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성경 거꾸로 읽기(2) - 요셉의 형통

맑은바람청풍 2016. 8. 23. 11:58


[묵상] 성경 거꾸로 읽기(2) - 요셉의 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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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39:1-3(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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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부나 중고등부 등의 교회학교에서 청소년들은 요셉에 관한 설교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요셉을 비전의 대명사인 양 소개하며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비전을 품는 자가 되라고 격려하곤 합니다. 이는 옳은 일이고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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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셉의 비전을 공부할 때 아주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형통을 마치 알라딘의 램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요셉은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쉽게 애굽 총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를 받아들이는 학생들 측면에서, 요셉의 비전을 그의 인생 말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달리 말하면 요셉의 중간의 삶은 대충 넘어가고 오직 애굽 총리 요셉만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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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요행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론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과정 또한 소홀히 하거나 망각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비전을 다룸에 있어 우리는 자칫 이 점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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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늘은 요셉의 비전과 형통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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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이란 무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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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이 포함된 창세기 39장에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3번 나옵니다(2, 3, 23). 사전은 형통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되어 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형통이란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뭔가를 이루는 상태라고 짐작해 버리곤 합니다. 더욱이 뜻대로자기 뜻대로라고 해석함으로써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형통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 되어 버립니다.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버린다는 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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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씀하시는 형통은 사전적 의미는 물론 아전인수식 의미와도 다릅니다. 저는 성경해석의 제1원리는 뭐니뭐니해도 모든 말씀과 의미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개인적으로 이것을 하나님 관계적 용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형통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측면에서의 형통이라는 단어는 과연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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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됨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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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자는 요셉을 깊이 연구하여 예수님을 닮은 점 19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배반당할 수 없는 형제들로부터 배반당한 것이라든지, 애굽 총리가 되어 야곱의 식구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보면 정말로 많이 닮았습니다. 허기야 성경에 나오는 인물 대부분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아주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요셉하면 마냥 긍정적인 이미지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 자신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으며 그의 삶의 여정에는 고뇌와 난관이 무척 많았습니다. 평소 우리가 잘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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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요셉에게도 여러 가지의 단점이 있었습니다.


37:2절입니다.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고 하십니다. , 요셉은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때로는 고자질이 필요할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고자질은 권장할만한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아비의 과실을 형제들에게 고했다가 저주받은 사실을 생각할 때, 요셉의 고자질도 긍정적인 의미로만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요셉에게는 고자질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이는 장점이라기보다 오히려 단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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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7:5 9절에 보면, 꿈을 두 번 꾸고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자랑합니다. 아직 어린 나이라 판단력이 부족하여 그러려니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계시를 잘 간직하려는 신중함이 결여된 성격인 것입니다. 형제들이 극단적으로 반발하게 되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요셉의 경망스러운 일면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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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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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아주 늙어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채색옷을 지어 입히는 등 다른 형제들과 차별 대우를 합니다. 아버지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는 일종의 편애로서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만한 점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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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불평이나 원망을 안으로 갈무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일정 기간은 참기 힘든 역경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환경과 처지를 밖으로 표출하기보다 참아 인내했습니다. 아주 좋은 장점입니다.

요셉은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종이면 종으로서, 감옥에 투옥된 죄수면 죄수로서, 그 현장에서 필요한 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긍정적인 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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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비전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은혜)를 발견하는 영성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45:8절의 고백은 그래서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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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요셉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좋은 장점도 많이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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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13년간의 삶은 원통이었다.

초년시절, 아버지의 편애로 인하여 형제들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시기와 질투로부터 촉발된 이 현상은 결국 목숨을 위협 당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고 맙니다. 울며 애걸복걸하지만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이 당시 요셉이 느꼈던 공포를 후일 그 형제들이 스스로의 입으로 잘 대변 합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형제들의 배신으로 엄청난 괴로움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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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고관인 보디발의 집에서 형편이 나아졌으나 주인 아내의 성적 유혹에 시달립니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여인의 달콤한 유혹은 피 끓는 청년에게 고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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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죄 없이 투옥된 상태에서도 요셉은 긍정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도소장의 눈에 띄어 또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다 투옥된 바로의 요리담당관과 술담당관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해몽대로 되지만, 술담당관의 망각으로 2년 더 옥살이를 합니다.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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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은 17세로부터 30세까지의 13년입니다. 13년 동안의 요셉의 삶은 어떤 것이었나요? 목숨을 위협받고 손해보고 부당한 대우받고 속임 당한 기간이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한 기간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요셉의 입장이었다면 어찌했을까요? 저의 인품과 믿음으로 볼 때, 아마도 억울하다며 길길이 날뛰고 원망하고 난리였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만큼 억울한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요셉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 될까요? , 바로 원통입니다!!! 요셉의 13년간의 삶은 원통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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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선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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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의 삶에 대하여 단 한번도 억울하다거나 원통한 삶이라고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직 형통한 삶이라고만 하십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워 진저리쳐질 지경인데도 성경에서는 형통이라고만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분명 원통인데, 성경은 형통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그냥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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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요셉의 삶을 통해 깨우친 하나님의 형통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로 하겠습니다. ‘형통이란,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것이며, 손해보는 것이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며,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와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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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각으로는 분명 고통이며 원통이어야 할 상황을 하나님은 반대로 형통이라고 선언하시는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39장에 3번 나오는 형통이라는 단어를 수식하고 있는 어떤 말씀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또는 임마누엘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의 삶을 형통이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는 진리에 근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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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라고 해서 혈육 지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요셉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고 더욱이 피끓는 젊은이였기에, 때로는 처한 환경 때문에 괴로워했고 고민했고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울분을 삭일 수 없을 정도로 억울했을 것이고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인내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요 비전의 인물이라 해도 주변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난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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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요셉의 삶이 형통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이 곧 형통이라고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의미하시는 형통을 뜻을 알았으니 그래도 형통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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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기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품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동반됩니다. 성경의 무수한 증인들의 삶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은 성도의 또 다른 표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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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처럼 비전의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만약 진심이라면 고통당할 것을 각오하십시오. 성경의 증거로 보건데, 고난 없이 비전을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선지자들도, 오늘 묵상한 요셉도, 그 누구도 고통의 터널을 비껴간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의 비전이란 고난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비전은 장미빛 결과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은 가시와 같은 고난과 원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과 고통이 있더라도 이를 참아 인내하겠다는 각오가 선 사람만이 비전을 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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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당하는 성도의 억울함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납득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참으십시오. 참아야만 합니다. 신음소리를 내며 울며 몸부림치며 인내해야 합니다. 다만, 혼자의 힘으로 하지는 마십시오.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요셉을 통해 배우신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고통스러운 현실을 결코 원통으로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이는 형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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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이것을 알았기에, 성경은 요셉을 형통의 사람이요 비전의 사람이었다고 증거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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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9-21절에 기록된 요셉의 신앙고백을 함께 읽으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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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