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엄한 비판이 어설픈 사랑보다 낫다!
[묵상] 엄한 비판이 어설픈 사랑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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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27:5-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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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에 걸쳐 ‘비판의 필요성’에 대해 묵상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된 무한사랑론과 용서만능론을 불식시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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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성도들 특히 지도자인 목회자들의 과오가 아무리 명백하더라도 이것을 지적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정말 이래서야 되겠는가? 제발 고치자!’는 충정의 권면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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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강력한 역공 펼치기가 일쑤인데, 그 전형적인 반응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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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없는 사람은 없다. 너도 죄인이다. 다 같은 죄인 주제에 지적할 자격 없다.
○ 왜 네 눈의 들보는 놔두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느냐?
○ 성경은 오직 사랑만 하고 무조건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신다.
○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다. 스스로 심판자인양 주제넘게 날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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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이야 다양하지만 요지는 하나입니다. 앞서 말한 무한사랑론이요 용서만능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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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에 빠진 사람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즉, 이 이론을 주장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확신합니다. 조금이라도 반대하면 어리석은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고 매도합니다. 심하면 사악한 영에 사로잡힌 멸망의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원시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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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이해와 자세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성경에 어긋나는 것인지를 납득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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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염두에 두고, 구약 몇 구절의 문자적 의미에 유념하면서, 조명받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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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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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면책”(面責)이라는 말은 용서만능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비판’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실제적 의미는 ‘사실을 폭로하여 책망하고 징계하다.’입니다.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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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사전 : 대면한 자리에서 책망함.
○ 영어사전 : rebuke(비난하다. 꾸짖다)
○ 히브리사전 : 면(갈라=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 + 책(토케하=논증, 책망, 견책, 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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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통책”(痛責)이라는 말 역시 ‘비판’을 의미합니다. ‘엄하게 꾸짖음’이라는 뜻인데, 이건 어설픈 꾸지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상처가 날 정도의 혹독한 꾸지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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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사전 : 엄책, 엄하게 꾸짖음.
○ 영어사전 : wounds(부상, 고통, 상처)
○ 히브리사전 : 페차(타박상,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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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제역(NIV)은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Better is open rebuke than hidden love. Wounds from a friend can be trusted, but an enemy multiplies ki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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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핀 단어와 영어성경을 비교하면서 본문을 재해석한다면 이렇게 번역(私譯)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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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징계하는 것은 입술에 발린(숨겨진) 사랑보다 낫다. 친구를 상처가 날 정도로 엄하게 꾸짖는 것은 신뢰(충성=변함없음. 신실함)를 구축하지만, 원수는 부드러운 입맞춤(거짓 사랑)만 남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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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9:17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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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책선”(責善)의 히브리어는 ‘야카흐’인데 그 뜻은 ‘결정/판단/심판/입증/징계하다. 꾸짖다.’입니다. 영어성경은 rebuke으로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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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뜻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고 또 이웃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방법은 반드시(frankly=솔직하게, 숨김없이) 꾸짖는 것입니다. ‘엄한 비판’입니다(* 이 구절을 엉뚱하게 오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성경 각주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웃의 죄를 지나치게 비방하지 말고 그의 죄를 같이 분담하며 권면하라.’는 뜻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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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 더 살피겠습니다. 잠28:23절은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책”은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음’이라는 뜻입니다. ‘눈물 쏙 빠지도록 꾸짖는 자(경책하는 자)가 잘못을 눈감고 넘어가는 자(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더 낫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태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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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에 걸쳐 ‘비판의 불가피성’을 역설해 봤으나 동의하는 이들은 소수였고 신경질적인 반론이 주였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비판하더라도 사랑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공자 말씀 같은 사족을 달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판에 앞서 사랑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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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험은 말합니다.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과오를 수정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부인하거나 변명하거나 핑계 대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심지어 섬뜩한 적의를 내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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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참지 못하는 이들은 무한사랑론과 용서만능론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용감하게 빼들곤 합니다. “그 어떤 잘못이라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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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경은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들의 잘못은 반드시 지적하여 고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핀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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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명백한 잘못을 지적해 줘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디도서3:10절의 적용여부를 심각히 검토해 보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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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은 능사가 아니며 다반사로 행사해도 안 되고, 피치 못할 경우일지라도 아주 신중하게(성경적으로는 형제 사랑의 마음으로) 실행해야 하는 어려운 강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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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도 언젠가는 비판을 스스럼없이 수용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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