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담쟁이덩굴의 두 얼굴

맑은바람청풍 2016. 7. 14. 19:30


[단상] 담쟁이덩굴의 두 얼굴



2015년 2월 어느날 서울 유명교회 주보에는 도종환 씨의 ‘담쟁이’라는 시가 실렸습니다.


전문은 이렇습니다.


< 詩 : 담쟁이 / 도종환 >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시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은 중병이 든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며 읊었던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뚝 선 사람입니다. 영화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아내 사랑은 진정이었을 것이며 진한 서정성이 독자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시인은 자신의 사상적 소회를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의 행보에 이용가치를 느낀 모 정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선출하였습니다. 현재 정치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인의 가정사나 정치적 성향을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그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별 의미도 없는 담쟁이라는 시를 왜 교회 주보에 실었는가?’라는 의구심 때문에 언급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담쟁이’ 시는 정치적 관점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있는 사상시라 하겠습니다.


시인의 독단적인 관점을 살피기 위해 조금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시인은 담쟁이를 ‘불굴의 의지를 지닌 투사’로 의인화하였습니다. 부연한다면 ‘벽은 담쟁이를 막아서는 악’이요 ‘담쟁이는 그것을 극복하는 선’의 구도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자연생태계의 현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식충식물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을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잡아먹는 자와 먹히는 자 간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본능일 뿐이며 일상일 따름입니다.


만약 어느 사람이 잡아먹는 사자를 ‘악’으로 먹히는 임팔라를 ‘선’으로 구분하려 든다면 그는 ‘뭘 모르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담쟁이와 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자연의 일부요 담쟁이는 무엇이든 타고 올라가면서 살아야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그냥 기어오르는 것일 뿐입니다.


재미있는 사진을 보겠습니다.


처음 두 장은 아파트 옹벽과 소나무를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 사진입니다. 다음 두 장은 뒷산 산책로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를 옥죄고 있는 담쟁이 사진입니다.
 

<사진은 첨부파일을 참조바랍니다.>


옹벽 앞 소나무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같고, 특히 산책로의 아카시아나무는 거의 고사 직전입니다. 이파리도 겨우 겨우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담쟁이를 ‘고통을 주는 악’으로 옹벽과 나무를 ‘피해당하는 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아울러 앞의 시인처럼 담쟁이를 ‘선’으로 옹벽과 나무를 ‘전진을 방해하는 악’으로 규정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냥 자연계에서 늘상 있는 다반사의 하나일 뿐입니다. 담쟁이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나무도 일상이요 그로 인하여 번성을 누리고 있는 담쟁이도 일상입니다.


나무도 담쟁이도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해야 할 한 국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자연현상을, 자신의 기준과 판단에 따라 의인화시키고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덧씌워서 왜곡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나는 자연 현상 속에서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자기기만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담쟁이덩굴에게는 시인이 주장하듯 어떤 투쟁의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를 주보에까지 실은 안목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배드린 교회의 실상은 이해됩니다. 사실 그 교회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목사가 시무하던 누구나 다 아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는 횡령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교회에서 분리하여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관점도 옳다하기 힘들뿐 아니라 그것을 주보에 실은 의도도 정당하다 하기 어려울는지 모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담쟁이덩굴을 보며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투영한 사상시를 썼습니다.


어느 교회는 이 사상시를 자신들의 처지와 비슷하다 여겨 주보에 실었습니다.


사회에서 좀 인기 있다 싶으면 교회가 깊은 사색도 없이 인용하여 주보에 싣는 가벼운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한 번 짚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