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여정/단상

[단상] 난로 밖으로 뛰쳐나온 석탄의 운명은?

맑은바람청풍 2016. 7. 12. 19:06


[단상] 난로 밖으로 뛰쳐나온 석탄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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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단체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목사들이 자주 인용하기 때문에 누구나 한두 번쯤은 들어 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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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도가 혼자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며 목사에게 면담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목사는 아무 말 없이 난로에서 잘 타고 있던 석탄 한 덩어리를 꺼내어 놓았답니다. 한참 지나자 꺼낸 덩어리는 싸늘하게 식었고요. 이때 목사가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이 석탄을 보세요. 난로 안에서 함께 있을 때는 활활 잘 타지만 꺼내 놓으니 꺼져 버리지요. 성도도 교회라는 난로 안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크게 깨닫고 교회생활 열심히 했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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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세심한 목사들은 그럴듯한 부연설명 덧붙이기를 잊지 않습니다. 난로 안에서 잘 타는 석탄처럼, 교회 안에서 생활 잘하는 성도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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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성수는 기본이요 수요예배와 구역예배 등 모든 예배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된답니다. 거기다 교회 각 기관과 부서의 모임 등에도 빠지면 안 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10:25)라는 성경 말씀까지 가져다 붙이면 효과 만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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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철야기도는 기본이요 매일 새벽기도와 릴레이 중보기도 등 수많은 기도 모임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가끔 기도원 기도회에까지 참석한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예수님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1:35) 기도하셨다는 데야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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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십일조는 기본이요 선교헌금과 각종 감사헌금과 심지어 일천번제헌금까지 수십 종에 이르는 헌금을 넉넉히 하랍니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8:3)하라고 쐐기 박아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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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오직 모든 삶을 교회 중심으로 하는 것이, 난로 안의 석탄처럼, 잘하는 일이랍니다. 간간이 성경 말씀으로 확인사살까지 해버리니 반박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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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오해해도 너무 오해한 것입니다.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위와 같은 확신으로 수 세기 이상 종교생활 해온, 현재의 구미 교회들과 한국 교회들입니다. 위 논리대로 하면 지금의 교회 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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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성도)는 결코 세상 모두를 구원으로 초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우 수십 명 기껏해야 수백 명만 구원하셨을 뿐입니다. 성령께서도 그 막강한 능력을 가지고도 세계 인구의 %밖에 구원하지 못하셨습니다. 하물며 인간이 구원의 길로 초대할 수 있는 수가 제한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수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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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애태울 필요 없습니다. 오직 내 옆의 한 사람, 단 한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다보니 세계 최대의 교회, 유명한 목사, 큰 예배당 등등의 허상에 사로잡혔고, 그 때문에 난로 안의 석탄이라는 착시 현상에 발목 잡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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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석탄이 난로 안에서 잘 타느냐 밖에서 식느냐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보다는 무슨 난로이냐에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 난로가 아니라면, 아무리 잘 타는 난로와 석탄일지라도,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무슨)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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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자칭 정통기독교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부류는 아마 기독교 이단들일 것입니다. 문선명의 통일교, 정명석의 JMS, 이만희의 신천지, 이재록의 만민교회, 조희성의 영생교 승리재단, 박옥수의 구원파 외에도 무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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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워하느냐고 물어보면 교단은, 성경 구절을 가지고 뭐라 뭐라 하지만, 사실 명쾌한 것은 아닙니다. 애매모호합니다. 일반성도들도 단지 교단에서 이단으로 판정했으므로 목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앵무새마냥 되풀이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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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무슨무슨 교회(교파, 교단) 앞에 붙는 인칭명사(사람 이름)에 있습니다. 문선명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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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누구입니까?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척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들을 교주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분명 이단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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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위 정통으로 분류되는(스스로 분류한 것이지만) 나머지 교회들은 안심인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똑 같습니다. 이단 교회나 정통 교회나 오십보백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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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의 타당성은 교회앞에 사람 이름(인칭명사)’을 붙여 보면 금방 증명됩니다. ‘○○○ 목사의 XX교회, ◎◎◎ 목사의 XX교회' 등으로 회자되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역시 사람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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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 되었든, 자칭 정통이 되었든, 교회는 결코 사람(교주 또는 목사) 중심일 수 없습니다. 이단이든 정통이든 사람 중심 교회는 성경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중심(주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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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중심이신 교회가 아니라면, 그 안에서 아무리 잘 타올라도, 이건 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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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를 때는 해적선이든 여객선이든 따질 필요없이, 난로 안에서 잘 타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해적선에서 잘 타면 탈수록 세상에는 해가 될 뿐입니다. 난로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객선이라는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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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잘 탄다는 현상 하나로 모든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 안에서 아무리 잘 타도 세상은 손해요, ○○ 교회 안에서 아무리 잘 타도 세상은 손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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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위 예화의 허구와 미비점을 간파하고, 무슨 난로냐를 따져본 연후에, 잘 타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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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위 예화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역교훈(逆敎訓)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난로(교회) 안에서 열심히 타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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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tove = i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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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성도가 잘 타야할 곳은 난로 안도 아니요 교회 안도 아닙니다. 성도는 오직 세상 안에서(in the world) 잘 타야합니다! 놀라운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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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 안에서 빠져 나와야 할 상황, 무척 많습니다. 노아가 빠져 나왔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들이 만약 그곳을 빠져 나오지 않았다면 성경은 다른 인물을 통해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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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자신들의 난로를 빠져나온 목적은 또다른 난로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잘 타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난로를 빠져 나와서 다른 세상 안에서 잘 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명을 잘 감당했고(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롯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도 만족하리만큼 사명을 다하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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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와 아브라함과 롯과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던 난로를 고집하며 그곳에서만 잘 타겠노라고 고집 피웠다면, 그리고 다른 난로를 만들어 그곳에 웅크리고만 있었다면, 성경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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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죄악된 세상과 구분되되 캄캄한 세상에 빛을 비추라는 것니다. 믿음이란 세상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것(5:16)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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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제아무리 활활 타 올라도 착한 행실로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등잔은 반드시 등경 위에 있어야만 비취기 때문입니다(5:15). 반드시 세상 안에서 타야만 영광이 돌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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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하루 24시간 내내 교회 안에서 잘 타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잘 타야 할 곳은 교회 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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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진짜 잘 타올라야 할 곳은 교회 안 아니라 세상 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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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예화는, 이와같은 성경의 큰 가르침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유익하다기보다 오히려 해로운 면이 크다 하겠습니다.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