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묵상

[묵상] 비판(2), 완전 금지된 선악과와 같은 것인가?

맑은바람청풍 2016. 7. 29. 13:29


[묵상] 비판(2), 완전 금지된 선악과와 같은 것인가?

[본문 =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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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아주 유사한 구절은 아무래도 롬2:1-8절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남을 판단하는 자에 대한 질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이 구절만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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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장에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는현실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 사례로서, 먼저 동성애를 지적하고(1:26-27), 이어서 21가지의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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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32절 하반절에서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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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1절의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일반론적인 대명사가 아니라 1::32절의 옳다 판정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지시 대명사로 보아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악한 사람이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2:1-8절은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까지를 금하면서 오직 묵인과 침묵을 강조한 말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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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구절은 무조건적인 묵인과 침묵이 하나님의 본뜻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도는 선한 지혜를 사용하여 잘 살펴야 함을 간접적으로 교훈하는 말씀으로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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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유사한 또 다른 곳은 약4:11-12입니다. 여기서도 비방과 판단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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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제한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절은 최소한 4장 전체를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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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절에서 싸움의 원인은 정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정욕이란 세상적인 것(마귀적인 것을 의미합니다)을 지칭합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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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7절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십니다. , 여기서 하나님과 마귀를 구별하려면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알 수가 없겠지요?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말씀)입니다. , 하나님이십니다(12). 그렇다면, 지혜에 비추어 진리와 거짓을 구분해야만 합니다. 이는 판단권의 문제가 아니라 슬기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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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에서는 허탄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것이요 마귀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바로 정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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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4:11-12절 말씀의 전반적인 의미는, 세상적인 정욕을 위한 싸움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무조건적인 비판(구분 내지 판단) 금지를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슬기롭게 진리와 허위를 잘 분간하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뜻입니다(고전6:1-5절을 별도로 묵상해 보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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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신 일이 있습니다(21:12, 11:15, 2:14). 이때 예수님께서는 매우 화를 내시며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대상은 성전에서 제사에 도움을 주는 이들이었습니다. , 매매하는 자들/돈 바꾸는 자들/비둘기파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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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쉽게 성전에서는 매매나 환전을 해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14:25-26절에 보면 예루살렘과 너무 멀리 떨어져서 제물을 가지고 갈 수 없는 경우에는 대신 돈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에서 제물을 사도록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통용 화폐인 로마 또는 헬라 돈을 이스라엘 화폐로 바꾸는 것도 타당성이 있습니다(우상의 그림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들 화폐는 성전에 바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매매나 환전은 용납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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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들이 비록 타당한 일을 하고는 있으나, 적용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이들 상인들은 제사장들과 짜고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심한 경우 15배의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청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뜻은 이들의 물질/세속/종교주의적 현상을 청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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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질책 받아야 할 나쁜 현상입니다. 어찌 보면, 현상 자체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꾸지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속 마음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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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예수님도 비판을 하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용에 관한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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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비판 자체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내용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허위를 조장하여 남을 비판하는 것은 엄격히 금해야 합니다만, 진리를 왜곡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문제는 절대로 그냥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때는 과감히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의무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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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는 또 예수님께서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민망할 정도로 비판하는 것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23:33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극단적인 비판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꾸짖으신 경우도 많았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의 이러한 언행은 비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무조건적인 비판금지를 명령하고 있다고 지레 짐작하는 것은 큰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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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예로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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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죄를 범한 후,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 나단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시편51편이 바로 이 사건을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만약 여기서 나단의 비판이 없었다면 다윗이 스스로 잘못을 알고 회개하였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쳐는 주셨겠지요. 하지만 나단의 비판을 너무 무가치하게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옳은 비판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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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솔로몬은 반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은총을 받아 가장 지혜롭고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에게는 옳은 비판자가 없었습니다. 천 명에 이르는 왕비들을 거느리며 늙어서 이방신을 섬기는 과오를 범할 때, 아무도 이를 비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찢어지는 원인제공의 비극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더욱 분명한 예입니다. 늙은 신하들의 옳은 비판은 묵살하고 젊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나라가 나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요. 참 비판의 중요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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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역사에 기록된 모든 지도자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옳은 비판에 귀 기울인 자들은 성공하였고 무시한 자들은 실패하였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비판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이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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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 무조건적인 비판금지가 옳은 것이 아니라, 진실한 비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진실한 비판과 허위의 비판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전제조건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비판은 성도들이 머리속에서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으로 금지된 선악과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며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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