 망각한 최면 현상입니다. 가나혼인잔치 주관자 연회장(宴會長)이 사용한 단어 3개만 유의한다면 간단히 이해됩니다. 좋은 포도주낮은 것취한 후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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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란 포도즙을 발효시킨 것입니다. 포도주의 질은 발효방법과 숙성시간에 의존합니다. “좋은 포도주란 오랜 시간 숙성되어 알콜 농도가 높은 진짜 포도주를 지칭합니다. 반대로 낮은 것은 숙성시간이 짧고 발효가 덜 되어 텁텁한 포도주를 말합니다. 금방 짠 감즙류 포도즙을 질 좋은 포도주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인용하면서까지 어설프게 왜곡시킬 필요조차 없는 아주 평범한 상식이자 정확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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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처럼 명확한 상식에도 불구하고, 주석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금주 불허논리를 고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간절한 기대(=자의적인 해석)취한 후에라는 단어에 의해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는 허망한 곡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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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메뛰오’(methuo)는 그냥 술 취하다.’의 뜻입니다. 영어는 ‘have well drunk 또는 to drink to intoxication’로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든 영어든 알콜에 의한 취기를 전제로 한 의미입니다. ‘취함은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본문은 그 원인을 먼저 마신 좋은 포도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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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이 한 말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먼저 좋은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취하게 한 후에입니다! 물론 그의 말은 술 취한 후에는 술맛을 모른다.’는 잠재 의미까지를 암시합니다. 한 마디로 연회장의 말은 오랫동안 잘 숙성되어 빛깔 좋고 알콜 도수 높은 양질의 포도주를 지칭한 것입니다. 전혀 헷갈릴 이유가 없는 명쾌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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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미련 버리지 못한 분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위의 주장=현 시점에서는 논증 불가함)을 들먹이거나 성령에 취할 수도 있다는 영해(靈解) 기법까지 동원하고 싶겠지만, 이는 좋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능력을 상실한 오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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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논리에 빠져, ‘알콜 성분이 없는 포도즙으로는 결코 취할 수 없다.’는 자연현상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수시로 제기하는 정말 난처한 문제들을 접했을 때 과연 어찌하려는지, 심히 걱정된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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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경 해석은 불가불 다양한 이해를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제한된 인간 지성이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때론 자신이 이해하는 내용이 전부일 것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억지맞춤 논리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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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 억지맞춤 논리는 홍해사건 해석에서 발견됩니다. , 아주 머리 좋은 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홍해를 얕은 갈대밭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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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주장의 핵심은 깊은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이적은 인정할 수 없고, 아마도 얕은 갈대바다를 건넌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럴듯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이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억지맞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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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남녀노소/오합지졸/남부여대로 표현할 수 있는 모습으로서, 육지 행군은 물론 바다 횡단에 지극히 부적합한 행렬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애굽 군대는 모두 건장한 병사들이었고 전차(병거)도 짐수레보다는 경량고기능성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두 집단 중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쪽은 애굽 병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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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단 모두 허벅지 정도 빠지는 얕은 갈대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겨우 걸음마하는 이스라엘 아이들은 한 명도 빠져 죽지 않았습니다. 건장한 애굽 병사들은 전원이 익사했습니다(14:28). ‘접시 물에 빠져 죽는다.’는 표현이 훨씬 그럴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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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이론이야말로 전형적인 억지맞춤으로서 결코 신뢰할 수 없는 허황된 이론입니다. 아무리 지능지수가 높고 학식이 많은 전문가들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포도즙/포도주억지맞춤 논리에 함몰된 일례입니다. 성경을 고려하지 않고 미리 작정된 자신의 기대에 얽매일 경우, 주초는 억지맞춤 논리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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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예화를 통한 억지맞춤 논리의 위험성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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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불가론자들이 의기양양하게 인용하는 예화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유명한 애연가였던 찰스 스펄전의 경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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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은 한 때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크리스천 흡연가들은 스펄전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흡연을 합리화시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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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스펄전이 한 가게 앞을 지나다가 아주 충격적인 광고를 보았다. 바로 가게 유리창에 스펄전의 담배라는 문구와 함께 담배를 선전하는 광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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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스펄전이 주님을 전하는 사람인 것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기억한 것이다. 그 광고를 본 후 스펄전은 자신의 고집스런 습관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는 것을 알고 금연할 것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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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의 우리의 행동은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 다녀도 이런 것쯤은 해도 된다.’고 말하며 우리가 그들과 같이 즐겨주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들이 하는 행동들을 하게 될 때 그들은 내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실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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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심하게 살핀다면 잘못된 인식임을 알게 됩니다. 2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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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스펄전은 금연했을 때는 물론이요 흡연기간 동안에도 분명한 성도(그것도 지도자인 목사)였다는 사실입니다. 흡연기에도 성도의 자격이 유보되지 않았고 목사의 직무가 정지되지 않았습니다. 금연 이후에 그의 설교가 살아나고 영향력이 증대된 것이 아닙니다. 금연 이전에도 동일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흡연이 스펄전의 직무(설교)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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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신자들이 성도들에게 실망하는 원인 중에서 주초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미미하다는 점입니다. 성도들은 스님들이 주초를 안 한다고 해서 위대하다/훌륭하다/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초와 스님존경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주초와 무관하게 스님을 존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주초문제도 불신자들에게 동일하게 작용될 뿐입니다. 약간의 부정적 감정을 유발한다 할지라도, 이는 영광이나 영향력에 직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신자가 성도에게 실망하는 진짜 원인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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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의 예화는 갈대밭 이론처럼 억지맞춤 논리에 빠진 예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한 범위 이상은 수용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잘못된(편협한)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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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위 예화는 현상의 본질과 경중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면하기 어렵습니다. 지극히 지엽적인 것을 지나치게 확대한 사례(針小棒大)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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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참 영향력이 회복되기를 바란다면 우리 성도들의 의식전환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연시 해 왔던 것들과 부정적으로 여겼던 것들을 성경에 비추어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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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과정을 거친다면, 주초는 금기항목에서 제외시키거나 아니면 그 가치 수준을 크게 하향조정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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