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
[묵상]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
) -->
) -->
♣ 말1: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 -->
) -->
홀로그램 사진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과 색깔이 달라집니다. 매우 다양하여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 -->
어떤 면에서는 성경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읽을 때는 한 가지 교훈에 만족하고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 -->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읽으면 ‘아하, 이런 뜻이 더 있었구나.’하며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너무 신기합니다.
) -->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한 곳일 듯싶습니다. 본문은 난해 구절로 취급되기도 하고, 많은 설교의 본문 내지 보충문으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 -->
그 중에서 가장 나쁜 해석이 있습니다. 일부 외골수 칼빈주의자들의 오해인데,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의 증거구절로 착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 -->
‘내 맘대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아주 쉽게 생각해버립니다.
) -->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주권’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곤 합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합니다.
) -->
그러나 홀로그래프의 교훈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칼빈주의적 해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간 차원의 지능으로 크게 오해한 결과입니다.
) -->
만약 본문을 ‘절대주권’ 하나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폭군’ 이미지가 될 수밖에 없어집니다. 동서양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막강권력을 휘둘렀던 절대군주들과 유사한 이미지 말입니다.
) -->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를 통달할 방법은 없지만, 제한적이나마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은 알고 있습니다. 영원, 전능, 전지, 공의, 사랑, 용서 등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 -->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느 한 가지 속성만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사랑만의 하나님일 수 없고, 공의만의 하나님일 수도 없습니다.
) -->
다른 모든 속성들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 -->
앞서 지적했듯이 본문에 대한 칼빈주의적 해석의 가장 큰 과오는 오직 ‘절대주권’만으로 해석했다는 점인데, 사려깊은 성도라면 최소한 2가지 속성을 더 고려할 것입니다. 공의와 전지입니다.
) -->
‘공의’란 공평과 동의어입니다. 누구에게도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고 똑같은 룰을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 -->
“야곱아 너는 이유없이 귀엽다. 무조건 천국가라. 에서야 넌 주는 것 없이 밉다. 지옥가라. 난 하나님이니까 절대주권으로 결정했다. 어때 공평하지?”
) -->
이러한 이해는 절대주권에는 부합되겠지만 공평과는 배치되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공의의 하나님과도 맞지 않는 현상입니다.
) -->
‘전지’란 ‘모든 것을 아시는 능력’입니다.
) -->
여기서 ‘모든 것’의 범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공간적으로는 ‘우주’를 포괄하며, 시간적으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를 포함합니다.
) -->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하나님의 전지성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조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 -->
하나님은 폭군처럼 강압적인 절대주권을 행사하여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소한 에서에게도 야곱처럼 ‘돌아올 경우의 용납’은 허락되었어야 합니다.
) -->
뉘우치고 돌아왔는데도 ‘넌 이미 결정됐으니 안 돼!’라고 한다면 이는 공평한 처사가 아닙니다. 공의에 반합니다.
) -->
야곱과 에서의 일생을 다시 살펴야 합니다. 야곱은 잘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남을 무수히 속였고 또 남에게 속기도 많이 했습니다. 살기 위해 부모도 떠났습니다. 꾸역꾸역 자기 욕심만 채웠습니다.
) -->
반면 에서는 남자다웠습니다. 포용력도 있었습니다. 부모를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 -->
에서와 야곱의 삶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로 돌아왔느냐 아니냐.’는 것뿐입니다. 야곱은 만신창이와 같은 삶을 살았을망정 결국은 절름발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에서는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 -->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들의 일생 전체를 알고 계셨습니다. 전지하시기 때문입니다.
) -->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의 일생 전체를 보고 판정하셨습니다.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 -->
미리 입력시켜 놓은 각본 때문도 아니요 절대주권을 휘둘러 에서로부터 선택의 기회마저 박탈하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 -->
야곱과 에서 모두는,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고,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했습니다.
) -->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기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
) -->
신약에 와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눅15:11-32).
) -->
둘째는 아버지를 떠나 온갖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야곱처럼 말입니다. 맏이는 아버지 집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혼신을 다해 일했습니다. 에서와 비슷합니다.
) -->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왔으나 맏이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
우리 신앙의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느냐 아니냐.’입니다.
) -->
구약에서 “내게로 돌아오라.”(호12:6; 14:1) 절규하셨던 여호와께서는, 신약에서도 “오라.”(마11:28)고 외치십니다. 돼지우리의 오물로 범벅이 되었든, 공적은커녕 무수한 과오만 넘쳐날 뿐이든, 그냥 돌아오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 -->
) -->
오늘 본문을 칼빈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좁아터진 의미로 제한시킬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없이 오직 돌아오기만 하면 다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슬기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깊은 의미를 더 음미해야 할 귀한 구절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